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맹(武林盟). 그것은 정파 무림의 연합이다. 십육명문의 장로 중 일부가 무림맹의 장로를 겸임하고 있으며, 간혹 십육명문 출신이 아님에도 뛰어난 실력을 바탕으로 무림맹의 장로를 맡고 있는 인물 역시 존재한다. 허나 무림맹은 의외로 허울뿐인 집단에 가까웠다. 하나의 왕국이라 할 수 있는 십육명문의 각 문파에는 무림맹의 권위가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각 문파의 뜻이 하나로 합쳐지는 일이 거의 없다시피하니, 평시의 무림맹은 그저 몇몇 장로들의 친목을 위한 모임 정도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시에는 얘기가 다르다. 아주 드물게 정파와 다른 세력 사이의 마찰이 격해지면, 그때는 무림맹이 나름 그럴듯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작금의 상황이 그렇다 할 수 있었다. 그 탓에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관찰하며 차나 홀짝이는 것이 일상이었던 무림맹의 총군사 제갈통 역시 미친듯한 격무에 시달렸다. “북해빙궁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라…. 확실한 정보입니까?” “그렇대도. 궁주는 중상을 입었는지 폐관에 들었고, 빙궁도 거의 폭싹 무너져서 큰일이라던데? 거기 제천혁 그놈도 모습을 드러냈다는구만.” “어쩐지. 공동파의 장문인께서 급히 움직이신 이유가 있었군요.” 제갈통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화경의 고수들에게 일러둔 말이 있는 까닭이었다. 만약 사흑련 측의 화경이 자리를 비운다면, 그를 견제하던 아군의 화경이 즉시 움직여 이득을 볼 것. 이번 역시 공동파의 장문인이 움직여 기련문을 향한 공세에 큰 힘을 실어주었다. “이봐 대갈통이.” “…애도 아니고. 사람 이름으로 그러깁니까?” “아니, 사람 이름이 어떻게 통이냔 말이야.” “제 부친께 여쭤보시지요.” “이미 물어봤는데? 하늘과 통(通)한다. 뜻은 좋은데, 거…. 앞이나 뒤에 뭐라도 좀 더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싶으이.” 무림맹의 총군사 제갈통을 스스럼없이 놀릴 수 있는 사내가 누구인가. 그 이름하여 팽추산. 하북팽가의 장로 중 일 인이었다. 팽추산은 껄껄 웃으며 제갈통 앞에 놓인 지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튼 간에, 마교 놈들이 고맙기는 또 처음이란 말이지. 전장이 아예 서쪽으로 옮겨져서 팽가도 한시름 놨어.” “아뇨, 아직 안심할 때는 아닙니다. 이럴 때일수록 중앙이나 동쪽을 몰아칠 수도 있어요.” “설마. 미치지 않고서야? 그랬다가는 기련문이 아예 밀려버릴 텐데?” “미쳤으니 하는 말입니다. 사흑련의 총군사는 제정신이 아니에요.” 간혹 그가 펼치는 전술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면 일종의 광기가 느껴진다. 장기를 두듯 과감하게 수를 펼치고, 버릴 패는 미련도 두지 않고 버린다. 오히려 멀쩡한 기물을 버리다시피 내던지며 그에 따라오는 이득을 극대화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사흑련의 총군사 사마현. 그는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군사로서는 훌륭하나, 제갈통은 혐오감을 감출 수 없었다. 결코 상종하고 싶지 않은 인간이다. “아무튼 호재입니다. 빙궁이 약화되었다니 서쪽에서 확실하게 승기를 굳힐 수 있겠습니다.” 누군지 모를 마인에게 입이라도 맞춰주고 싶다. 어찌 그렇게 예쁜 짓만 골라서 했는지. 정파 무림이 서쪽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면 기련문과 북해빙궁이 마교와 정파 사이에 끼게 될 텐데, 이번 일로 마교와의 관계가 악화되었을 사흑련으로서는 피하고 싶은 일일 수밖에 없다. 북해빙궁은 이미 막대한 피해를 입은 상황. 기련문 홀로 마교의 공세를 막아내기는 버겁다. 칠사흑문 중 두 문파가 섣불리 움직일 수 없게 된다는 뜻이다. “세상일이 마냥 뜻대로 되지는 않겠지만, 이번에는 하늘이 정파의 손을 들어주려는 모양입니다.” 