92. 하이엘프의 왕 엘레노어에게 받았던 망토를 활용해 [은신]을 발동하고, 조용히 탑을 타고 올라갔다. 탑 꼭대기에서 주변을 경계하던 하이엘프는 내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메르세데스는 적당히 기절만 시키라고 했지만, 아쉽게도 나한테 그런 재주는 없다. -푹! 경계병의 입을 틀어막고 목을 찔러 숨통을 끊었다. 하지만 경계병은 언제나 2인 1조. “뭣, 누구냐, 악!” 뒤늦게 나를 발견한 경계병의 입을 틀어막고, 그대로 대번에 목을 꺾어서 죽여버렸다. 아슬아슬했네, 하마터면 들킬 뻔했다. 탑의 경계병을 제압한 뒤에는 다시 내려와, 반대쪽 탑을 제압한 메르세데스와 합류했다. 메르세데스는 나를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는데, 아무래도 경계병을 죽여버렸다는 걸 알아차린 것 같았다. 매우 불쾌해 보이는 눈빛이었지만, 상황상 어쩔 수 없다는 건 알고 있는지 따지려 하지는 않았다. 이 잠입 루트는 전투를 최소화할 수 있지만, 아예 피를 묻히지 않을 수 있을 만큼 편한 것도 아니니까. 아무튼 그렇게 각 탑을 정리하고 난 뒤에는, 메르세데스가 준비한 장비를 활용했다. 소형 글라이더같이 생긴 묘한 물건이었는데, 원리는 모르겠지만 잠시간 활공이 가능하다고. “가지.” 활공 장비를 장착하고 그대로 탑에서 뛰어내렸다. 감시탑을 모두 정리했기 때문에 비행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대로 다크엘프의 마을처럼 요새화된 대산림을 공중에서 쭉 가로질러, 하이엘프의 마을 안쪽으로 손쉽게 입성했다. 그 뒤로는 더욱 간단했다. [은신]을 발동하고 속도를 살려 쾌속 질주, 왕이 거하고 있는 성으로 침투한다. -으적. 성의 창틀을 도끼로 깨부순 뒤, 사뿐히 안으로 내려앉았다. 성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마력감지를 펼쳤다. 그리고 동시에 어마어마한 기척이 느껴졌다. “장난 아니네, 이게 세계수?” 7층에서 느낄 수 있었던 세계수의 압도적인 마력량에 저절로 숨이 막힌다. 뭐라고 해야 하나, 이게 몬스터가 아니라 그냥 나무에서 나오고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천 년 전에 비하면 한참 약해진 상태다. 우리의 세계수는 인간족이 감히 넘봐도 될 만한 존재가 아니야.” 메르세데스는 세계수의 마력을 느끼고 움찔거리는 나를 보며 혀를 찼다. 뭐, 말은 나도 동의한다. 7층에서는 그나마 멀리서 봤었지만, 이 성은 세계수가 있는 자리에 지어진 거니까- 확실하게 실감 난다. 하이엘프들은 이걸 그냥 지키고만 있지만, 인간의 손에 넘어가면 분명히 어떤 식으로든 이용될 텐데. 이만한 마력의 덩어리가 작정하고 이용되면, 분명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을 거다. 이건 결코 어떤 집단이나 개인이 사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되는 미친 물건이다. “핵폭탄을 처음 본 사람들이 이런 기분이었으려나.” “핵폭탄?” “그런 게 있어, 그래서 왕은 어디에 있는 건데?” 나는 잠시 삼천포로 빠진 생각을 되돌렸다. 메르세데스는 손가락으로 저편의 문을 가리켰다. 세계수와 직접 연결된 옥좌가 자리한 곳, 하이엘프 왕의 알현실. -끼이익. 그 문이 저절로 움직여 열렸다. ** 나와 메르세데스는 재빨리 근처의 물건 뒤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열린 문 너머에서 누군가 나오려는 낌새는 전혀 없었다. 문 안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하나뿐.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기척이다. 7층에서 만났던 그 왕자 놈이 저 안에 있는 건 분명하다. 그런데 문은 대체 왜 혼자 열린 거지. 하이엘프식 자동문 센서가 오작동을 한 건 아닐 테고. -들어와라. “뭐야.” 머릿속에서 대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게 뭐야, 존나 이상한, 그보다 나한테 말한 건가? 숨었던 자리에서 슬금슬금 움직여 메르세데스를 쳐다보자, 나와 같은 목소리가 들린 눈치였다. 우리는 서로에게 동의를 구하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활짝 열린 문 앞에 섰다. -안으로, 들어와라. 목소리가 말하는 대로 알현실 안으로 들어서자, 저 멀리 옥좌에 앉은 왕의 모습이 보였다. “전하.” 메르세데스가 처연한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러니까, 저게 7층의 그 왕자 놈이라고? 분명 생긴 건 똑같다. 딱 봐도 싸움은 존나 못 하게 생긴 기생오라비 외모. 하지만 눈빛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선대 다크엘프 여왕보다 더 메말라 있는 눈빛. “그렇게 살금살금 오지 않아도……언젠가 이곳에 부를 생각이었다. 가까이 와라, 셋 모두.” 하이엘프 왕은 이번에는 정체불명의 텔레파시가 아닌 육성으로 말했다. 그런데, 셋이라니? “들켰나.” 나는 내 배후에서 불쑥 튀어나온 강렬한 기척에 경악했다. “너 뭐야, 어디서 튀어나왔어?” 그림자에 휩싸여 나타난 엘레노어는 씁쓸한 표정으로 내 발밑을 가리켰다. “그대의 그림자에 길을 뚫어 놓았지, 그대를 말릴 방법이 이것 말곤 떠오르지 않았거든.” 