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왜 여기에 계세요.” 집앞에 건전조신이 쓰러져 있었다. 처음 든 생각은 짤보다 실물이 낫다는 것. 두 번째는 어떻게 여기 있냐는 것이었다. 호감고닉 건전조신은 서큐버스였고, 인간과 엘프의 도시 중 어느 곳에도 살지 않았다. 실제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하아, 하으으...” “어, 아니 이상한 소리는 멈춰다오.” 태생이 서큐버스임을 과시하는 건가? 숨소리가 심상치 않다. 이마에 손을 대어보니, 불덩이처럼 뜨거운 고열이 전신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죽겠는데?”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는 고민 끝에 건조기를 들어서. 벙커 안으로 들였다. “뭐, 괜찮겠지?” 이로서 타인이 들어온 건 두 번째였다. 이게 맞나 싶긴 했지만, 애초에 내 안전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게 건조기였으니. 그녀의 뿔이 아니었더라면 진작 난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받은 게 있다면, 적어도 사람이라면 그만큼은 보답해야 하지 않을까? “흐으...” “아까보단 상태가 나은 것 같은데.” 숨소리마저 야한 이 살아있는 ㅇㅎ), 후방주의 태그를 들고 일단 급한대로 침대에 두었다. 아까보다 상태는 나아 보였다. 하지만 지금도 심각한 건 마찬가지. 혹시 몰라 물수건을 올려보자... -치이익... “오우 쉣.” 물수건에서 타는 소리가 났다. 특히 얼굴 부근이 심하게 화끈거렸다. 반대로 손끝와 발끝은 비교적 덜 뜨겁고 흐릿하게 보였으니. “서큐버스 건강 상태는 잘 모르는데.” 애초에 서큐버스 자체가 희귀종이었다. 그 다크엘프, 토끼 수인들조차 서큐버스에 비하면 다수일 정도니 말 다했지. 압도적으로 정보가 부족하다. 기껏해야 내가 아는 거라곤 주식이 욕망이라는 것 정도. 나는 확인차 건조기의 글 목록을 들어갔다. [‘건전조신’의 최근 글 목록.] 하루 전) 몸이, 몸이 안 식어요...jpg [764] 3일 전) 배고파 미치겠어 ㅠㅅㅠ.jpg [561] 7일 전) 왜 배가 고플까...? ㅠㅠ?...jpg [402] “와우.” 최신글들 전부가 개념글이었다. “아니, 좀 질투나는데?” 나도 어그로 끌어야 념글가는데. 그야말로 압도적인 관심도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의문이 들었다. “장터에 술 팔고 난 뒤로 배고픔은 해결된 거 아니었나?” 그 이후로 건조기는 더는 야짤을 올리지 않기도 했었다. 그런데 최근으로 올수록 그 빈도와 노출도가 점점 심해졌으니. 대부분 배가 고프다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흠, 식사 해결에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내 추측이 맞다면. 그녀는 더 이상 사람들의 욕망으로 배를 채울 수 없게 된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미 주워 온 이상, 죽게 내버려둘 순 없었다. “건조기 못 잃어.” 무엇보다 그녀만큼 갤러리에 공헌도가 높은 갤럼도 잘 없기도 하고. 건조기를 앞에 두고 고민하던 그때였다. “헉.” 등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오물오물 먹던 빵을 떨어뜨린 페니가 보였다. 세상 동그랗게 뜬 토끼눈이 인상적이다. “말파이트, 그 여잔 누구야?” 그러더니 페니는 처음으로 꽤 높은 목소리로 내게 따지듯 물었다. “갤러리 호감고닉, 건조기인데.” “왜 여기 있는 거야?” “밖에서 주워왔어.” “근데 이거 서큐버스잖아. 아무거나 들고 막 들어오면 안 돼. 위험해.” 이거, 아무거나. 근데 따지고보면 페니도 주워오긴 했다. 하지만 말할 타이밍은 아닌 것 같아 삼가자, 페니가 날 올려다보며 물었다. “다치진 않았어?” “난 멀쩡하긴 한데, 건조기 상태가 안 좋네.” “휴우, 안 다쳤으면 다행이야. 그거 다시 밖에 두고 오자. 지지야.” 페니는 다가와 내 옷깃을 당기며 말했다. 그나저나 페니가 저렇게 자기 의사표현을 확실하게 하는 건 또 처음이었다. 뭘 줘도, 뭘 해도 다 좋다고 하더니만, 의외로 호불호가 확실하구나. 그때였다. “말파이트, 뒤에!” 페니가 돌연 화들짝 놀라더니, 내 뒤를 가리키며 급하게 소리쳤다. “보통 그 말 듣고 뒤돌면 늦던데.” 나는 일단 페니가 가리킨 대로 뒤를 돌았고. “어, 어억?” 순간 시야가 붕 떴다. 