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광란의 질주 보스를 처치하자, 제단에 놓인 석상들이 일제히 무너졌다. 이제 무너진 석상 아래에 숨겨진 레버를 당기고, 몇 가지 조작을 더 가하면 히든 던전에 진입할 수 있다.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한 번 더 장비를 점검한다. 에보니 스틸로 만든 다크엘프제 방어구 풀세트. 무기도 가장 좋은 것으로 착용하고, 방패 아래로 에르웬이 만들어 준 팔목보호대를 착용했다. 앞으로 몇 층을 더 올라가야 수준이 맞는 적이 나올까- 그런 생각을 한 게 몇 분 전이지만. 이 던전을 기믹 수행 없이 혼자서 돌파하려면 이 정도 준비는 당연히 해야 한다. -끼기기기긱! 제단 바닥이 열리고 히든 던전으로 향하는 문이 드러났다. 곧바로 안으로 들어왔다. [비취의 계단] 히든 던전은 비취라는 이름 그대로 녹색의 수정이 가득한 지하 신전 비슷한 곳이다. 물론 신전은 신전인데, 너무 고대 양식으로 만들어진 데다가 지하라는 특성 탓에 동굴에 더 가깝다. 오픈 커뮤니티에서 얻은 던전 지도를 켜 놓고, 천천히 계단을 따라 내려간다. -딸랑! 어디선가 작은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마력감지에 몇 종류의 생명 반응이 걸린다. 녹색 수정으로 만들어진 나비 같은 것이 내게 접근해 왔다. 수정 나비는 내 주변을 살랑살랑 날아다니더니, 날개를 퍼덕여 둥근 광원체를 쏘아냈다. 내가 [집광] 스킬을 사용할 때와 비슷한 광원이다. 손을 뻗어 만져보았다. -치지직……! 강한 열기를 뿜어내는 광원체가 손가락 끝을 지졌다. 이렇게 작은데도 내 화염 내성을 뚫는다. 위력이 높아서 그런 게 아니라, 화염 내성으로 막을 수 없는 복합 속성이라 그렇다. 빛의 구슬을 쏘아대는 나비들을 손으로 붙잡아 으깨버리고, 이어서 계단을 내려갔다. 이 히든 던전의 몬스터는 모두 이런 타입이다. 몬스터 자체는 그렇게 강하지 않지만, 저런 빛구슬이나 광선을 쏘아서 원거리 공격을 하는 방식. 7층의 히든 보스였던 크리스탈 거미와 비슷하면서 미묘하게 다른 느낌이다. 잠시 후, 무거운 발소리와 함께 새로운 몬스터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거북이 형태다. 등딱지가 녹색 수정 덩어리로 되어 있어서, 거북이라기보다는 사족보행 달팽이 같은 외형이다. -우우웅……! 거북이의 입에 녹색 빛구슬이 모였다. 모여든 빛구슬은 여러 갈래의 광선이 되어 내게 쏟아졌다. 검을 휘둘러 날아드는 빛구슬을 쳐내고, 단번에 거북이에게 접근해 일격을 먹였다. -콰직! 새까만 칼날이 수정 덩어리를 뚫고 박혀 들어가, 거북이의 숨통을 끊었다. 던전의 기믹은 이 거북이가 나타나는 구간부터 시작된다. 때마침 계단만 따라 내려가면 그만이던 구조가 확 넓어지고, 동서남북으로 다양한 갈림길이 나타났다. 가볍게 마력감지를 펼쳐 확인해 보니, 공략글에 나와 있는 기믹 수행용 장치들도 모두 그대로 있는 모양이다. “후우……해보자, 해 봐.” 심호흡을 하고, 가볍게 몸을 풀고, 기믹이 있는 동쪽 길을 바라보고, 자세를 잡는다. -쿵! 그대로 발밑을 있는 힘껏 박차, 지도에 표시된 길을 따라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부우우욱, 하는 칼바람 소리가 귓가에 스치는 초고속 질주를 시작하고 대략 이 초 뒤. -찌릿. 