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먼지 칼날 단순히 모습을 완벽히 감추는 게 전부라면 대응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석회암질의 짱돌 하나를 꺼내, 왼손으로 움켜쥐어 가루가 되도록 부쉈다. 그 후, 만들어진 흰 가루에 약간의 마력을 담아 주변으로 흩뿌렸다. 그리고 [사고 가속]을 사용해 분진의 움직임을 관찰한다. 꽤나 넓은 범위에 흩뿌렸지만, 뭔가가 분진을 뒤집어쓰는 듯한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그리고 순간 찌릿. 직감이 반응하는 대로 방패를 들어 올렸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방패의 윗면이 베여나갔다. 사신의 공격이 틀림없다. 하지만 주위로 흩뿌린 분진은 거의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허, 이건 투명화라는 수준이 아닌데.” 발자국이 남지 않는 것을 보고 대충 예감했지만, 역시 사신은 단순히 모습을 감추기만 하는 게 아니다. 마치, 이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가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것 같다. 이딴 게 마법이 아니라 과학 기술이라니. 조금 전에 한 차례 접촉한 게 아니었다면, 원거리에서 공격을 날리고 있는 거라고 착각했을 거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다, 사신은 분명히 이 근처에 있다. 실체가 있는 놈이다. 사신의 공격에 훼손된 방패를 내려다보았다. 뭔가 날카로운 것에 베인 모양새다. 검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참격 계열의 공격. 내 방패를 이토록 쉽게 베어낸 걸 보니, 보통 예리한 무기가 아니다. 내 몸도 어떻게든 벨 수 있겠는걸. 직감에 많이 의존하는 방식이 되겠지만, 일부러 빈틈을 내주고 타이밍을 맞춰 카운터를 먹여 봐야겠다. 방패를 일부러 살짝 내리고, 오른손에 쥔 도끼에 마력을 흘려 넣는다. 오러는 형성하지 않는다. 오러는 막대한 공격력을 자랑하지만, 검기나 의념기같은 고급 기술이 아니면 넓은 범위를 타격하기는 어렵다. 현재 내 마력회로의 상태로는 그런 고급 기술을 쓸 수 없으니, 일단은 단순하게 대량의 마력을 때려 붓자. -찌릿. 다시 한번 경고하는 직감, 즉시 [철벽]과 [혼신]스킬을 사용해 방어력을 보충하고 회피는 포기한다.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목을 스치고 지나간다. 경동맥이 있는 위치가 살짝 베였다. 동시에 마력을 때려넣은 도끼를 공격이 날아든 방향으로 힘차게 내려찍는다. -콰앙!! 폭발하는 마력이 주변 일대를 휩쓴다. 아이언피스트의 아지트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아지트에 있던 갱단원들이 휘말리며 시끄럽게 비명을 지르고 난리를 친다. 그리고 그 요란한 소음과 붕괴 사이. 한계까지 발휘된 [초감각]스킬은 허공에서 흔들리는 검은 입자의 무리를 발견해 내었다. “잡았다.” [라이트닝 차지]를 두르고 [대전]을 발동시키며, 옅게 마력을 두른 손으로 입자를 붙잡았고. 그대로 붕괴되어가는 지면을 향해 힘껏 집어 던지자, 마침내 놈의 모습이 드러났다. -치지직……! 오래된 텔레비전의 노이즈를 연상시키는 잡음과 함께, 천천히 드러나는 사신의 정체. 검은 바디슈트로 전신을 감싸고 있는, 검을 든 암살자가 그곳에 있었다. ** 내 손에 잡힌 검은 입자를 본 순간, 나는 놈의 정체를 곧바로 깨달았다. 왜냐하면, 그 검은 입자는 오픈 커뮤니티의 23층 정보글에도 언급되어 있었으니까. 저건, 나노슈트다. 형태를 자유자재로 변환시킬 수 있다는 엘리시온의 최상급 의복. 도전자들도 크레딧을 모아 사려고 한다는 말이 있었지. 물론 평범한 나노슈트는 저딴 미친 은신능력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나노슈트는 기본적으로 형태변형이 가능한 옷에 불과하다. 저건 아마도 군용으로 개발된 특수한 나노슈트겠지. 광학미채를 비롯해 다양한 모드와 연동되는 방식의. 아니, 그것만으로는 존재가 사라지는 듯한 그 은신 능력은 설명되지 않는다. 추측해 보자면- “그런 게 있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는데, 나노 로봇……뭐 그런 건가.” -프레임을 비롯한 모든 요소가 나노 기술로 이루어진, 원격 조종 나노 로봇쯤 되는 게 아닐까. 나노입자 하나하나가 미채를 활성화한 상태로 부유하고 있다가, 중요한 순간에만 형태를 형성하는 거다. 아마 내 목에 생채기를 남긴 날붙이의 정체도, 나노 입자를 그러모아 만든 칼날 같은 거였겠지. “광역 공격이 가능한 마법이 있었으면 쉽게 잡았겠는데.” 정체를 알고 나니, 비정상적으로 보였던 난이도가 사실 정상이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노 입자의 칼날은 날카롭지만 방어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고, 습격 시간까지 타이머로 정직하게 알려준다. 입자 형태라 물리공격으로 때리기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범위가 있는 마법 공격이라면 잘 먹힐 테고. 