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춘 듯 일말의 움직임조차 없이 굳어버린 해일. 가져다 댄 손을 천천히 내리자 해일이 서서히 스러지기 시작한다. 스아아아아──────── 윗부분부터 흩어져가는 그 막대한 양의 바닷물은 주변을 뿌옇게 물들였고, 이내 해일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을 즈음에는 하늘이 잿빛으로 물들었다. 투둑- 먹구름이 비를 토해낸다. 쏴아아-, 쏟아지는 빗줄기 아래 선 서준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낱 인간이 이루어낼 수 있는 이적은 어디까지인가.’ 인간으로 태어난 검신은 태양을 베었고, 자신은 해일을 일으켜 그것을 비로서 내리게 했다. 짧은 사색을 끝내고 바다 위에 내려서자 멍하니 서준을 바라보던 춘봉이 말랑한 볼을 긁적였다. “…미치겠네 진짜.” 초절정에 오르며 어느 정도는 따라잡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턱도 없는 착각이었다. 세상 그 어느 초절정이 저딴 짓을 태연히 벌인단 말인가? 화마경에 올랐으나 화경에는 오르지 못했다 했던가? 춘봉이 보기에는 헛소리였다. 경지만 화경이 아닐 뿐, 오빠는 이미 아득히 높은 곳에 오른 것이 분명했다. “거참.” 이내 춘봉은 그 무지막지한 해일 속에서도 약간의 변화조차 없는, 할아버지가 남긴 검흔을 보았다. ‘나도 언젠가….’ 부끄럼 없이 오빠의 옆에 설 수 있는 무인이 되리라. 꾹 다문 입 속의 혀를 달싹이며 다짐했다. “저기…. 얘들아?” 남궁수아의 목소리에 춘봉이 퍼뜩 고개를 돌렸다. “응?” 남궁수아는 대답 대신 말없이 해안을 가리켰다. 사람들이 우글우글 모여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헉.” 뭔가 상당히 쪽팔린다. 춘봉이 후다닥 달려가 서준의 등짝을 챱챱 후려쳤다. “야야! 빨리 가자!” “그럴까?” 서준이 픽 웃으며 춘봉과 남궁수아의 허리를 붙잡았다. “그러면 다른 데로 가서 천천히 바다 구경이나 하자.” 기왕 바다에 온 거, 경치 좋은 데서 일몰은 보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두 사람과 함께이기까지 하니 더할 나위가 없다. * “놈의 신원을 파악했습니다.” 총군사 제갈통이 보고를 들었다. “대흑산파의 전대 고수, 려원입니다.” “흐음….” 제갈통은 탁상 위의 지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도무지 사마현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었다. ‘화경의 무인을 선두에 세워 동쪽부터 서쪽을 가로지른다…. 서쪽을 흔들 생각인가?’ 절강성에서 사흑련의 초절정 셋이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보고는 이미 들은 바가 있다. 뿐만 아니라 중원 곳곳에서 사흑련의 초절정 무인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모양이다. ‘정신이 나간 건가?’ 만약 이쪽이 그 고수들을 모조리 잡아낸다면 사흑련 입장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된다. 제갈통은 사마현이라는 사람을 어느 정도 알았다. 결코 아무런 의미 없이 전력을 내던지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지금의 혼란은 무언가를 가리기 위한 미끼라는 것인데…. 현재 정파 무림에는 놈이 노릴 만한 무언가가 없었다. “다른 화경들의 움직임은 파악된 것이 없습니까?” “예. 현재까지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중원 서쪽을 되찾기 위함이라고? 제갈통이 미간을 찌푸렸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려원이라는 화경의 고수가 휘하의 무인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는 중이다. 거기에 휘말린 무인들 중 주요 인물은 여섯. 화산의 청료 아미의 보중 무당의 허백과 허량 팽가의 팽주현 남궁의 남궁연 십육명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들이지만, 사실 그들을 잃은 것으로 큰 손해를 보지는 않는다. 남궁연이 남궁세가주의 친동생이라는 사실이 조금 걸리긴 하나, 그렇다 한들 큰 문제는 없을 터. 십육명문의 가주는 그 발걸음이 가볍지 않다. 아니, 설령 남궁진천이 직접 나선다 한들 사흑련 입장에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 ‘남궁진천을 노린다?’ 헛소리. 