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일은 나로서는 꽤 억울했다. “당연히 나 한정일 줄 알았지.” 왜 접촉한 대상의 종족 전체에 대한 감정이 담기는 걸 보낸 걸까? 결국 닉스에게 인간 역사 전체를 표현한 무언가가 전해졌다. 닉스는 그대로 무거운 괴성과 함께, 아예 쏙 숨어버렸으니. 주딱*: 님아 보고 있음? 용용죽겠지: 골치아프게 됐구나 나는 곧바로 용용이에게 헬프콜을 쳤다. 용들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용용이라면 빠르게 오해를 풀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닉스’님을 초대하셨습니다!] 용용죽겠지: 닉스 듣고 있는 거 안다 용용죽겠지: 나는 펠리시다. 우리는 이미 서로를 알고 있지 용용죽겠지: 네가 무엇을 봤는지는 알고 있다. 하지만 오해가 있으니 풀어야 하지 않겠느냐? 이미 둘은 아는 사이인 걸까. 용용이는 차분히 닉스에게 말을 걸었다. 닉스: ... 그리고 다행히 닉스 또한 대화할 마음이 있어 보였다. “오...” 생각보다 오해가 빨리 풀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즘이었다. 닉스: 거짓말 용용죽겠지: 그래 내가... 뭐? 닉스: 정녕 내가 봤던 걸 그녀도 봤다면, 그렇게 반응할 리가 없다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닉스는 잔뜩 털을 세운 고양이처럼, 사근사근 다가오는 용용이를 쳐냈다. 닉스: 나는 그곳에서 끝없는 악의와 힘을 목격했다 닉스: 분명 그녀를 흉내 내는 그 존재의 힘이 분명하겠지 닉스: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고 그리고 조금 과하게 오해중이었다. 나를 외부에서 온 악신 정도로 상상하는 걸까? 펠리시는 진작 내게 당했을거라 단정짓고는, 마음의 벽을 단단히 쳤다. 닉스: 그녀를 모욕하지 말아라 가짜여 용용죽겠지: 아니, 난 살아있다! 닉스: 가짜여 용용죽겠지: 진짜 혼난다? 닉스: ㄱㅉㅇ 결국 용용이도 설득에 실패했다. 방을 홱 나가버리는 닉스를 두고, 잠깐의 공백 끝에 용용이가 말했다. 용용죽겠지: 음, 버리자꾸나 주딱*: 왓? 용용죽겠지: 답답하긴 하지만, 설득할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지가 않는구나 용용이의 결론은 빨랐다. 내버려두자. 그렇게 일 년, 십 년, 끝에 몇 세기가 지나다보면 저절로 풀릴거라고. 그 긴 기간동안에도 내가 아무짓도 안 하면 스스로 깨닫게 될 거라며. 말 그대로 시간에 맡겨두자는 말이었다. “아니 난 인간인데.” 하지만 내겐 다른 문제였다. 가능하다면 직접 설득하는 게 좋겠지만, 용용이가 저렇게 말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용용죽겠지: 솔직히 조금은 이해가 가는 구나 용용이는 숨어버린 닉스를 답답해하는 한 편, 어느 정도는 공감하고 있었다. 용용죽겠지: 나도 저 흑룡 입장이었다면, 쉽게 그대를 받아들이지 못했을 거야 용용죽겠지: 그대에게서 뭘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결국 용용이의 도움도 실패했다. 내가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닉스’를 다시 초대하셨습니다!] 닉스를 다시 방에 초대했다. 다행히도 닉스는 곧바로 나가진 않았다. 하지만 그게 내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는 게 아닌, 눈치를 보는 거라 문제였지만. 주딱*: 아니 님아 주딱*: 뭘 봤는지는 짐작하겠는데, 난 그런 짓 한 적 없음 강도와 살인은 약과였다. 세계 대전에 학살, 인체 실험 기타 등등. 당장 인터넷 음지에 올라온 무검열버전 사진들만 봐도 평범한 사람이면 못 버틴다. 인간이 쌓아올린 역사는 언제나 피로 눅눅하게 젖어 있었다. 모르는 건 아니지만, 나는 그런 적 없는데? 