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거울상 화살과 마법이 날아다니고, 불이 번지며 숲이 타오른다. 인간과 엘프가 한데 뒤섞여 서로를 베고, 찌르고, 쓰러트리며 목숨을 빼앗는 광경이 눈앞을 스쳐 갔다. 별 감흥 없는 광경이었다. 비극적이라고 느끼기에는 척 보기에도 너무나 조잡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싸우는 이들은 얼굴 없는 마네킹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날아다니는 무기는 영화 촬영을 위한 소품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늘도 나무도 별빛도 모두 조잡한 영상을 띄워 놓은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유치한 저질 CG 영화를 반쯤 열린 문 너머로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거 아무래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데, 내 상상력은 대체 어떻게 되어 있길래 이딴 꿈을 만드는 거지. 맥락이라고는 조금도 모르겠고, 그냥 무진장 길기만 하잖아. 원래 꿈이라는 게 그런 거긴 하지만, 몇 년 만에 꾸는 꿈의 내용이 이따위니까 뭔가 기분이 나쁜걸. “이거 언제까지 이어지는 거야.” 내 몸조차 제대로 감각되지 않는 꿈속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그럼에도 꿈은 이어졌다. 끝없이 조잡한 영상을 늘어놓으며, 한참을 보다 못해 진이 빠진 내가 꿈속에서마저 잠들게 될 때까지. 그리고 꿈속에서 한 번 더 꿈에 빠져든 그 순간, 내 눈은 저절로 트였다. “좋은 아침이다, 그대여.” 햇볕이 환하게 내리쬐는 아침이었다. ** 엘레노어는 내 덕분에 오랜만에 푹 잘 수 있었다며 감사를 표했다. 그런 것치고는 아직 피곤해 보이는 눈이지만, 피로의 이유가 비단 불면증 때문만은 아닐 거다. 고작 하루 푹 잔 걸로 풀리기에는 이래저래 쌓인 게 많았겠지. 나랑은 별 상관없는 일이다. “그나저나, 그대도 무척 푹 자더구나? 그렇게 빼던 것치고는 내 품이 편했나 보지?” 놀랍게도 사실이다. 엘레노어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오랜만에 깊이 잠들긴 했다. 생전 안 꾸던 꿈을 다 꾼 걸 보면, 평소와 다른 잠자리가 영향을 미친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애초에 나는 깊게 자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었으므로,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아니, 개꿈이나 꿨는데.” 엘레노어의 말을 대충 받아치고,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었다. 몇 시간이나 잠을 자느라 시간을 날렸으니, 남은 시간을 최대한 알뜰하게 써야 하지 않겠어? 이번 에픽 퀘스트의 목표는 엘레노어의 소망, 여왕의 명령을 완수하는 것. 하룻밤 같이 잠을 자 준 것만으로 클리어되는 퀘스트가 아니었다. 요지는 엘레노어를 편하게 해 주는 것이다. 밤에는 엘레노어와 같이 자주고, 낮에는 엘레노어의 스트레스 요인인 전쟁의 부담을 덜어주도록 하자. 8층에서 하던 일과 크게 다를 것 없다. 매일매일 전장을 누비면서 적을 쓰러트리는 거다. “꿈이라……나도 간밤에는 꿈을 꾸었지. 오랜만에 깊이 잠든 덕일까, 별난 경험이었어.” 잠이 덜 깼는지, 몽롱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엘레노어를 두고 무장을 갖추었다. ** 몬스터를 사역해 편제를 갖춘 왕국군 병력은 확실히 강력했다. 내 스펙이 너무나도 높은 탓에 위기라고 할 만한 일은 없었지만, 상대하면서 결코 만만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왕국군에는 일반적인 마법사만이 아니라 주술사와 흑마법사도 있었다. 이들은 단순히 사역한 몬스터를 조종해 공격할 뿐만이 아니라, 갖가지 마법과 작전으로 나를 몰아붙였다. 내가 아군을 끼고 싸우는 게 아니라, 혼자 적진에 난입해 싸우는 타입이라는 점을 노린 것이다. 몬스터들을 잔뜩 돌격시켜 억지로 발을 묶고, 대규모 섬멸을 위해 사용하는 마법을 나 하나에 쏟아붓는 방식. 다수의 주술사와 흑마법사들이 동시에 속박과 디버프를 중첩하니, 나로서도 그 대응은 쉽지 않았다. 사역한 몬스터를 이용해 마력감지를 방해할 수 있다는 점도 있어서, 몇 번이나 강력한 공격을 허용했다. 뭐, 말했듯이 위기라고 할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에메랄드 와이번의 공격을 맞으며 키운 [주문 내성]과 [대마법 내성] 스킬이 착실하게 나를 보호해 주었으니까. 거기에 화염, 냉기, 전격 계열은 내성 덕분에 이중으로 데미지가 반감되기도 하고. 주술사의 독 계열 공격은 반감되다 못해 아예 무효화되는 지경이었다. 심지어 이 짓거리를 계속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간 갖추지 못했던 내성도 새로 생겼다. [패시브 스킬 : 저주 내성 1레벨을 습득하셨습니다.] 스킬 자체는 꽤 흔하지만, 그동안 기회가 없어서 얻지 못했던 저주에 대한 내성. 저주 자체가 그리 강하지 않아서 그런지, 한동안 1레벨을 쉽게 벗어나지 못했지만. “야, 그거 좀 더 해봐.” “예, 예?” “저주 더 해보라고.” 