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에메랄드 와이번 에메랄드 와이번의 스펙이 어느 정도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연하다, 잡으라고 있는 몬스터가 아니니까. 하나의 던전을 구성하는 기믹으로 배치된 존재, 반드시 피해서 행동해야만 하는 무대장치. 하지만 상층에 등장하는 와이번 계통의 몬스터가 어느 정도 스펙인지 생각해 보면, 대충 짐작 정도는 할 수 있다. 일단 저만한 위력의 복합 속성 광선을 무한대로 쏘아낼 수 있을만큼의 마력을 갖고 있다는 건 확정. 쏘아지는 광선에서 느껴지는 마력량만 해도 대충 내 전체 마력과 비슷한 정도다. 나는 전사 클래스라 마력량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어마어마한 수치다. 일단 내 기본 스펙부터가 8층 수준은 한참 넘어서 있으니까. 비슷하기만 해도 반칙 수준인 거다. 그리고 와이번은 드래곤의 하위호환쯤 되는 종족으로, 그 신체의 강인함도 예사롭지 않다. 다만 여기까지 오면서 만난 다른 몬스터처럼, 육체가 녹색 수정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이야기가 좀 다르다. 그렇다면 놈들의 방어력도 결국 녹색 수정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 즉, 유리 대포일 가능성이 있다는 거다. 뭐, 이런 식의 희망적 관측만 쌓아놓고 적을 판단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긴 하지만. 아무튼 승산은 충분하다. 광선 이외의 공격이라면 맞고 버틸 자신도 있다. “대충 됐나.” 지쳤던 몸이 만전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음을 확인하고, 나는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에메랄드 와이번의 마력이 느껴지는 장소를 향해. ** 비취의 영약이 고여 있는 샘은 넓은 공동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리고 그 공동의 구석마다 굴이 하나씩 파여 있었고, 그 굴에 에메랄드 와이번이 자리 잡고 있다. 별 생각 없이 영약을 향해 달려가면 사방팔방의 와이번에게 저격당하는 구조. 여기선 원래 감지를 피할 수 있는 우회로를 통해 와이번들을 지나치고, 던전의 기믹을 발동해 시선을 돌려놔야 한다. 하지만 나는 기믹을 써먹을 수 없으므로, 우회로만을 이용한다. 이곳의 와이번들은 주기적으로 잠에 들고, 침입자를 감지하면 깨어나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던전의 우회로를 사용해 굴로 들어가면, 놈들의 잠을 깨우지 않고 이동할 수 있다. 이 놈들이 잠에서 깨는 순간은, 도전자가 놈들에게 접촉하거나 우회로와 굴을 벗어나 놈들의 감지에 걸릴 때. 반대로 말하면, 우회로를 벗어나지 않거나 접촉하기 전까지는 안 깨어난다는 뜻이다. 선빵을 박고 시작하기 딱 좋다는 거다. 눈치를 보면서 슬슬 피해 가야 하는 와이번에게, 나는 당당히 다가가 검을 들어 올렸다. “덤벼라, 익룡 새꺄.” -콰직! 와이번 한 마리의 눈알에 있는 힘껏 검을 박아넣었다. 생각보다 더 깊이 박혔다. -그오오오오오오!! 와이번은 크게 소리치며 깨어났고, 그 순간 주변의 공기가 확 달라졌다. 꺠어난 와이번의 몸에서 마력이 흘러넘치고, 주변에 무작위하게 퍼져 있던 마력이 그에 공명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마력량에 기가 질릴 정도였다. 허 시발, 이게 드래곤이 아니라 와이번이라고? 와이번의 체내에 쌓여 있는 마력량도 어마어마한데, 대기 중의 마력마저 놈에게 지배당하고 있다. 이딴 미친 생물을 여섯이나 가져다 놓을 생각을 하다니, 제정신이 아니다. 이 탑을 설계한 놈이 누구건 간에,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레벨 디자인을 해놓을 리가 없다. -키이이이잉! 그렇게 잠시 얼타는 사이, 와이번의 쩍 벌어진 주둥아리에 마력이 모여들었다. ** 나는 당연히 선빵을 맞은 와이번이 취할 행동을 몇 가지 상상해 뒀다. 하지만 이건 살짝 예상을 빗나갔다. 상정하지 못한 정도는 아니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어이가 없네. 근거리니까 당연히 발톱이나 이빨로 덤벼올 줄 알았는데, 대뜸 면상에다가 광선을 박으려고 하다니. 빈대 잡겠다고 미사일을 쏘는 꼴이잖아. -콰과과광!! 물론 신속한 빈대인 나는 미사일을 어렵지 않게 피해냈다. 원래 이런 광역 공격은 멀리서보다 가까이에서 피하는 게 더 쉽다. 사출기는 사각지대가 분명하니까. 와이번의 턱 옆으로 회피함과 동시에, 한 번 더 검을 휘둘러 놈의 목 언저리를 베어보았다. -촤악! 역시 생각보다 잘 베인다. 예상대로 이놈들의 방어력은 그렇게 대단치 않다. 이거라면 거리를 좁힌 상태에서 계속 베는 것만으로 처치할 수 있을 것 같다. 문제는 이놈이 나를 그렇게 두느냐인데. -그와아아아!! 와이번이 소리를 지르며 날개 끝의 발톱을 휘둘렀다. 상당히 빠른 속도지만, 마력강화를 발동한 메르세데스의 공격에 비하면 아직 괜찮은 수준이다. 