직감, 마력감지, 감각 강화, 내 시야를 넓혀주는 세 가지 스킬이 모두 동시에 경고를 외친다. 발 밑을 주의하라고. -콰과광!! 지면에서 거대한 광선의 기둥이 솟아올랐다. ** 크리스탈 거미의 입에서 발사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굵기의 녹색 광선. SF영화에 종종 나오곤 하는, 위성 병기의 포격을 연상케 하는 공격이 발밑에서 솟구쳤다. “시! 발!” 비명 대신 저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진짜 장난이 아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발은 멈추지 않는다. 달리는 걸 멈추면 죽는다. -콰과광! 쏘아지는 광선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달려나가는 나를 노리고 몇 번이고 연달아 쏘아진다. 이 끝없이 쏘아지는 양심 없는 광선이 바로 이 던전의 기믹이다. 비취의 영약은 이 던전 최하층에 고여 있는 샘물, 그리고 그 샘물을 지키는 살벌한 몬스터가 있으니. 미친 감지범위와 미친 사거리의 광선을 무한대로 쏘아내는 괴물, 에메랄드 와이번이 그것이다. 에메랄드 와이번은 이 구간에 들어선 침입자를 감지해, 침입자가 있는 방향을 향해 냅다 광선을 쏴버린다. 위력은 즉사 수준, 광선의 면적도 뭉쳐있는 사람 서너 명쯤은 한 번에 덮쳐 증발시킬 수 있을 만큼 넓다. 그 미친 광선을 피하는 방법은 하나. 파티원들과 협력해 이 던전의 장치를 작동시켜 광선을 다른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뿐이다. 떨어져 있는 장치 여럿을 동시에 작동시켜야 하므로, 당연히 혼자서는 못 한다. 다른 탑의 도전자들에겐 일종의 협력 퍼즐 게임이지만. 솔플러인 나한테는 목숨을 걸고 하는 러닝 액션 게임인 셈이다. -콰과광! “으억, 씹!” 광선 포격을 피해 미친 듯이 달려나가는 내 앞길을 또 한발의 광선이 가로막았다. 나는 재빨리 달리는 방향을 억지로 틀고, 던전의 벽을 밟아서 회피해 냈다. 지금 꼴을 보면 알겠지만, 광선을 쏘는 와이번은 한 마리가 아니다. 전부 다 해서 여섯 마리라던가. 기믹을 수행할 수 있다면 여섯 마리든 열 마리든 아무 상관 없겠지만, 나는 사정이 다르다. 그나마 마력감지를 익혀서 광선이 날아오는 것을 미리 감지할 수 있기에 망정이지. 그냥 뭣도 모르고 뛰어들었으면 지금쯤 광선을 세 발쯤 맞고도 남았을 것이다. 한 번만 맞아도 뒤지겠지만! 그 때, 마력감지가 애매한 위치에서 동시에 쏘아지는 광선을 감지했다. 인벤토리에서 손도끼를 꺼내, 좁은 통로의 벽면에 박아넣었다. 어마어마한 가속도가 붙었던 몸이 단번에 제동하고, 한 발짝 앞과 두 발짝 뒤의 위치를 광선이 꿰뚫었다. “허, 씨발.” 젠장, 이런 게 또 문제다. 그냥 계속 달리기만 할 수 있으면 차라리 편할 거다. 타이밍에 맞춘 정확한 방향전환과 정지를 해내지 못하면, 그것대로 광선에 맞을 수가 있다. 이렇게 멈추는 것도 오래 끌면 안 된다. 발밑에서 다시금 찌릿한 경고가 울렸다. [혼신] “후웁!” 인생 최장거리의 제자리 멀리뛰기로, 발밑에서 쏘아진 광선을 피해냈다. ** 이 광선 포격의 가장 좆같은 점은,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더 빨리 날아온다는 점이다. 에메랄드 와이번이 자리를 잡고 있는 장소가 영약이 고여 있는 위치와 매우 가깝기 때문이다.