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불편한 초대 [에픽 : 회색 아이와 마법의 서 - 납치] 설명 : 당신이 잠시 눈을 뗀 사이, 불쌍한 아이가 못된 마법사에게 납치당하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납치범이 남긴 흔적을 통해 범인을 유추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범인의 정체는 대륙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전설적인 마법사, 재버워크였습니다. 당신은 초월적인 경지에 오른 마법사로부터, 아이를 구해내야만 합니다. [퀘스트 목표] 1. 아이를 구조하기(선택). 2. 재버워크를 토벌하기(선택). 적색 마탑주의 심장에 칼레온이 박힌 모습을 보자마자, 직감처럼 떠오른 사실이 퀘스트 창에 새겨졌다. 퀘스트 목표엔 아무런 필수 조건이 없었다. 퀘스트를 수행할지 말지는 전적으로 나의 선택이라는 의미일까. 아니면, 애초에 포기를 전제로 설계된 퀘스트일지도 모른다. “빌어먹을.” 나는 인터페이스를 닫고, 눈앞의 마탑주부터 살폈다. 심장에 검이 깊숙이 박혀 들어갔지만, 숨은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 입술 사이로 숱한 욕설을 뱉어내며, 인벤토리에서 되는대로 포션을 꺼내 들었다. 뭐든 효과가 있기를 바랐다. 그때였다. 마탑주의 심장에 박힌 칼레온에서 불길한 마력이 피어오르더니, 눈앞에 환영이 펼쳐졌다. “아아, 제대로 들리고 있나? 이 마법은 오랜만이라 자신이 없군그래.” 희끗희끗한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노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머리는 백발이었지만, 눈동자만큼은 또렷한 회색빛이었다.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여기서 그 외의 누가 나올 수 있겠는가. 재버워크였다. “이미 상황은 짐작하고 있겠지. 우리 아이가 그동안 신세를 많이 졌네.” “부모 된 입장으로서 더 이상 민폐를 끼치기도 뭐해서, 조금 급하게 아이를 데려가기로 했다네.” “물론 인사도 없이 나타나 아이만 데려가는 건 실례일 테니, 서로 얼굴이나 한번 볼까 하는데.” “아이를 만나고 싶다면, 검에 새긴 좌표로 혼자 오게. 자네를 위한 만찬을 준비해 두고 기다리지.” 환영은 그 일방적인 통보와 함께 툭 끊겼다. 칼레온의 검신엔 룬으로 새겨진 좌표가 또렷이 남아 있었다. 그 목적이 무엇이든, 노골적으로 나를 유인하고 있다. 포션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하, 하하……하하하, 결국, 이렇게 되는 거구나……” 그때, 적색 마탑주가 피를 머금은 입술을 겨우 열었다. “…그거, 집어넣어… 차라리 이게 나아…” [초감각] 스킬이 아니었다면, 들을 수조차 없었을 미세한 목소리. “너, 똑똑히, 기억해, 이건 다 네 탓이야. 그러니까 네가 책임지고… 죽여야 해…” 무슨 의미인지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다. 재버워크를 죽이라는 말인가 했지만, 뒤이어 나온 말이 이상했다. “나는 못했어… 태어난 것에게 죄는 없단 걸 알면서도…나는 그걸 사랑할 수도, 죽일 수도 없었어…” 마탑주의 입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이미 몸도 가누지 못하면서, 마탑주는 기어코 내 멱살을 붙잡았다. “그러니까, 네가 해야 해…책임지고 죽여… 그 남자의 손에 들어간 이상…그게 가장 편한 길일 테니까…” 마탑주의 손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마력감지에 잡히던 생명반응이 뚝 끊어졌다. 적색 마탑주가 숨을 거두었다. 멱살을 잡혔던 옷깃에서 미처 닦아내지 못한 피가 천천히 스며들어 갔다. 혼란스럽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흐름에 머리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재버워크의 목적은 무엇이며, 마탑주의 마음과 생각은 어떠했는지, 당장은 무엇하나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내가 어떤 새끼를 죽여야 하는지. “그래, 딱 기다려라 씨발 새끼야.” 그거면 충분하다. ** 적색 마탑주의 시신을 수습해주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시간은 없었다. 게다가 누가 봐도 내가 그를 죽인 것처럼 보일 상황이었다. 상황이 꼬이기 전에 물러나는 게 상책이겠지. 적색 마탑의 마법사들에게 맡기면 알아서 수습할 테고, 그편이 훨씬 더 깔끔하겠지. 나는 우선 정비를 위해 숙소로 향했다. 에인과 함께 쓰던 방은 뜻밖에 깔끔한 상태였다. 단 하나,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이 있었다면……침대가 깔끔하게 두 동강 나 있다는 사실뿐. [검령 각성] 칼레온에 마법석을 장착해 검령을 소환하고, 에인이 납치되던 때의 상황을 물었다. “기습이었다. 막아내지 못하고 몸이 그대로 절단되었지. 열선을 발사하는 형태의 마법 같았다.” 검령이 아는 건 거기까지였다. 갑작스럽게 텔레포트로 나타난 재버워크가 정확히 한 번의 공격으로 끝냈다는 것. 