불가능하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제천혁을 필두로 화경의 무인이 서넛쯤은 필요할 텐데, 지금 상황에서 그만한 전력을 뒤로 뺀다면 자칫 칠사흑문 중 여럿이 날아가버리는 수가 있다. ‘만약 어떻게든 판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너무 큰 도박이다.’ 그러다 화경의 무인 둘, 혹은 셋을 잃는다면? 천하제일인을 잡아냈다는 상징성 외에는 손해밖에 없다. 하나와 셋. 둘 중 무엇이 더 큰 수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설령 그 하나가 천하제일인이라 한들 중원은 지나칠 정도로 넓다. 하나와 셋이 동등한 전력이라 했을 때, 당연히 셋 쪽이 활용도가 넓을 수밖에 없다. 전면전이 되거나 천하제일인이 치고 빠지는 식의 전술을 구사한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그건 불가능한 가정이다. 마교의 존재와 현경의 무인, 남궁세가의 수비 등 고려해야 할 요소가 너무 많다. ‘이 가능성은 배제해도 되겠어.’ 그렇다면 달리 무엇이 있을까. 섬서와 산서, 강소, 절강에서 날뛰는 초절정의 무인들? 의미 없다. 물론 피해가 적지는 않겠으나, 초절정 고수를 잃는 것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피해다. 한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제갈통은 끝내 결론을 내렸다. “려원은 화산의 장문인께 맡깁니다. 무리하지 않고 놈을 쫓아내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또한…, 공동파의 장문인께 서쪽의 동세를 항시 살펴달라 말을 전해주세요. 혹여 놈들이 서쪽의 허리를 끊으려 하면 즉시 대응해야 합니다.” “예!” “또 한 가지. 실종된 주요 인물들의 수색에도 신경을 기울이도록 하십시오. 설령 이미 죽었다고 한들 그 시체라도 찾아내야 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 ‘…됐다.’ 정파의 움직임을 살피던 사마현은 입꼬리를 찢어올렸다. 과감한 수보다는 언제나 안전하고 뒤탈 없는 수를 두는 제갈통. 그의 성향이 이번에는 발목을 잡았다. “흐, 흐흐….” 핏발 선 눈으로 지도를 살피는 사마현의 모습에 보고를 올린 수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신 나간 계책이다.’ 만약 수를 조금이라도 읽힌다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도박수. 허나 사마현은 보란 듯이 성공까지 단 한 걸음만을 남겨두었다. ‘이해는 간다.’ 제갈통 입장에서는 결코 사마현의 수를 읽어내는 것이 쉽지 않았을 터. 분별 없이 뿌려대는 미끼로 낚는 것이 단 하나의 기물이라니. 심지어 그 기물은 천하제일의 무력을 자랑한다. 낚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그것을 사냥하려면 사냥꾼 입장에서도 압도적인 전력을 준비해야 했다. 만약 일이 실패로 끝나거나, 혹은 시간이 약간만 지체되어도 사흑련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된다. 사냥감이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라도 한다면? 사흑련은 이미 사냥 준비를 위해 어마어마한 출혈을 감내했다. 진법 하나에만 련 내의 절정경 100명, 일류 내지 이류의 무인 500명, 범인 3000명을 제물로 삼았다. 이게 고작 진법 하나에 들어간 소모값이다. 일이 조금만 틀어져도 그 모든 준비가 무용지물이 된다. 상대하는 이들의 마음과 성향을 꿰뚫고 있지 않으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계책. 허나 이대로 사냥감, 남궁진천이 사마현의 뜻대로 움직여주기만 한다면…. ‘이번 전쟁은 사흑련의 승리다.’ 사마현은 확신했다. * “연이의 소식이 끊겼단 말이지….” “예. 창천대주 및 창천대 전원이 연락이 닿지 않습니다.” 남궁연. 그녀는 남궁진천의 친동생이다. 피가 이어졌음에도 그녀는 남궁진천과 여러모로 달랐다. 남궁진천이 고요한 하늘이라면, 그녀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요란한 하늘을 닮았다. ‘감이 좋지 않군….’ 남궁진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재 남궁세가 내부에는 마땅한 전력이 없다. 가문을 지킬 정도의 고수들은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전력은 전쟁 탓에 외부에 나가있다. 