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광선의 발사 지점이 가까워지니까, 그만큼 광선이 빨리 날아온다는 것. 사실 좆같은 점은 그 밖에도 많다. 일단, 광선에 맞아 박살 나고 수복되고를 반복하며 던전의 지형이 조금씩 바뀌어 버린다는 점. 지형이 계속 바뀌어대는 탓에 원래 예정보다 이동 경로의 거리가 훌쩍 늘어나고 말았다. 나는 무한으로 달릴 수 있는 러닝 액션 게임의 주인공과 다르게, 엄연히 체력에 한계가 있다. 달리는 중에 틈틈이 포션을 섭취할 수 있긴 하지만, 포션을 마시다가 호흡이 꼬일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자칫 발이 꼬이기라도 하면 광선에 맞아 뒈질 텐데, 지형마저 지랄이 나니까 욕을 안 할 수가 없다. 그리고 광선 포격과는 별개로, 여기가 어쨌든 던전이라는 점. 던전에는 당연히 몬스터가 나온다. 초반에 나오던 나비나 거북이 정도라면 무시할 수 있겠지만, 점점 크고 센 놈들이 나오고 있다. -그오오오오! 지금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직선 방향에 수정체로 이루어진 말대가리 괴물이 나타났다. 나는 재빨리 인벤토리에서 스파이크 박힌 방패를 꺼냈다. 방패를 내세운 뒤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려나가, 정확한 타이밍에 [혼신]을 발동시켰다. -콰광! 수정으로 이루어진 말대가리 괴물은 들이받힌 그대로 박살이 났다. 내 스펙이 조금만 딸렸어도 이렇게 몬스터를 몸으로 뚫고 지나가는 짓은 못했을 거다. 그렇게 속으로 불평하는 한편, [질주]스킬의 레벨이 올랐다는 시스템 메시지가 눈앞에 표시되었다. 영약이 있는 장소에 가까워질수록 위험요소는 점점 늘어가고 있지만, 몸은 점점 편해지고 있다. 던전의 위험도가 올라가는 것보다 내가 성장하는 속도가 더 빨랐기 때문이다. 역시 나는 위기상황에 처하면 훨씬 빠르게 성장한다. ** 한참을 달려 마침내 유일한 안전지대에 도착했다. 장거리 달리기를 하다 보면 시간 감각이 둔해진다던데, 대체 몇 시간을 내리 달린 건지 감이 안 온다. “흐아……” 다리가 떨리고 숨도 마음처럼 잘 쉬어지지 않는다. 입에서는 단내가 나고 눈앞이 어지럽다. 고개를 숙이면 토할 것 같아서, 일부러 천장을 바라보며 숨을 골랐다. 이 던전을 그냥 달려서 돌파한 사람은 아마 전 서버에 나 하나 뿐일 거다. [빨간 포션] 주저앉고 싶은 마음을 참고 억지로 포션을 들이켰다. 지쳐있던 몸은 포션과 [전투 재생]의 효과로 금방 회복된다. 다시 한번 장비를 점검하고 전투 준비를 한다. 이제 남은 건 하나뿐이다. 저 바닥에 고여 있는 영약을 퍼담는 것. 하지만 문제는 여태껏 줄기차게 광선을 쏴대던 와이번이 영약 고인 바닥 근처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곳에서의 정상적인 플레이 방식은, 던전의 장치와 미끼를 활용해 와이번의 시선을 돌리고 영약만 쏙 빼 오는 것. 이것도 당연히 솔플러인 내겐 불가능한 방법이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단순하다. 다 죽이고 뺏어오면 된다. 안전한 곳에 자리잡고 마음대로 저격해대는 것도 이젠 끝이다, 좆같은 익룡 새끼들아. 이 층에 내 수준에 맞는 적이 없다면, 찾아가면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