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챔피언 철벽 스킬을 발동하고 전력으로 내리꽂은 주먹. 투구를 쓰고 있었어도 절대 버틸 수 없었을 위력의 일격이 하이엘프 기사에게 그대로 꽂혔다. 물론 상대는 7층 보스보다 강력한 엘리트 NPC다. 이 한방으로 쓰러트릴 수는 없다. “끄, 으으윽……” 하지만 턱이 제대로 박살난 하이엘프 기사는 쉽게 일어설 수도 없었다. 하이엘프들은 금방 사태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부상을 입은 기사 녀석을 재빨리 끌고 나갔다. “이, 인간족이, 어떻게 이런, 대체 무슨 사악한 수를 쓴 거냐……!” 끌려나가는 하이엘프 기사는 인지부조화를 일으키며 그렇게 지껄였다. 먼저 칼 들고 덤벼놓고 누구한테 사악하다 뭐다 지껄이는 건지 모르겠네, 어이가 없다. 역시 하이엘프가 커뮤니티에서 좆좆좆좆으로 불리는 건 다 이유가 있다. 뻔뻔해서 원. “페, 페리트……” 한편, 마중을 나왔던 하이엘프 왕자는 사색이 된 얼굴로 기사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부하의 폭주에 놀란 걸까, 아니면 결투 상대인 내가 상상 이상으로 강해서 놀란 걸까. “음, 흠, 잠시 소란이 있었군.”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하이엘프 한 명이 헛기침하며 상황을 정리했다. 방금 그게 잠깐의 소란으로 치부할 수 있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괜히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진 않다. 물론 처음부터 무척 험악한 분위기긴 했지만, 결투 전에 서로 열을 올려서 좋을 건 없으니까. 그렇게 상황을 정리하고 나서는, 지정된 결투 장소를 향해 이동했다. [생명이 순환하는 곳] 하이엘프 마을의 중앙에 도착하자, 맵 이동을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가 표시되었다. 생명이 순환하는 곳이라, 엘프들의 혼을 순환시킨다는 세계수가 있는 장소이기에 붙은 이름이겠지. 그렇다면 저기 있는 앙상한 나무가 세계수인가? 세계수라는 이름답게 크기는 거대하지만, 딱 봐도 힘을 잃고 시들어 가는 듯 보인다. 하지만 외형과는 또 별개로, 굉장히 강대한 마력이 느껴진다. 대체 힘을 잃고 시든 상태에서 이 정도면, 예전에는 대체 얼마나 강력한 마력을 품고 있던 걸까. “흥, 인간족도 세계수의 위용은 알아보는 모양이군. 그러니 자꾸만 우리의 숲을 넘보는 것이겠지.” 세계수를 올려다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자, 길안내를 하던 하이엘프가 혀를 찼다. 느그들 숲을 노리는 건 내가 아니라 왕국군 진영이거든? 인간이라고 다 싸잡아서 똑같이 생각하는게, 현실의 인종차별과 전혀 다를 게 없다. 결투 장소는 리즈멜이 사용하는 연무장의 두 배 정도 크기가 되는 공터였다. 그냥 쌩 공터는 아니고, 나름대로 정비되어 있는데다가 구경을 위한 좌석까지 쫙 깔려 있다. 일이 일이다 보니, 많은 하이엘프들이 결투를 구경하기 위해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그 많은 엘프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왕관을 쓰고 상석에 자리 잡고 있는 무표정한 엘프 남자였다. 먼저 도착해 있던 다크엘프의 여왕과 가까이 앉아 있는 걸 보면, 저게 현재 하이엘프의 왕이겠지. 그나저나, 오래 산 엘프들은 다 저런가. 다크엘프 여왕도 그렇고, 하이엘프 왕도 그렇고, 둘 다 무슨 오래된 고목 같은 인상이다.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딱딱하게 굳은 정물을 보는 느낌. 다른 엘프들과 비교해도 독보적으로 오래 살았을 테니까, 저렇게 초연한 모습인 것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닌데. 