주딱*: 애초에 나 20대인데? 닉스: ... 밥잠갤. 평생 이것만 하며 살아왔다. 누군가를 돕진 않아도, 피해를 주진 않았다. 오해를 풀기 위해 사실대로 말했지만, 당연히 믿지 않았다. 닉스: 당신이 무엇을 하든,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닉스: 그러니까 제발 제게서 관심을 꺼주세요. 저는 그저 살고 싶을 뿐입니다 주딱*: 아니, 아오 닉스: 그리고, 정말 당신의 말씀이 맞다고 해도... 닉스는 잠깐 머뭇거리다 용기를 낸 것처럼 뒤늦게서야 채팅을 보냈다. 닉스: 그럼 다른 존재들은 어디에 있죠? 다른 존재, 즉 지구인이었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주딱*: 나 혼자 여기 빙의됐음 ㅇㅇ “딱히 숨길 것도 아니고.” 항상 갤러리에 인간이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말해도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무엇보다 닉스는 나를 외신이라 단단히 믿고 있었다. 그리고 이 세계에 나 혼자만 지구인이었고. 빙의보다는, 자의로 넘어왔다고 믿는 편이 더 사실적이었다. “지금 내가 다 죽이고 세계 지배하러 넘어온 악신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고. 닉스: 그 속에서 유일하게 남은 당신이, 온전하리라 믿지 않습니다 닉스: 어떻게 혼자 남으셨는지도 궁금해하지 않겠습니다 그 설마는 사실이었다. 닉스는 애초에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단지 내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바짝 엎드린 저자세로 다시 말했다. 닉스: 저는 정말 당신을 방해할 생각이 없습니다 닉스: 원하신다면 영원히 협곡 아래에 죽은 듯이 지내겠습니다 닉스: 제발 돌아가주세요 “흠...” 말로는 설득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용용이 말처럼 무시하고 시간에 맡기는 것도 문제였다. “애초에 나 때문에 저렇게 된 거라며?” 핵을 열람해서 영향을 받은 존재 중 하나였다. 나 때문에 악몽 꾸고 덜덜 떠는데, 그 생활을 수 천 년 동안 시키기에는 좀... “어떻게 마음 돌릴 거 없나?” 인간의 악의에 놀랐다면, 반대로 긍정적인 측면을 보여주면 될 텐데. 더불어 닉스가 용이라는 것까지 더해 마음을 돌릴 게 없나 뒤져볼 즘이었다. “오?” 그때 내 손에 사진 하나가 잡혔다. 갤러리 상점에서 추억팔이 용으로 몇 개 구매한 거였는데. “어쩌면 이거면 되겠는데?” 나는 사진을 추가로 몇 개 더 선별한 뒤, 닉스에게 배송해봤다. * 협곡 밑바닥. 거대한 흑룡이 구석에 웅크린 채, 잘게 떨고 있었다. [어쩌면 정말 우호적인 존재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는데...] 확인을 위해 검은 구체를 보냈고. 주딱은 거리낌 없이 접촉 후 돌려주었다. 그래서 기대하고 있었는데, 순진했다. 그 속에는 오직 심연뿐이었다. [으으...] 끝없는 살생의 감정. 그 이유도, 감정도 다양했다. 순수한 재미를 위해, 자신의 이득을 위해, 어떻게든 죽여버리고 싶어서 등등. 살생의 순간이 실루엣처럼 닉스의 기억 속에 스며들었고. 그건 악마도 감탄할 만한 창의적이고 더러운 방법들로 가득했다. [그런 존재가 이곳으로 왔다...] 즉, 그 세계엔 더는 죽일 것이 없다. 더는 즐길거리가 없다. 그런 세상에서 유일하게 남아 이곳으로 넘어온 존재는. 놀랍게도 땅 위에 숨쉬는 거의 모든 존재로부터 호의를 받고 있었다. 그것도 진심으로. [모두가 속고 있는 거야.] 초월적인 존재의 변덕일 뿐이다. 목마른 개미에게 물 한 방울 떨어뜨려주는 그 정도의 변덕. [도망쳐야 해.] 닉스는 숨고 싶었다. 하지만 도망칠 곳이 없다. 이 협곡조차도 그 폭발에선 안전하지 못하니. 닉스는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즘이었다. “아뉜뎅.” [...?] “주딱 완전 착해영. 