무슨 일인가 싶어 정신을 차렸을 땐, 코앞에 건조기가 보였다. “하아아, 주딱님... 드디어...” 그것도 굉장히 달뜬 표정으로. 나를 벽에 몰아세운 채, 파르르 속눈썹을 떠는 게 보였으니. “헉, 좋다.” “말파이트!” 인생 최대의 위기가 닥쳤다. * 인생 최대 위기란 뭘까. 물론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트럭에 치이기 직전일 수 있고. 혹자는 총알이 귓가를 스칠 때. 어쩌면 인생의 황금기 때, 등 뒤에 자신을 노리는 세 번의 총성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죄송해요, 못 참겠어요.” 하지만 나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ㅇㅎ), 야짤을 기습적으로 갤러리에 올리곤 부끄러워 도망치던 흑발에 우유빛 피부의 처녀 서큐버스가 달뜬 얼굴로 날 벽에 몰아세운 지금이라 할 수 있다. “이익, 떨어져...!” 하지만 내겐 페니라는 카드가 있었다. 페니가 누군가? 무려 균열을 스스로 찢어버리고 나올 정도의 대악마였다. 그리고 페니는 이 광경을 목격하는 그 즉시...! “이익, 이이익... 왜 꿈쩍도 않는 거야!” 건조기의 옷을 잡고 당겼다. 놀랍게도 그게 전부였다. 중학생 정도 되어보이는 몸으로 안간힘을 써 봐야, 서큐버스가 밀릴 리가 없었다. “으응... 꼬맹이는 저리 가.” “악!” 다행히도 건조기는 페니를 힐끔 보더니, 방 밖으로 내보내고 문을 잠글 뿐이었다. “이씨! 문 열어!” 그 행동으로 페니가 더 화가 난 것 같지만. “이젠 우리 둘 뿐이네요...” “헉.” 건조기가 겉옷을 바닥에 흘리듯 벗었다. 자연스레 야짤에서만 봤던 숭한 속옷인지, 란제리인지만 남았다. “크으윽...” 그 순간 머릿속이 안개가 낀 것처럼 굳어지고, 숨이 가파졌다. 심장박동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기 시작했으니... 이게 서큐버스에게 매료된다는 그런 느낌인건가? 하지만 그뿐이었다. -철컥 “그만.” 나는 머지않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때 재빨리 옆에 거치되어 있던 산탄총을 꺼내어 건조기에게 겨눴다. 그에 순간 건조기가 움찔했으니. “왜 안 통하지...” 당황하던 건조기가 우물거리는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산탄총을 모를 리가 없겠지. ‘흔한 주딱의 대마법...jpg’같은 이름으로 움짤로 갤러리에 돌아다니지 않던가? 대신에 건조기는 다른 방법을 썼다. “...하지 말아줘요.” 가는 목소리로 나를 올려다보며, 조금씩 조금씩 내게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쏠 수 있어!” 이에 나는 장전까지 하고 위협했다. 하지만 건조기는 내 눈치만 살살 볼 뿐, 조금씩 조금씩 내게 다가왔으니. 나는 결국 쏘지 못했다. “주딱님 고마워요.”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를 듣고 깨달았다. 이게 내 마지막 순간일거란 걸. 나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유언을 남겼다. “아 념글 정독 다 못했는데.” 그래도 서큐버스 복상사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화로운 사망이 아닐까? 그리고 곧 숨결이 닿을 정도로 서로가 가까워진 그 순간이었다! -덥썩 “?” 눈을 감은 내게 느껴진 건, 고통에 가까운 폭력적인 쾌락이 아니었다. 대신 따뜻한 온기가 손에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도 별다른 변화가 없어 눈을 힐끔 뜨고서야 보고 말았다. “하, 아으으.”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내 손을 꼬옥 맞잡고 있는 건전조신의 모습을. “너무 좋아...”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파들파들 떨더니 그대로 침대로 쓰러져버렸으니.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채 덩그러니 남은 나는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다. “아니, 뭔.” 건전 조신은 세상에서 제일 야한 모습으로, 손만 맞잡더니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 정신이 한계까지 다다랐다. 