그러면 엘레노어도 나중에는 저렇게 되는 걸까. 잘 상상이 안 된다. ** 참관인 자격으로 참여한 엘프는 많이 있지만, 공식적으로 참관인의 역할을 맡은 것은 하이엘프의 왕이다. “준비된 것 같으니 진행하도록 하지.” 결투의 룰은 결투 신청을 받은 쪽이 정할 수 있다. 이번 결투는 내가 건 형식이기 때문에, 그 권리는 왕자 쪽에게 있다. 왕자는 이미 한번 나한테 털린 전적이 있으니, 직접 무력을 부딪치는 방식은 택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정확하게는, 엘레노어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조금 전, 마중을 나왔던 왕자 녀석의 표정은 분노와 적의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대놓고 나를 곤죽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놈이 약혼자를 걸고 결투하자고 신청한 상황이니, 이해는 한다. “결투에서는 무기와 마법 사용이 모두 허용되며, 한쪽이 패배를 선언하거나 전투 불능 상태가 될 경우에만 종료된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하이엘프의 왕이 선언한 결투의 규칙은 단순한 일대일 승부였다. 하지만, 당장 내 눈앞에 서 있는 왕자의 표정에는 일말의 투지도 없었다. “제기랄, 제기랄……!” 투지는 커녕, 초조한 표정으로 손톱을 딱딱 갉아대고 있다. 이유는 대충 알 것 같다. 베리트인가 뭔가 하는 기사 녀석이 나한테 턱주가리가 아작나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겠지. 이 녀석이 상정하고 있던 내 전투력은 몇 주 전의 그것일 거다. 순수한 검술 실력은 형편없고, 다양한 무기를 이용한 변칙적인 전투법으로 베리트를 몰아붙이던 나. 결투자의 권리 행사로 핸디캡을 신청해, 무기 사용에 제한을 걸면 어떻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겠지. 아니면 하이엘프의 보물이나 뭐 그런 좋은 아이템을 두르고 싸우려고 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나는 그 몇 주 사이에 이전과는 어마어마한 실력 향상을 이루었고. 이 녀석도 그걸 눈치챈 거다. 어떤 핸디캡을 내걸고 싸워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신성한 대지와 세계수의 은혜가 옳은 자의 편을 들 것이다, 두 결투자는 명예를 걸고-” 그렇게, 하이엘프의 왕이 결투 시작을 선언하려 한 순간. “나, 나!” 눈을 질끈 감은 왕자가 번쩍 손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나 엘뤼온 프락시누스는, 결투자의 정당한 권리로서 나의 챔피언을 지목하겠다!” 왕자는 대뜸 결투를 대신해 줄 대전사, 챔피언의 지목을 선언했다. ** 엘프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번져나갔다. 역시 예정에 없던 일인 것 같다. 챔피언은 결투를 치를 능력이 없거나, 너무 고귀한 신분을 가진 자가 결투를 치를 때에 부를 수 있는 대행자. 하이엘프의 왕자이면서 걸려온 결투를 받은 입장인 이놈에게는 분명 챔피언을 부를 권리가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나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는 하나. “세상에, 저런 겁쟁이를 봤나……” 존나 한심해 보이니까. “저런 녀석이 내 약혼자라니, 한숨이 나오는구나.” 관중석에 있던 엘레노어가 푹푹 한숨을 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약혼자를 걸고 하는 결투에서 바짝 쫄아 챔피언을 부르다니, 이렇게 한심한 경우가 어디 있겠나. 구경하러 온 하이엘프들도 이건 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다들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표정이 안 좋은 것은 역시 왕자 본인이었다. 