아무래도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당.” 흑룡의 어두운 품 속에서, 세계수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순수함과 진심으로 가득 찬 눈동자. 닉스는 그 시선을 외면하며 고개를 돌렸다. [믿지 않는다.] 세계수도 속은 것이었다. 아니면 암시에 걸려 착각하고 있거나. [왜 그런 존재가 그대를 아끼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다행이었다. 덕분에 시간은 벌었으니까. 이대로 자신에게 관심을 꺼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바보 멍충이.” 세계수의 말을 무시한 채, 무의미한 시간을 떼울 즘이었다. [주딱*님께서 물품을 배송하셨습니다!] - 번쩍! 순간 허공에서 무언가 나타났다. [...!] 닉스는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밑바닥에서도 최대한 구석에 숨었는데. 단번에 그리고 이렇게 간단히 무언가를 만들어내다니. [아, 아직 날 포기하지 않으신 건가?] 닉스는 속으로 절망했다. 어쩌면 당연했다. 모두가 속아 찬양을 마다하는데, 의심하고 꺼려하는 존재가 있다면 흥미가 갈 뿐. 수많은 개미중에 독특한 개미를 발견한 정도의 흥미를 가진 거겠지. [침착해라. 침착해.] 닉스는 눈앞에 툭 떨어지는, 발톱보다도 자그마한 나무 상자에 어쩔 줄 몰라했다. “뭐 하세영?” 세계수는 닉스를 빤히 바라보다, 뚜방뚜방 택배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으니. [위험해, 다가가지 마라!] 닉스는 뒤늦게 세계수를 발견했다. 그리고 재빠르게 세계수를 낚아챘으나. - 덜컥 이미 상자는 열렸다. [안 돼!] 닉스는 반사적으로 날개로 몸을 가리고 웅크렸다. 그렇게 일 초. 이 초... 시간이 흘러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 물끄럼 고개를 든 닉스의 앞에는, 쭈그려 앉아 눈을 빛내는 세계수가 보였다. “우와아.” [...?] “완전완전 이쁩니당.” 세계수의 손에 들린 건, 종이였다. 하지만 닉스의 기억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특별한 재질의 종이였으니. [뭘 보고 있는 거지?] 도무지 그게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조심스레 물어보자, 세계수가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종이를 보여줬다. “우주!” [우...주?] 닉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주라면 저 드높은 하늘 너머, 세상의 끝을 말하는 거 아닌가? 우주는 용들도 가본 적 없다. [아니, 하나가 있었지.] 옛날, 고룡 한 마리가 우주를 보겠다고 날아간 적이 있었다. 머지않아 다시 추락했지만. 차갑게 얼어가는 고룡은 만족한 표정으로 미소로 숨을 거두었다. 그것이 자극이 되었다. 지식을 추구하는 용들답게, 하늘로 날아올랐지만 다 실패했다. [나도 그랬고.] 단지 서서히 새까맣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보며 아쉬움을 달래며 돌아올 뿐. [그래서 우주는 언제나 우리의 꿈이었는데.] 왜 종이를 보며 우주를 말하는 거지? 고개를 슬그머니 내민 순간이었다. [...!] 닉스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발가락부터 머리까지, 세포 하나하나가 충격에 멈춰버린 듯했으니. 숨이 가빠지고 동공이 확장된다. 닉스는 생각하는 것도 잊어버린 채, 그 광경에 온전히 홀려버렸다. [우주.] 모든 용들의 꿈. 고작 종이 안에 우주가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