이젠 그녀 스스로조차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정상적 사고가 안될 정도였다. 다만 확실하게 기억하는 건. “...따뜻해.” 몹시도 따스한 온기가 그녀에게 전해졌다는 것. 평생을 굶다가 고기를 맛 본 것만 같았으니. 그건 하나의 색감이 아니었다. 무지개처럼 다양한... 혹은 따뜻한 호수 아래 부유하는 황홀한 감각이었다. “깨어났구나.” “힉!” 그때 귓가에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이불을 끌어당겨 고개를 돌려보니, 원형 의자에 앉은 남자가 보였다.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추악하던가? 하지만 그를 처음 보는 순간, 릴리안은 두려움보다 신기함을 느꼈다. “아...” 온통 새하얀 피부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마치 햇빛이라곤 보지 않고, 동시에 잘 먹고 관리한 것처럼 맑고 고았다. 정작 눈매는 짙어 피로해 보였는데, 체구가 작지도 않았다. 그래서 릴리안은 저도 모르게 멍하니 물었다. “혹시... 인간, 맞으세요?” 인간인데 해를 안 볼 수가 없다. 만일 안 봤다면 자연스레 먹을 것이 없을 텐데, 키가 크고 피부가 맑을 수가 없다. 또 그러면 잘 먹었다는 건데, 눈매는 또 왜 저리도 뱀파이어처럼 짙은지. “설마... 주딱님?” 그에 대한 해답은 하나였다. 주딱, 이 명칭 하나만으로 설명이 된다. 그리고 그 기묘한 남자는 도리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기억이 안 나는 건가?” “기억이라면... 네, 아무것도...” 단지 따스하고, 포근한 기억 뿐. 그러자 남자는 세상 충격받은 표정을 지으며,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얼굴을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아니, 실제로 말했다. “네, 네에?” “건조기 네가 강제로 내 살을 더듬고 붙잡고, 뜨거운 숨을 섞었잖아.” “?!” 날조없는 날조에 릴리안이 사실을 깨닫는데까진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보단 자신을 부르는 저 이상한 호칭을 분명 들었으니. 분명한 건전조신이란 닉네임을 가진 자신을 건조기로 만든 이는 한 명 뿐이었다. “주딱이세요...?” “맞아.” “세상에.” 주딱을 직접 눈앞에 보게 되니 기분이 묘했다. 뭐랄까, 분명 존재하지만 어떻게 생겼을지는 가늠도 안되는 그런 존재였는데. “평범한 인간이시네요?” 물론 그의 외형이나 향, 하는 짓은 평범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형체로는 존재하지 않는 갤러리만의 무언가라고 은연중에 생각했었다. “물론, 애초에 인증 짤도 올리지 않았나?” “...거짓말인 줄 알았어요.” “아니, 왜?” “허공에서 물건을 창조해 내면서, 인간이라고 주장해봐야 믿는 사람 아무도 없을 걸요...?” 릴리안이 작게 소신발언을 하자, 그는 충격을 받은 듯 굳어버렸다. 애초에 그걸 곧이곧대로 믿는 게 이상했다. 그때 릴리안은 몸을 작게 웅크렸다. “으으...” 어쩌다 이곳까지 오게 된 걸까. 어느새부턴가 야짤을 올려도, 남들의 관심과 욕망을 먹어도 배가 차지 않았다. 도무지 해결 방법을 찾지 못하던 중, 달콤한 향에 이끌려 여기까지 오게 된 것. ‘하지만 여기라고 다를 건...’ 릴리안의 표정이 빠르게 식어갔다. 동족을 보지 못한지도 오랜 세월이 지났다. 물어볼 동족도 없었다. 그녀는 우울감에 잠긴 표정으로 침대 속에 숨던 중 깨달았다. “...배가 안 고파?” 허기가 더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라 침대 밖으로 일어났다. “헉.” 방금 전 그 모습 그대로라 주딱은 헛숨을 들이켰으나, 이를 신경쓸 때가 아니었다. “몸이 멀쩡해...!” 손끝도 발끝도 더는 투명하지 않았다. 아니, 그걸 넘어서 몸에 넘치는 마력이 느껴졌으니. “으아아...” 기쁜 나머지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다 깨달았다. 옆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주딱, 그가 자신의 변화를 이끌어낸 열쇠라는 걸. 그걸 깨달은 순간 릴리안은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으니. “알아버렸어요.” 자신의 새로운 주식이 되어줄 존재. 그건 주딱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