제갈통이 웃었다. * 사마현은 웃지 못했다. “…이런 정신 나간 새끼들을 봤나.” 멍하니 지도를 내려다보던 그는 천산이 그려진 위치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콰앙-! 탁상 위의 집기들이 마구 흔들린다. ‘계획이 전부 흐트러졌다.’ 신녀와 검마, 탐마, 또 이름 모를 마인 하나까지. 만마종주의 싹이라 했던가? 별 시답잖은 일로 대계가 헝클어졌다. 그런 주제에 마교에서 신녀의 직인이 찍힌 문서 하나가 날아왔다. 교의 행사를 방해한 것에 큰 유감을 표한단다. 미친놈들 같으니. 저희들이 쳐들어와 놓고서 이렇게까지 당당할 수가 있나? 마교 놈들과 상종하지 말라는 것이 이래서 나오는 소리다. “하나하나 거슬리기 짝이 없어….” 허나 이 상황에서 마교를 적으로 돌릴 수는 없다. 이미 북해빙궁이 큰 피해를 입은 상황이다. 여기에 마교까지 끼어들었다가는 판 자체가 사흑련에 너무 불리하게 돌아간다. 온갖 변수가 난무하는 가운데, 사마현은 끝내 결심을 내렸다. 무모한 전략이지만 묘하게 돌아가는 흐름을 끊어내기에 이만한 수가 없다. 그의 눈이 번뜩이며 중원의 중앙에 위치한 말을 움직였다. ‘정파의 가장 커다란 말을 잡는다.’ 무림의 별이 진다면, 온실 속 화초들은 감히 사흑련의 기세를 감당할 수 없으리라. * “온다.” 춘봉이 번쩍 눈을 떴다. 어두컴컴한 폐관실. 그녀가 단숨에 문을 열어젖히자 한순간 들이닥친 빛이 어둠을 몰아냈다. 화악-! 며칠만에 보는 햇빛에 춘봉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일전 폐관 수련에 들면서 세운 목표를 전부 이루지는 못했지만, 이대로 틀어박혀 있어봤자 별 성과가 나올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럴 바에야 마중이라도 나가는 편이 낫지. “금 매?” 그러다 때마침 근처를 지나던 남궁수아와 마주쳤다. 그녀는 춘봉의 굳은 표정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잰걸음으로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 “무슨 일 있어?” 허리를 굽혀야 시선이 맞는다. 그 사실에 불룩하니 볼을 부풀린 춘봉이 퉁명스레 말했다. “올 거야.” “응? 뭐가?” “이서준.” “으응?” 남궁수아가 의아해했지만, 춘봉은 확신했다. 느낌이 왔다. 이서준이 말하길 춘봉 레이더. 그 감각에 딱 걸려들었다. “나 어디 갔는지 아무 말도 하면 안 돼.” 비장한 한마디를 남긴 춘봉이 후다닥 움직였다. 쌩하니 사라진 춘봉을 보며 남궁수아가 눈을 깜빡였다. “서준이가 온다고…?”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던 남궁수아는 은근하게 걸음을 서둘렀다. 준비할 것이 있었다. 너무 밀어붙이는 것 같아서 조금 미안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있나. 보여주고 싶은 마음을 참기 힘든걸. 시간이 날 때 조금씩 만들어온 의복. 약혼식에서 입을 옷이 완성됐다. * 결국 만마종주의 싹을 교로 데려오는 데 실패했다. 가라앉은 신녀의 기색에 탐마가 홀쭉해진 배를 쓰다듬었다. “그…, 많이 큰일인가?” “아뇨, 변하는 건 없습니다. 허나 이 일에 대해 수마에게는 반드시 그 책임을 물을 겁니다.” “수마에게…? 그게 되겠나?” “그녀 때문에 만마종주의 싹을 놓치지 않았습니까.” “아니, 명분이야 둘째 치고.” 사실 명분상으로도 수마의 잘못이라 하기에는 애매하다. 신녀가 아닌 만마종주의 뜻을 따랐을 뿐이니. 아직 교에 귀의한 것은 아니지만, 서열로 따져봤을 때 만마종주의 싹은 결코 신녀의 아래가 아니다. 하지만 그 모든 걸 제쳐두고서라도 과연 그 수마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장난 아니게 세던데. 검마 이 양반도 못 이기는 거 아니야?” 검마가 매서운 눈으로 탐마를 노려봤다. 찔끔한 탐마가 냉큼 입을 다물었다. 신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대단한 조치를 취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녀의 성정 자체가 온화한 편이니 몇 마디 해두면 알아서 자중하겠죠.” “에잉, 싱겁구만. 싹을 놓쳐서 뭔 일이라도 날 줄 알았더니.” 탐마가 입맛을 다셨다. 신녀는 고개를 저었다. 