마법사가 포함된 파티가 충분히 경계를 갖추고 대응한다면, 48시간 동안 버티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다. 모르면 당하지만 알면 잡을 수 있는 초견 살해 타입의 암살자, 뭐 그런 느낌이려나. -지지직! 지직! 내 [대전]을 통해 흘러간 전류를 제대로 처맞은 나노로봇은 애매한 형태로 몸을 구성하며 일어나려 했다. 광학미채 기능은 방금 그걸로 망가졌는지, 몸 여기저기가 투명해졌다가 말았다가 하는 상태. 이런 상태로는 이제 상대도 안 된다. 이제 이놈을 대충 48시간 동안 갖고 놀면 되는 건가. -쾅! 비틀거리는 나노봇을 [라이트닝 차지]를 두른 다리로 걷어찼다. 과자처럼 쉽게 부서지는군. 데굴데굴 구르더니 다시 재구성을 시작한 나노로봇을 내려다보던 중, 인기척이 접근했다. 아는 기척이다. 고개를 돌려 보니, 싸움에 휘말렸던 갱단원들 사이에서 ‘렉스’가 튀어나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다른 구역 새끼들이 습격이라도……그건?” 강철 주먹을 꽉 움켜쥐고 싸울 준비를 하고 있던 렉스는, 나노로봇을 보고 인상을 구겼다. “니들이 말한 사신.” 그렇게 소개하자, 렉스의 구겨졌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지며 두 눈이 번뜩였다. 그러고보니까, 이 녀석은 예전 자신의 두목을 사신에게 잃었댔지. 나름의 사연이 있는 것 같던데. 바디슈트를 입은 인간 형태에서 검은 안개처럼 흩어지기 시작하는 나노로봇을 향해, 렉스가 강철팔을 들어 올렸다. 직후 강철팔에서 뭔가 올가미 같은 것이 쏘아지더니, 흩어져가는 나노로봇을 덮쳤다. -파지직! 전기가 흐르는 올가미였나. 속박된 나노로봇은 더 이상 형태를 변환시키지 못하고 버둥거렸다. 뭐야, 엄청 쉽게 제압되네. 은신이나 공격능력과 비교하면 기본 성능은 부족한 건가. “이놈이…그레이 캐슬의 사신이라고……?” 렉스는 복잡한 표정으로 나노로봇을 내려다보았다. 이래저래 할 말이 많아 보인다. 하지만 그 순간, 관자놀이를 찌르는 찌릿한 직감에- 나는 곧바로 렉스를 걷어차며 물러났다. 다음 순간, 돌연 공중에서 출현한 수십 자루의 칼날이 내 팔을 베고 렉스의 전신을 찢어발겼다. -촤자작! 나는 재빨리 마력을 둘러 깊이 베이지는 않았지만, 렉스의 몸뚱이는 순식간에 해체되고 말았다. 고작 한순간에, 홀로그램으로 보여주었던 시체와 똑같은 꼴로 죽고 만 것이다. 렉스의 몸을 찢어발긴 칼날은 입자의 형태로 흩어졌다가 결합하더니, 여러 명의 ‘사신’으로 변했다. “하긴……사신이 하나라는 말은 없었구나.” 나는 아무 망설임 없이, 새롭게 나타난 사신들의 사이로 뛰어들었다. ** 사용하던 도끼를 집어넣고, 인벤토리에서 새 무기를 꺼냈다. 이 놈들의 방어력은 생각 이상으로 형편없다. 그렇다면 위력을 포기하고 넓은 범위의 타격을 고를 뿐. 새로 꺼낸 무기는 21층에서 얻은 [용암석 망치]라는 이름의 두 손 둔기 분류의 무기. 다만 나는 한 손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 무기는 기본적으로 화염 속성 데미지를 입힐 수 있고, 고유 효과로 [용암 폭발]을 발생시키는 효과가 있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정작 위력은 별로라서 쓸 일 없던 무기지만, 이런 상황에는 딱 맞지. -콰앙! 휘두른 망치가 폭발하며 붉은빛의 유사 용암을 주변으로 흩뿌린다. 나노로봇 사신들은 입자 형태로 변하며 투명화했지만, 곧 다시 공중에서 발생하는 폭발에 휩쓸렸다. 용암 폭발에 휩쓸린 입자들이 소산한다. 예상대로 입자 상태에서는 방어력이 더더욱 떨어지는 모양. -츠츠츠……! 더 이상 입자 상태로 움직이면 안 된다고 판단했는지, 공중에서 다시 형태를 갖추는 나노로봇들. 놈들은 입자를 모아 만든 검을 휘둘러 용암을 베고 잘라내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렇게 하면 용암 폭발에 휩쓸려 허무하게 당하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형체를 이루면 나한테 당할 뿐이다. -콱! 절반쯤 인간의 형상을 이룬 나노로봇을 하나 붙잡아, [대전]을 통해 고압전류를 흘려주었다. 이어서 다시금 [용암석 망치]를 휘둘러 폭발을 일으키고, 물러나는 나노로봇들을 하나씩 붙잡아 지져준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입자 칼날의 공격은 아무래도 좋다. 급소가 베이는 것만 피하고 몸으로 받아낸다. 어차피 이 정도 상처는 죄다 [초재생]으로 커버할 수 있다. 놈들은 화력 부족으로 나를 잡을 수 없다. 그렇게 3체의 사신을 쓰러트린 순간, 마력감지에 돌연 강한 인기척 하나가 잡혔다. “?” 고개를 돌려 보니, 똑같은 사신 하나가 나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아니, 이제 보니까 똑같지 않다. 생명반응이 느껴진다. 이 새끼, 안에 사람이 들어 있다. ‘사신’은 무인 로봇이 아니라 원격조종 드론이었던 건가- 그리고 이놈이 조종자? [라이트닝 차지] 나는 덤벼드는 사신의 검을 피해내고, 곧바로 멱살을 잡아 [대전]을 사용해 전격을 흘려 넣었다. 하지만 전격을 맞은 사신은 어째서인지 무력화되지 않고, 되려 그 상태에서 내 가슴팍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작은 목소리. 심장을 꿰뚫는 막대한 힘의 격류. “전격장(電擊掌).” 정신이 아찔해지는 충격이 나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