이게 창피한 짓인 줄은 아는 모양이다. “나의 뜻을 대행할 챔피언은 프락시누스 기사단의 고결한 제1기사 메르세데스다!” 창피와 수치로 얼굴이 새빨개진 왕자는 결국 챔피언의 이름을 불렀다. 나도 이런 허접한 놈이 아니라, 제대로 된 상대와 붙어볼 수 있다면 환영이다. 문제는 이게 왕자의 돌발 행동이라는 점이다. 메르세데스라는 놈이 이 자리에 있는지도 의문이고, 이걸 받아줄지도 의문인데. -저벅, 저벅. 좌석에 있던 흰 정복 차림의 하이엘프 한 명이 걸어나오며, 그런 걱정은 깨끗이 날아가 버렸다. 그 대신, 새로운 걱정이 내 안에서 샘솟기 시작했다. 일그러진 표정의 왕자가 물러나고 정복 차림의 엘프가 검을 뽑아 내 앞에 섰다. 역시 대뜸 챔피언이 될 줄은 몰랐던 건지, 전투에 적합한 차림이 아니다. 굉장히 불편해 보이는 차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전하의 뜻대로.” 왕자의 챔피언으로 나선 메르세데스라는 기사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콘솔의 색깔 때문에. 압도적인 레벨 차이를 의미하는 새까만 콘솔. 7층의 수많은 엘리트 NPC 중에서도 독보적인 스펙을 가진 규격 외의 최강자. “엘뤼온 전하께 해를 입히고도 그냥 돌아갈 수 있었던 행운을, 너 스스로 걷어찬 꼴이 되었구나.” 일전에 만났던 하이엘프 여기사가 내 앞에 섰다. ** 이 빌어먹을 시련의 탑이 나를 향한 악의를 내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층에서 대뜸 속성 공격을 하는 필드보스가 튀어나온다거나. 3층에서는 전사에게 치명적인 전기 배리어를 쓰는 리자드맨이 나온다거나. 7층에 올라오고 나서는 초입부터 보스보다 강력한 엘리트 NPC의 습격을 받는다거나.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탑을 혼자서 기어 올라가고 있는 상황이니, 대부분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이번에도 그렇다. 내가 일반적이지 않은 루트를 타고 있는 탓이라고 한다면 딱히 할 말이 없다. 초반의 강제 패배 이벤트를 억지로 깨버리고, 엘레노어와의 호감도를 기반으로 에픽 퀘스트를 받은 상태니까. “하 시발, 저 새끼는 쪽팔리지도 않나.” “전하께선 현명한 선택을 하신 거다.” 불평을 담아 중얼거리자, 인상을 구기며 바로 반박해온다. 챔피언이 되어준 것도 그렇고, 충성심이 굉장하다. 못 이길 적을 상대하기 위해 최강의 아군을 부른 셈이니까, 딱히 틀린 말도 아니고.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까지 욕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결투를 포기할 생각은 없어 보이는군.” -스릉. “당연하지, 난 누구처럼 쫄보가 아니라서.” 심장이 쿵쾅거리며 짜릿한 긴장감이 전신에 감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다. 나는 내가 정확히 어느 정도로 강한 건지, 다른 도전자들과 비교해서 얼마나 강한 건지, 그게 궁금했었다. 직접 맞붙어 본 랭커가 하필이면 찌르기밖에 못하는 등신이었던 탓에, 객관적인 비교가 힘들었으니까. 하지만 이 여기사는 짐작하기에 최길현보다 스펙도 높고, 실력도 월등하다. 즉, 이 녀석을 꺾는다면 나는 25층의 저층 랭커들 이상으로 강하다는 것이 확실시되는 셈이다. “그 발언, 철회하려면 지금뿐이다만- 그럴 생각도 역시 없어 보이는구나.” 아무리 정당한 권리 행사라고 해도, 갑작스러운 결투 상대의 변경에는 당연히 합의가 필요하다. 당장 엘레노어도 저기서 뭐라뭐라 항의를 하는 듯 보였으니까. “너, 다음에 만나면 귀 뜯어버린다고 했었지?” 하지만 나와 메르세데스는 어떠한 절차도 필요 없이, 서로를 쓰러트릴 것을 합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