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 정면돌파 엘리시온의 도시 구획은 크게 넷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가장 바깥에 위치한 외곽지역이자 내가 머무르고 있는 그레이 캐슬. 온갖 범죄가 들끓는 회색 지대. 둘째, 그 안쪽의 컬러 그리드. 레드부터 퍼플까지 일곱 개의 구역으로 세분화되어 있는 최대 크기의 거주 구역. 셋째, 엘리시온의 심장부이자 수도 역할을 하는 화이트 존. 온갖 행정 시설과 대형 기업이 밀집되어 있는 도시. 마지막 넷째, 도시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외부와 단절된 정체불명의 낙원, 유토피아 시티. 퀘스트의 최종 목표인 상원의원도, 사신들이 노리는 식재료도, 모두 화이트 존 안에 존재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다음 층으로 올라가기 위한 미궁 지역도 화이트 존에 위치해 있다. 정확하게는 화이트 존의 지하- 버려진 휴머노이드와 드론들이 방황하고 있는 ‘블랙 존’이 23층의 미궁 지역이다. 23층 미궁의 보스는 오래전 버려진 인공지능이 스스로 개조를 거듭한 끝에 탄생했다는, 일명 ‘키메라 드론’ 이라는 녀석. 하지만 이 23층의 진짜 보스는 사실 그 키메라 드론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진짜 난관은 따로 있다고 해야 하나. 엘리시온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으로서, 화이트 존에 갖춰진 막대한 경비 병력이야말로 23층의 진정한 보스. 보스인 키메라 드론의 공략보다, 그 경비 병력을 뚫고 블랙 존까지 진입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것 같다. 하나하나가 네임드 개체 수준으로 강력한 경비병력이 무한에 가깝게 보충되는 탓에, 전투로 뚫는 것은 거의 불가능. 현재는 여러 스킬을 활용해 무력충돌을 피하며 잠입하는 방식의 진행이 정석 공략법으로 자리 잡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런 화이트 존으로 스무 명이 넘는 사신들을 이끌고 침입하는 것은- 과연 얼마나 힘들 것인가. 잘 모르겠지만, 일단 레드 그리드를 통과하며 짐작한 바로는- 생각보다 훨씬 쉬울지도 모르겠다. “이거 존나 사기잖아.” 사신들은 나노슈트에 장착된 ‘은폐장’이라는 모드를 사용해, 완벽에 가까운 투명화가 가능하다. 거기에 은폐장은 단순히 모습을 감추는 것뿐만이 아니라, 가동 중에 발생하는 모든 소음을 제로로 만들어 준다. 뿐만 아니라, 적외선 탐지기나 굴절 감지기등의 각종 보안장치까지 완벽하게 무시할 수 있기까지 하다. 아무리 화이트 존의 경비가 삼엄하더라도, 사신들의 은폐장 앞에서는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다. 물론 나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암영]스킬을 사용하면 이 정도의 보안장치는 무시하고 이동할 수 있고. “당연하지, 은폐장은 13레벨 특수 모드야. 대부분의 감시체계에는 절대 걸리지 않지.” “마, 맞아요, 최상급 군사용 감시체계로도 은폐장은 잡아낼 수 없어요……” “거꾸로 묻고 싶은데, 그러는 너는 어떻게 은폐장을 쓰고 있는 우리를 감지한 거야?” 손쉽게 도달한 화이트 존의 입구를 앞에 두고, 귀에 끼운 통신기를 통해 사신들의 물음이 전해져 왔다. 그런데 어떻게 감지한 거냐고 물어봐도, 마력감지로 잡아낸 것도 아니라서- 딱히 할 말이 없네. “어……직감?” “으, 괴물.” 그래서 대충 대답했더니, 3호 사신이 징그럽다는 듯이 그렇게 말을 흘렸다. 뭐 어쩌라고. “그래도 괴물 뮤턴트가 같은 편이니까 든든하네, 바로 파파한테 가는 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식재료 확보를 위한 약탈 여정이지만, 우리의 첫 목표물은 상원의원이다. 말해두는데, 이건 절대 내가 설정한 목표가 아니다. 무려 여기 이 사신들이 먼저 제안한 것이다. “파파의 벙커만 털어도 돈가스를 백 번은 먹을 수 있을 거야!” 녀석들의 파파- 상원의원의 벙커에 대량의 식료품이 저장된 창고가 있다는 황당한 이유로. 세상에 이렇게까지 해로운 식충이들은 달리 없을 거다. ** 예상대로, 화이트 존의 입구에 존재하는 경비 로봇은 우리의 은신을 감지할 수 없었다. 공항 검색대 비스름한 보안 게이트도 아무렇지 않게 통과해 버리고, 손쉽게 화이트 존에 입성할 수 있었다. 화이트 존의 도시는 그레이 캐슬은 물론이요, 레드 그리드와도 무척 다른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지나온 두 구역이 정석 사이버펑크에 가까운 느낌이었다면, 여기는 좀 더 미래적 분위기가 난다고 해야 하나. 사이버펑크라기보다는 정통 SF에서 묘사되는 도시에 더 가까운 느낌이다. 물론 실상은 그렇지 않지만. “겉보기만 번드르르하구만.” 