흑마법사 하나를 살려서 잡아두고, 나에게 계속 저주를 쓰도록 해서 해결할 수 있었다. 잡아둔 흑마법사의 밑천을 탈탈 털어서 [저주 내성]을 3레벨까지 올린 것이 오늘. 9층에 진입한 지 이 주가 지난 날이었다. 그동안 에픽 퀘스트는 조금도 진전되지 않고 있었다. ** 엘레노어는 매일같이 나와 함께 잤지만, 어쩐지 날이 갈수록 상태가 안 좋아지고 있었다. “으응? 그게 무슨 소리냐, 그대 덕분에 요즘은 아주 살 맛이 나는걸?” “안 그래 보이는데.” “그대가 잘못 보고 있어서 그런 거다. 나는 오히려 그대가 걱정이야.” 저렇게 말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건 눈이 달렸다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엘레노어의 눈에서 불타오르던 별은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다. 쉽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느껴진다. 나이트 엘프의 비술로 기억을 공유한 적이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 눈치가 좋아진 걸까. 엘레노어의 마음이 격하게 요동치고 있다는 것을,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정말이야, 그냥 조금……고민이 많아져서 그렇다.” 이해는 한다. 내가 열심히 날뛰고 있음에도, 전쟁의 상황은 좋아질 기미가 없으니. 지금도 매일같이 적은 숫자지만 사상자가 생기고 있다. 나에게는 그저 NPC일 뿐이지만, 엘레노어에게는 소중한 자신의 동포와 백성일 터. “왕관의 무게에 목이 나갈 것 같아.” 지친 듯 말하는 엘레노어의 모습은 무척 낯설었지만, 그 표정만은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어쨌든, 이 염병할 전쟁의 판도를 크게 바꿔놓지 않는 한- 이 퀘스트는 깰 수 없을 것 같다. ** 지금까지 내가 휘젓고 다닌 것은 다크엘프의 영역 근처 일대뿐이다. 그보다 더 깊은 곳, 이를테면 다른 세력의 영역 안쪽까지 파고들어서 공세를 펼친 적은 없었다. 상대는 단순한 집단이 아니라 거대한 세력, 내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혼자서 전부를 압도할 수는 없다. 그냥 숫자만 많다면 모를까, 엘리트 NPC나 메르세데스 같은 오버스펙 개체도 세력별로 존재하는 마당이니. 하지만 이젠 달리 방법도 없고, 이 일대를 지키며 싸우는 것만으로는 더는 성장하기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뭐, 어쩌겠어. 갖다 박아야지. 노려볼만한 상대는 역시 한 번 밑천을 확인한 하이엘프 진영이다. 하이엘프 왕의 실력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높게 쳐도 메르세데스보다는 약할 거다. 그 메르세데스부터가 상식을 두어 단계는 벗어난 스펙을 갖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밖의 다른 엘리트급은 그 기사 놈 수준일 테고, 메르세데스도 지금이라면 얼마든지 이길 자신이 있다. 7층에서의 결투로 실력은 충분히 봐 두었고, 스펙은 이제 마력강화로 따라잡을 수 있으니. 나는 장비를 점검하고, 채비를 갖춘 뒤 곧바로 하이엘프의 영역을 향해 걸음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예상치 못한 곳에서 적을 맞닥뜨렸다. 장소는 다크엘프와 하이엘프의 영역 사이에 어중간하게 걸친 대수림의 외곽 지역. 내가 7층에 올라와 처음으로 엘프를 마주쳤던 그 부근에서, 눈에 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사실, 얼굴 자체는 그리 익숙하지 않지만- 못 알아볼 수가 없는 신체적 특징이 너무나 눈에 띄었다. 한쪽 귀가 짧게 잘려나간 하이엘프 여자. 메르세데스. 하이엘프 최강의 NPC가, 어째서인지 꾀죄죄한 차림을 하고 나무둥치에 기대어 쉬고 있었다. 뭐야 저게, 저년이 왜 여기 있지. 맞붙으러 갈 생각이긴 했지만, 이런 장소에서 대뜸 혼자 자빠져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저 차림은 또 뭐란 말인가. 결투 때의 정복도, 예전에 봤던 갑옷 차림도 아니다. 백 년이 지나면서 뭔가 사정이 생겼을 수도 있지만, 저만한 녀석이 왜 이렇게 굴러다니는 건지. 이유가 짐작도 안 간다. 심지어 내 기척도 제대로 못 느끼고 뻗어 있는 걸 보니, 어지간히 심하게 지친 모양인데. -저벅, 저벅. 나는 잠시간의 고민 끝에, 검을 한 손에 쥐고 메르세데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너 여기서 뭐 하냐?” “!” 메르세데스는 화들짝 놀라 눈을 뜨더니, 재빨리 검과 방패를 뽑아들고 전투태세를 취했다. 내가 입을 떼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간격에 들어간 순간 바로 자세를 잡았다. 그 미친 스펙이나 전투감각이 어디 가진 않았나 보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너, 네놈은……!” 메르세데스는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나한테는 몇 주 전, 그리고 녀석에게는 백이십 년 전. 그 귀를 잘라버렸던 때보다도, 더욱 증오가 가득한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