남궁연의 구호를 위해 보낼 전력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직접 가지….”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전쟁의 판도, 십육명문이라는 이름의 무게. 남궁진천에게는 전혀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남궁연은 남궁진천의 가족이다. 남궁진천이 직접 움직일 이유로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 누구의 이해도 바라지 않는다. 부인을 잃은 그 순간부터, 남궁진천에게 가족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가주전을 나서 올려다본 하늘은 맑았다. 남궁진천은 그 깊숙한 곳에 감춰진 천기를 엿보았다. ‘흉(凶).’ 남궁진천의 허리춤에서 검이 스스로 뽑혀나와 허공을 맴돌았다. 천기는 모든 것을 알려주지 않는다. 화경의 무인이라면 천기를 바꿔 쓰는 것 역시 가능하다. 남궁진천은 굳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천기가 어떻건, 가족을 구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다. 그렇다면 나아갈 뿐이다. 남궁진천이 검 위에 걸터앉아 말했다. “내가 없는 동안 가문은 명이 네가 이끌어야 한다….” “예, 아버지.” “그래…. 부탁하마….” 둥실, 검에 올라탄 남궁진천의 몸이 떠올랐다. 스읏- 종이가 베이는 듯한 소리와 함께 남궁진천의 신형이 사라졌다. 남궁명의 고요한 시선이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 남궁진천은 공간을 베어내며 나아갔다. 그는 그저 검 위에 걸터앉아 있었으나, 나아가는 검은 앞선 공간을 꿰뚫어 남궁진천을 순식간에 섬서의 최북단으로 이끌었다. 남궁진천이 땅에 발을 디뎠다. 남궁세가를 떠난 지 채 찰나의 시간이 흐르기도 전이었다. 화경의 무인이 휩쓸고 지나간 땅은 황폐했다. 시체조차 온전히 남지 않아 건조한 공기만이 코끝에 맴돈다. 말없이 주변을 살피던 남궁진천은 희미한 흔적을 발견했다. 남궁진천 정도의 무인이 아니라면 발견할 수 없을 아주 미세한 흔적이었다. ‘함정인가.’ 대놓고 자신을 부르고 있다. 알고 있음에도 지원을 부를 수는 없다. 구태여 인질이라는 손패를 버릴 이유가 없으니 남궁연은 아직 살아있을 터. 괜한 짓을 했다가는 남궁연의 목숨이 위험해진다. 우웅-, 검이 남궁진천의 주변을 맴돈다. 남궁진천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공간을 접어 이동하던 그는 사막의 한복판에 섰다. 모래바람에 시야가 뿌옇다. 저곳에 그의 누이가 있었다. 섬서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이었다. 사흑련의 영역이라는 뜻이다. 이곳까지 이어진 희미한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이는 거의 없고, 그것을 발견하더라도 이곳까지 오는 데는 시간이 소요된다. 누군가 남궁진천을 지원하러 올 가능성은 터무니없이 낮았다. “연아….” 구속당한 남궁연이 소리쳤다. “이 멍청한 놈이…! 빨리 도망쳐…!” 남궁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네 신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궁진천은 남궁연의 곁에 선 채 그들을 보았다. 전부 아는 이들이다. 파천제가의 가주 제천혁. 기련문의 문주 혁문약. 검종문의 문주 검율. 사흑련의 직속 무력대주 능평호. 화경의 무인이 넷. “진법을 펼쳐라…!” 그리고 주변을 에워싼 초절정의 무인이 대략 스물. 화악-! 순식간에 펼쳐진 진이 일대를 격리한다. 진 내부에는 남궁진천과 남궁연, 그리고 네 명의 화경만이 남았다. “정말로 올 줄이야. 그것도 홀로.” 제천혁이 남궁진천과 마주 보고 섰다. 우측에 기련문주가, 좌측에 검율이, 후방에 능평호가 자리했다. ‘어쩌면 이곳이 나의 무덤이 되려는가….’ 창천검존 남궁진천. 천하제일의 사내는 그토록 바라던 끝이 왔음에 티없이 웃었다. ‘허나….’ 순순히 죽어줄 수는 없다. 자신의 바람에 아이들이 휘말려서는 안 된다. 갈 때는 가더라도 이들은 전부 데려가야 아이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 터. ‘나머지는 아이들에게 맡겨도 되겠지….’ 큰 걱정은 않는다. 믿음직한 사위가 생겼으니, 아이들이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시게….” 혹여 죽지 못하더라도 그뿐. 죽고자 하는 이기심보다는, 살아있는 동생을 지킨다. 남궁진천은 그렇게 살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