광역으로 마력감지를 돌려 보니, 이 화이트 존은 정말 겉만 그럴듯하게 꾸며 놓은 환락의 도시였다. 고급 사교클럽처럼 꾸며놓은 건물 안에서는 매춘이, 오페라 하우스처럼 생긴 극장에서는 천박한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저기 보이는 대형 백화점 건물은 몇 개의 층이 통째로 성인용품만 팔고 있는데다가, 지하는 어휴, 장난이 아니네. 저런 건물들이 공공기관이랑 당당하게 등을 맞대고 우뚝 솟아 있다는 사실에 인지부조화가 올 지경이다. “파파의 벙커는 이쪽이야, 어서 가자.” 나는 4호 사신의 안내를 따라 도시 안쪽으로 이동했다. 벙커로 향하는 길은 상당히 복잡한 루트였다. 사신들의 말에 따르면, 상원의원은 강박에 가까울 만큼 안전에 예민하게 군다고 한다. 그래서 화이트 존 안에서도 쉽게 찾아가기 힘든 장소에 벙커를 지어 놓고, 그걸 집무실로 쓰고 있다나. “다 왔어, 저기가 입구야.” 이렇게 도착해 보니 확실히 그런 것 같았다. 상원의원의 벙커는 말 그대로 빌딩 숲 사이의 요새였다. 그리고, 벙커 입구를 지키는 경비로봇의 숫자만 해도 마흔 대가 넘는다. 아니, 저게 경비 로봇은 맞는 건가. 시커먼 동체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화기가 다닥다닥 붙어 있고, 무슨 레이저 터렛 같은 것도 장치되어 있다. 뭔, 경비 로봇이 아니라 군사용 대량살상병기처럼 생겨먹었네. 사신의 은폐장은 저것들도 거의 다 무시할 수 있지만, 첨단 기술이 아닌 [암영]스킬로는 여기까지가 한계다. [암영]은 분명 훌륭한 은신 스킬이지만, 은폐장처럼 모든 흔적을 깨끗이 지울 수 있는 건 아니라서 말이지. “그, 그럼 저희는 작전대로 뒷문으로 갈 건데요, 어쩌실 거예요?” 사신들은 은폐장을 믿고 뒷문으로 침입해, 안쪽의 보안 설비를 무력화하고 이동한다는 작전을 짜둔 상태다. 은폐장을 쓸 수 없는 나는 다른 방식으로 침입해야만 하는데, 어떻게 침입할 예정인지는 아직 설명해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실 아무 계획도 없었거든. 슬금슬금 잠입하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아서 말이야. “나는 정문으로 간다.” 당당하게 정문으로 뚫고 들어가서, 상원의원의 목을 따고, 다시 정문으로 돌아 나온다. 말로 하니까 좀 이상하게 들리지만, 그냥 늘 하던 대로 하는 거다. ** -애애애애애애앵!!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리며, 새까만 동체에 중화기를 붙인 경비로봇들이 일제히 대열을 갖춘다. 사신들을 뒷문으로 보낸 후, [암영]스킬을 풀고 로봇 한 대를 작살냈더니 바로 이 모양이다.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침입자를 향한 경고 한 번쯤은 날려줄 만도 한데, 이놈들은 그런 것도 없었다. -투두두두두두!! 다짜고짜 쏘아지는 총탄의 세례, 나는 큼직한 방패 하나를 내세워 마력을 두르고 그대로 전진했다. 대단한 기교를 부릴 것도 없었다. 그대로 대열을 갖춘 로봇들을 들이받는 것만으로 전열은 손쉽게 무너졌다. 안쪽으로 파고들어 장검과 도끼를 휘둘러 새까만 로봇들을 차례차례 토막 내자, 삐삐거리는 비프음이 울린다. 다음 순간, 벙커 입구의 바닥 부분이 열리며 회색 동체의 인간형 로봇들이 무기를 들고 나타났다. “저거 본 적 있는데.” 오픈 커뮤니티에 올라와 있는 23층 주요 몬스터 일람에 기록되어 있는 로봇이었다. 이름이 뭐더라, 아무튼 무슨 군용 휴머노이드라고 들었는데- 왜 개인 벙커에 군용 병기가 저렇게 많은 건데. 어쨌든 병력이 잔뜩 동원되는 건 나쁘지 않다. 나한테 어그로가 끌릴수록 사신들은 더 편하게 움직일 수 있겠지. 무엇보다 나는 아직 사신 외의 제대로 된 23층의 몬스터와 싸워 본 적이 없다. 갱단원들은 허수아비 같은 거고. 보스전보다 더 어렵다는 경비로봇의 물량공세를 나는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그것도 궁금한 참이었고. [13등급 적대 행위를 감지하였습니다. 적성 대상 1체를 확인하였습니다. 제거 절차를 시작합니다.] 일단 총부터 쏴갈기고 적대행위를 탐지했다고 지껄이는 병신같은 로봇의 말을 들으며, 몸에 마력을 둘렀다. [라이트닝 차지] [대전] [약점 간파] 실전 상황이라면 전격장의 연습도 더 잘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라이트닝 차지]까지 발동한 순간. [적성 대상의 15등급 이상 에너지 방출을 확인했습니다. 제거를 위해 추가 병력 지원을 요청합니다.] 벙커의 문이 열리며, 보다 요란하고 괴상한 외형을 지닌 로봇과 다수의 드론들이 추가로 배치되었다. 내 [라이트닝 차지]를 감지하고 숫자를 늘린 모양인데, 그럼 이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쿠르릉! 나는 마력강화를 발동해, [라이트닝 차지]로 방출되는 전력의 기세를 더 높였다. 어디, 나를 막으려면 군대를 끌고 와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