수마에게 대단한 책임을 물을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만마종주의 싹은 천산으로 돌아오게 되어있습니다.” “이번에 보니까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던데?” “그는 반드시 돌아옵니다.” 신녀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녀는 전해져내려오는 만마종주의 이야기를 기억했다. “만마종주의 싹은 평범한 인간과 다릅니다.” “다르다니?” “만마종주의 싹은 그 감정이 아주 옅습니다.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하며, 어떤 상황에서 당연히 느껴야 할 감정을 느끼지 못하죠.” 마인과 비슷하다 할 수 있으나, 만마종주의 싹은 선천적으로 그러한 기질을 타고 태어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가 정파나 사파의 영역에 머문다 한들, 결국 배척당해 천산으로 돌아오게 될 겁니다.” 최악의 상황은 만마종주의 싹이 무림공적으로 몰려 살해당하는 것. 허나 칠마 둘과 신녀 자신, 천라지망까지 돌파한 실력으로 보건대 그럴 일은 없을 듯싶었다. “단지 조금…, 시기가 늦어졌을 뿐이죠.” 신녀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한동안 꽤나 마음고생을 하게 생겼다. * 마이 스위트 홈. 남궁세가. 당연하게도 이서준의 모습을 한 채 복귀한 서준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정문을 통과했다. “나, 강림.” 화마경의 대마두가 대남궁세가에 복귀했다. 보무도 당당하게 걸음을 옮기던 서준은 문득 기감에 걸려드는 익숙한 기척에 걸음을 멈췄다. “응?” 도대체 왜 저런 곳에…?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그는 자연스럽게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서준이 문지방을 넘었을 때, “와악…!” 대문 위에 거꾸로 매달려있던 춘봉이 호랑이 같은 손모양(을 하고 싶었던 듯 싶지만 아무리 봐도 고양이 같은 손모양)을 한 채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서준은 거꾸로 매달린 춘봉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는 잠시 고민하다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끼야아아악…! 리버스 금춘봉이다!” “으흐흐.” 땅에 내려선 춘봉이 뿌듯한 표정으로 폴짝 뛰었다. 그녀는 서준에게 매달리듯 안겨 입술에 쪽쪽 입을 맞췄다. “왔어?” 미친 고양감이 한계를 뚫고 하늘로 치솟는다. 목숨이 오가는 전투? 그런 싸구려 도파민은 춘봉 뽀뽀에 감히 비비지도 못한다. “오빠 왔다, 춘봉아!” 춘봉을 번쩍 치켜든 서준이 냅다 경공을 펼쳤다. 남궁세가를 한 바퀴 돌며 춘봉 자랑을 마친 서준은 그녀를 목마 태운 채 히히 웃었다. “이 오빠가 글쎄 개쩌는 녹용을 얻어왔어요.” “녹용? 그건 또 뭔 소리야? 천산 간 거 아니었어?” “맞지. 이게 천산에서 나는 귀한 녹용이거든.” 서준이 짐에서 녹소평의 뿔을 꺼내들었다. 뿔의 모습이 드러나자마자 일대에 거대한 기운이 스며 나온다. 은은한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킨 춘봉이 물었다. “야, 야. 그거 뭐냐…?” 이 새끼 또 이상한 거 주워온 거 아니야? 춘봉이 데굴데굴 눈을 굴렸다. “이게 또 얘기가 길어진다요?” “…이 새끼 또 이상한 말투 배워왔네.” “이거 되게 중독성 있다요? 춘봉이도 해보는 거다요?” “싫다요, 이 새끼야.” 목마 탄 춘봉이 허벅지를 콱 조였다. “켁…!” 서준이 춘봉의 허벅지를 탁탁 쳤다. 훗, 승리한 금춘봉이 폴짝 뛰어 땅에 내려섰다. 서준은 입술을 삐죽 내민 채 녹용을 다시 짐 속에 쑤셔넣었다. “누나는?” “몰라? 오는 길에 못 봤어?” “못 봤는데.” 방에 있나? 턱을 긁적인 서준이 춘봉의 손을 꼭 붙잡고 걸음을 옮겼다. “일단 장인어른한테 보고 하러 가자.” “나는 왜?” “같이 안 갈 거야?” “아니. 가야지.” “그렇지?” 그러면 이제 화마경 시연식이다. 춘봉이가 뿔을 보고 놀라 엉엉 울지만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