이 검령이 허무하게 뒈지는 건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지만, 상급 마법석을 써서 소환했는데도 딱 한 방이라니. 재버워크가 격이 다르게 강하다는 건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다. 어차피 지금까지 나온 정보들도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 대마법사의 경지에 도달한 적색 마탑주조차, 그의 틈을 노려 겨우 도망칠 수 있었을 뿐이라 말했으니까. 재버워크에게서 도망치는 것이 전부였던 힘으로도, 마탑주의 자리를 얻는 것은 손쉬웠다고도 말했고. 흐름상 이번 에픽 퀘스트의 보스 격으로 보이는데, 9층에서 상대했던 월드 보스를 기준으로 생각해야 하겠지. 빌어먹을, 그때는 아군이라도 있었지만……이번에는 인질까지 잡힌 상태로 일대일을 하게 생겼다. 놈의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상황은 달라지겠지만, 싸우게 됐을 때의 승산은 얼마나 될까. “다음에 내가 불러내면 바로 칼질할 준비 하고 있어. 그놈이랑 싸우러 갈 테니까.” 나는 그렇게 일러두고 검령을 역소환했다. 그리고 칼레온에 각인된 룬 문자를 손으로 쓸었다. 어떻게 되먹은 마법인지, 접촉하는 것만으로 머릿속에 좌표의 정보가 알아서 흘러들어온다. 정보를 읽어내며 오픈 커뮤니티를 열어, 빠르게 정보를 수배하는 글을 썼다. [긴급)18층 NPC 재버워크 관련 정보 전부 제보받음] 재버워크에 대해 얻을 수 있는 정보를 모두 알려달라고, 이번에도 집단지성의 힘을 빌린다. 제보받은 정보와 검색을 통해 얻은 내용을 있는 대로 머리에 쑤셔 박으며, 빠르게 걸음을 옮긴다. 방문하는 곳은 목적지로 향하는 길에 있는 모든 상점, 잡화건 무기점이건 상관없다. 인벤토리에 넣을 수 있는 판정의 아이템을 구분하지 않고 모조리 산다. 아이템을 흩뿌려 공간을 난잡하게 하는, 7층 결투 때의 전술을 선택지로 마련해 둔다. “부족한데.” 이런저런 준비를 더해도 도통 안심이 되질 않는다. 뭔가 다른 수단이 더 없을까. 번뜩이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미니맵을 펼치고 근처의 마탑을 모조리 체크했다. 청색 마탑에서 지내며 알게 된 건데, 대부분의 마탑에는 다양한 마법 아이템과 설비가 구비되어 있다. 설비를 유지하기 위한 마법석도 대량으로 있고, 전투에 써먹을 만한 아이템도 분명 있을 터. 원래는 평판이나 서브 퀘스트 탓에 이런 일은 꼭 손해로 돌아오기 마련이지만…… 지금은 긴급 상황이니까. 재버워크를 내버려 두면 이 18층 세계 전체가 잘못될 가능성도 있으니, 이건 필요에 의한 징집이다. 가는 길에 있는 모든 마탑의 창고를 깡그리 털어서, 아이템을 챙겨 간다. ** 재버워크가 마탑주 자리를 겸하고 있는 세 마탑을 포함해, 총 여섯 곳의 마탑을 털었다. 그러면서 재버워크에 대한 정보도 꽤 많이 수집했고, 전투에 쓸만한 아이템도 여럿 빌려 오는 데 성공했다. 황색 마탑과 흑색 마탑의 지부에는 마탑의 일 년 치 연구 예산에 상당하는 금화를 주고 하루 동안 대여했고. 남색 마탑, 백색 마탑, 갈색 마탑, 자색 마탑에서는 무력과 공갈을 내세워 반 억지로 갈취해 왔다. 유일하게 재버워크와 무관한 자색 마탑의 마탑주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엉엉 울긴 했는데. 이게 다 쓰레기 같은 환각 마법밖에 못 다루는 약소 마탑 주제에, 무척 과분한 아이템을 가지고 있었던 탓이다. 물론 전투 중에 파괴되지만 않으면 제대로 깨끗하게 쓰고 돌려줄 생각이다. 나는 강도가 아니니까. “후우……” 모든 준비를 마친 후, 재버워크가 지정한 장소에 시간을 맞추어 도착했다. 18층 전역 지도의 왼쪽 끝 부분에 표시된 대륙의 끝자락- 항구에서 배를 타야 도달할 수 있는 망망대해 한복판. 그 곳에는 어마어마한 마력으로 떠받쳐져 낮게 활공하고 있는 섬이 있었다. 터무니없는 장소다. 마법을 통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섬인지, 아니면 마법으로 섬 일부를 잘라서 띄운 것인지.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딴 짓거리를 한 마법사가 얼마나 강할지 생각하면 숨이 절로 막힐 지경이다. -쿵! 항구에서 빌렸던 뗏목을 부수며 힘차게 도약해, 섬 위로 단번에 올라탔다. 섬의 전경은 아주 기상천외했다. 강철로 만들어진 숲이라고 해야 할까. 오롯이 마법 연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는- 미궁 지역보다 더욱 살풍경한 섬이다. 그리고 섬 전체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마력, 나는 또 한 가지 사실을 확신했다. 18층 미궁 지역은 어느 마법사의 연구실이었지만, 사악한 무언가에 영향받아 호문쿨루스의 터가 되었다고 했지. 그 사악한 무언가의 정체는 재버워크가 틀림없다. 왜 에인이 [심연의 파편]에 관심을 뒀는지 알 것 같군. 생물학적 아버지의 마력에 본능적으로 반응한 것이겠지. 불쾌하다. 경계심을 날카롭게 곤두세우며 주변을 살피던 중, 허공에 마법진 하나가 떠올랐다. 마법진은 거대한 성문처럼 천천히 열렸고, 그 안에서 한 남자가 걸어나왔다. “어서 오게나, 기다리고 있었다네. 그대가 ‘진혁악마님’이 틀림없겠……” “맞아.” 나는 곧바로 남자의 머리를 도끼로 쪼개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