팔과 날개가 일체화된 특유의 신체구조 탓에, 동작이 너무 크다는 점도 주요했다. -카가가가각! 휘둘러진 발톱과 날개 끄트머리에 걸린 벽면이 좍좍 갈려나간다. 발톱 공격을 피해낸 직후에는 놈의 턱주가리가 닥쳐왔다. 그렇겠지, 이쪽으로 오면 이젠 이빨이겠지. 역시 이놈들의 강함은 원거리에서 쏘아대는 무한 포격에 의존하고 있다. 딱히 그걸 뺀다고 약한 건 아니다. 평범한 8층 도전자의 스펙이라면 발톱 공격에 반응하지 못하고 찢겼을 것이다. 하지만 딱 그것까지는 반응하고 피할 수 있는 수준의 스펙이 있다면, 대응해야 할 패턴 자체가 적다. 지형 특성상 비행도 불가능, 근거리에서는 포격도 마음대로 못 하고. 그렇다면 남은 건 결국 근접전뿐인데, 저 어정쩡한 신체구조는 근접 전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날개를 퍼덕거리고 날아올라서 포격하는 것만으로 다 이길 수 있을 테니, 저따위 구조를 하고 있는 거겠지. 이건 비유하자면 티라노사우르스와 인간의 대결 같은 것이다. 평범하게 생각하면 인간이 티라노의 상대가 될 리가 없지만, 종목을 인간이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면 어떨까. 티라노사우르스의 그 옹졸한 앞다리로 인간과 권투 시합을 해서 이길 순 없지 않겠는가. 나는 이 싸움의 종목을 일대일 근접 육탄전으로 정했고, 와이번의 몸뚱이는 근접전에 적합하지 않다. 고작 그뿐이지만, 내 승률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 와이번은 신체 구조가 근접전에 부적합할 뿐, 딱히 지능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녀석은 근접전이 이어질수록 본인만 다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현명한 선택을 했다. -그오오오오! 바로 버둥거리며 굴 밖으로 나가려고 한 것이다. 일단 처한 환경을 바꾸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이 플라잉-도마뱀 새끼는 지능이 낮지는 않지만 딱히 똑똑한 것도 아니었다. 나가려면 진작에 나갔어야지, 여기저기 다 베인 상태에서 그러면 나갈 수 있을 줄 알았냐?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 -콰곽! 콱! 인벤토리에서 대형 장병기를 꺼내 집어던져, 와이번의 날개를 바닥에 꿰어버렸다. 이미 잔뜩 부상을 당한 상태인 만큼 굴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속도도 대단치 않았고, 반대로 내겐 여유가 있었다. 꿰뚫린 날개를 힘으로 뜯어내고 나가려 해도, 내가 새 창을 던져서 다시 꽂아넣는 게 더 빨랐다. -그아아아아! 와이번의 포효가 이제는 그냥 비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아, 그러고 보니 저 포효에 피어 효과도 있지 않나? 근데 마비 내성 때문인지 아무 효과도 안 느껴지네. 역시 내성은 올려두면 무조건 이득이라니까. -쿠웅! 녹색 수정이 돋아난 와이번의 몸은 금세 걸레짝이 되었고, 이젠 힘이 다 빠졌는지 바닥에 쓰러졌다. 이러면 남은 건 숨통을 끊는 것뿐이다. 잡으라고 있는 몬스터도 아니고, 보스도 아니라서 보상은 뭘 줄까 싶긴 한데. 은근히 기대된다. 뻗어버린 와이번의 모가지를 짓밟으며 검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와이번의 주둥아리에 막대한 마력이 모여드는 것이 느껴졌다. “마지막까지 지랄이네.” 발악으로 최후의 광선 한 발을 쏘려는 건가 싶어서, 재빨리 사각지대로 몸을 옮겼다. 그러나 와이번은 광선을 쏘지 않았다. 모여든 마력은 빛나는 구체가 되어 굴 바깥을 향해 날아갔다. 뭐지, 기력이 딸려서 이제 못 쏘게 된 건가? 하지만 왜 바깥쪽을 향해서 쏜 거지? “아.” 그 이유를 깨달은 순간, 상황은 이미 늦어 있었다. 마력감지에 어마어마한 힘의 격류가 걸려들었다. -그오오오오오!! -우오오오오오!! -그아아아아아!! 천지를 뒤흔드는 포효와 저절로 소름이 돋는 마력의 파도. 에메랄드 와이번의 마지막 선택은 구조 요청, 빛의 구슬을 통해 다른 굴의 와이번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이놈들에게 동족을 향한 정 따위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잠들어 있던 와이번이 모두 깨어났다. 이런 방법이 있었으면 왜 굴 밖으로 기어나가려 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건 와이번 본인만이 알겠지. 어쩌면 구조 요청이 아니라 이판사판으로 다른 놈들의 잠을 억지로 깨운 걸 수도 있겠다. -쿵쿵쿵쿵쿵! 와이번 다섯 마리의 발소리가 들리고, 곧 막대한 마력이 한 점으로 집중되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여태 그랬던 것처럼, 깨어나자마자 침입자를 향해 일직선으로 광선을 갈기려는 것이다. 그것도 다섯 마리가 동시에. 씨발. 이건 못 피하는데. 직후, 눈을 뜨기조차 힘든 빛이 시야를 모조리 덮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