간담이 서늘했다. 엘레노어가 그림자 마법의 달인이라는 건 알지만, 이런 게 가능할 줄이야. 7층 초입에서 보여줬던 소환의 응용이겠지, 사용하기에 따라 이건 어마어마한 암살 기술이 되는 거 아닌가. “너무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마라, 그대여. 지금 놀라야 할 부분은 여기가 아니지 않나.” 엘레노어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펴 왕좌에 앉은 하이엘프 왕을 가리켰다. “왕좌에 앉은 저것은 그대의 잠입도, 나의 그림자 마법도 모두 꿰뚫어 보았다.” “백 년이 지났다고 한들, 내가 아는 그 머저리에겐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이다.” “마법에는 조금도 소질이 없는 녀석이었거든, 그런데- 저기 앉은 저건 대체 뭐란 말이냐?” 엘레노어는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기에 앉아 있는 건 절대 7층의 그 왕자 놈이 아니다. 생긴 것을 제외한 모든 점이 다르다. 나는 이번 에픽 퀘스트의 목표를 다시 떠올렸다. [퀘스트 목표] 1. 비밀을 파헤치기. 2. 흑막을 밝혀내기. 3. 전쟁을 종결시키기. 비밀을 파헤치고, 흑막을 밝혀내어, 전쟁을 종결시키기. 이런 목표가 생겼다는 건, 곧 파헤쳐야 할 흑막과 비밀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그게 저거겠지. “내가 누구인지 궁금한가, 그렇다면 가까이 와라. 모두 말해 주겠다.” 어서 들어오라는 듯 손짓하고 있는 왕을 향해, 나는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 내가 앞으로 나서자, 엘레노어와 메르세데스도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우리를 들여보낸 문이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쿵 닫혀버렸다. 이건 예상대로다. 나도 ,메르세데스도, 엘레노어도, 문이 닫혔다고 해서 꼼짝없이 갇힐 만큼 약하지 않다. “반갑다, 고결한 기사 메르세데스. 아름다운 그림자 엘레노어. 그리고- 이름 모를 인간이여.” 하이엘프 왕은 왕좌에서 내려와, 우리를 향해 조금씩 다가왔다. “인사를 하는데 대답이 없군.” “어, 반갑다.” “그래, 시원한 대답이 듣기 좋군.” 하이엘프 왕은 우리를 보며 비식 웃었다. 역시 저건 생긴 것만 저렇지, 아예 다른 사람이다. “이쪽도 이름을 밝히지, 내 이름은 엘'로휀, 그대들이 만나러 온 엘뤼온의 아버지이다.” 그럴 줄 알았지, 역시 내용물은 다른 사람이었군. 예상대로 선대 왕이 뭔가 술수를 부린 거였어. 그런데, 엘레노어는 하이엘프 왕이 밝힌 이름을 듣고 인상을 찌푸렸다. “선대 하이엘프 국왕의 이름은 분명 엘'로나벨이었는데……?” 나는 고개를 돌렸다. 말없이 검을 빼들고 있는 메르세데스도 크게 당황한 눈치였다. “이런, 착각하지 마라. 나는 엘뤼온의 아버지이지만, 동시에 엘'로나벨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엘로휀은 우리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나는 하이엘프 전체의 아버지다.” 그 순간, 막대한 마력이 파도처럼 넘쳐흘렀다. -쿠궁! 이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세계수의 거대한 마력이, 의지를 갖춘 것처럼 넘실거리며 진동을 만들어 내었다. “과거 포레스트 엘프가 자신들을 하이엘프라 칭하기 시작한 그때부터, 나는 매 순간 모두의 왕이자 아버지였다.” 나는 긴장 속에서 검을 뽑았다. 그리고 언제든 마력강화를 할 수 있도록 펜던트를 손에 쥐었다. 왕은 우리를 보며 하하, 하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 상황이 아주 재미있다는 모습이었다. 아주 대놓고 흑막이라고 말하는 꼬락서니다. 하지만 대체 왜 이 타이밍에 본색을 드러냈단 말인가. “세계수가 혼을 순환시키는 장치라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 그렇다면 그 순환이 언제부터 망가졌는지도 알고 있겠군.” “사실 순환의 굴레는 망가지지 않았다. 그저 내 혼을 순환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을 뿐이지.” “모든 하이엘프의 왕은 정식으로 왕위를 계승하고, 왕홀을 쥐고 왕좌에 앉은 순간에 나와 대체된다.” 왕은 여전히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다들 말이 없군, 이해하기 힘들었나?” 저 단순한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할 바보는 어디에도 없다. 그냥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올 뿐이다. “이해가 안 되는 건 하나야, 그걸 왜 이제 와서 우리한테 떠벌리고 있는지.” 내가 인상을 쓰며 말하자, 하이엘프 왕은 또다시 피식거리며 대답했다. “왜겠나.” 놈은 웃으며 굳게 닫혀버린 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다들 순순히 내가 부르는 대로 가까이 와 줬기 때문이지.” 그래, 떠벌려도 아무 상관이 없을 것 같으니까 떠벌린 거였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