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서준은 경지를 감추고 있었다. 갑자기 힘숨찐 놀이가 하고 싶어진 건 아니다. 화마경은 스스로가 마(魔)로 화하는 꽤나 독특한 경지였는데, 그게 극마와 구별이 어렵지 않아 상당히 눈에 띄기 때문이다. 신녀가 자신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괜히 눈에 띄는 짓을 하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그 탓에 환치성은 서준의 수준을 초절정으로 착각했다. 아무리 천산이라 해도 극마쯤 되는 위인이 무명인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었다. 번쩍────────── 날아드는 역천일월공을 발도로 받아친 환치성의 몸이 주춤했다. “으음…!” 위력이 예사롭지 않다. 속절없이 뒤로 밀리는 몸을 빠르게 회전시키며 힘을 흩어낸 환치성이 땅을 박차 뛰어올랐다. 타악-! 허공에 떠오르자마자 다시금 수 발의 역천일월공이 날아든다. 환치성은 이를 악물며 도의 손잡이를 꽉 붙잡았다. “흐읍…!” 꽈앙-! 웅크린 몸을 펴며 허공을 박찼다. 역천일월공이 옷자락을 스친다. 환치성의 눈이 빛났다. ‘빈틈.’ 발견하는 것과 동시에 발도했다. 번쩍──────────── 도끝이 아쉽게 서준의 옷자락을 스쳤다. 환치성은 거리를 좁히며 상대의 공격을 피하고 반격하는 것에 집중했다. 서준이 거리를 두려 했기에 환치성은 그를 열심히 쫓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 번의 수가 오간 뒤, 서준이 혀를 찼다. “그것뿐이냐?” “설마.” 히죽 웃은 환치성이 허리를 숙였다. 재빠른 동작에 장포가 허공에 날린다. 타악-! 땅을 박찬 그의 신형이 빛살처럼 날았다. 터무니없는 속도다. 서준이 눈썹을 까딱이며 검을 뽑아들었다. ‘드디어 뽑았나.’ 한층 긴장한 환치성이 전신의 마기를 일순 폭발시켰다. 꽈앙-! 귓속에서 벼락이 친다. 동시에 도를 뽑았다. 추광섬뢰도(追光閃雷刀). 스스로 창안한 무공이 길을 연다. 도집이 뽑혀나오는 도를 밀어내며 한층 가속시키고, 폭발하듯 튀어나온 도는 빛을 흩뿌린다. 번쩍─────────── 지금까지보다 배는 빠른 도가 서준을 향했다. 서준은 여상하게 한손으로 검을 내리쳤다. 천마신검(天魔神劍). 파츳-! 서준의 검에 새카만 벼락이 어렸다. 어느덧 능숙하게 펼쳐낸 자전마공(紫電魔功)의 벼락이다. 마를 품은 벼락이 하늘을 떨구어 발밑에 두었다. 태산압정(太山壓頂). 우르릉────────!!! 찍어누르는 듯한 압력에 기함한 환치성이 급히 몸을 피했다. 꽈아앙-! 내리쳐진 일검에 파인 구덩이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환치성은 헛웃음을 흘리며 날 선 눈으로 서준을 보았다. “과연 그 오만한 눈빛만큼이나 대단한 실력이군.” 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선 채 검을 까딱였다. 지도 대련이라도 하는 듯한 모양새다. 하하──! 크게 웃은 환치성이 다시 한 번 도집에 감싸인 도의 손잡이를 쥐었다. 우르릉-! 그의 체내에서 벼락이 쳤다. 서준의 일검에서 받은 영감이 정수리에서부터 꼬리뼈를 가로지르는 벼락이 되었다. 그는 저릿한 감각을 손끝에 새기며 한 발짝 나아갔다. 가로막은 벽. 상대의 검에서 그 너머로 향하는 길을 보았다. “이제야 알겠어.” 한 순간의 번뜩임이란 무엇인가. 벼락이 되어 내달리는 오성이 혈도를 꿰뚫는다. “한평생 의문을 가지고 살았지. 과연 인간은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가.” 느닷없는 말에 서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싸우던 도중에 뭔 헛소리냐.” “그대의 이해를 바라진 않아. 타인을 이해했다는 것은 착각이며, 또 오만이지. 인간은 스스로의 경험을 바탕으로 타인의 심정을 추측할 뿐. 이해하려는 시도를 반복해도 결국 진실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서준이 묘한 눈으로 환치성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도 당장 달려들지는 않는다. 환치성은 그 오만함에 감사하며 몰아치는 깨달음을 정리했다. “결국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뿐. 스스로에 대해 앎으로써 나는 진리에 다가선다.” 쩌적-! 둑이 무너진다. 넘쳐흐른 깨달음이 급류가 되어 영혼을 휩쓸고, 애매한 균형을 이루었던 정기신이 마에 물들며 하나에 가까워진다. “진아(眞我). 그것이 나다.” 화악-! 환치성의 눈에 섬뜩한 기운이 어렸다. 탁하게 물든 다섯 개의 고리가 그의 머리 뒤에 희미한 형상을 드러냈다. 오기조원(五氣朝元)이다. 극마에 오른 환치성이 안광을 번뜩이며 서준을 노려보았다. “시야가 맑군. 공기가 새로워. 마에 물든다는 것은 생각보다 괜찮은 일이었어.” 스으…. 잇사이로 더운 호흡이 새어나온다. 눈앞의 상대를 베어낸다. 강렬한 충동에 휩싸인 환치성이 도의 손잡이를 꽉 붙잡았다. 그 모습을 본 서준이 눈을 부릅 떴다. “…말도 안 돼.” “오만에 대한 대가를 치러라.” “아니, 진짜 이게 다라고? 이러면 굳이 마교까지 올 필요도 없었는데?” 뜬금없는 말에 환치성이 눈가를 좁혔다. “무슨 소….” 화악-! 서준의 등 뒤로 새카만 다섯 개의 고리가 선명한 형상을 이루었다. 서준이 극마에 도달했다. * 극마에 올라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깨달음을 전해주듯 알아먹기 쉽게 검을 휘둘러줬다. 그런데 이놈이 느닷없이 헛소리를 내뱉는다. “진아(眞我). 그것이 나다.” 뭐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근데 일단 저 말이 맞는 말이라는 건 알겠다. 인간은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 했던가? 확실히 지금 저놈이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먹겠다. 그리고 환치성이 극마에 도달했다. 마에 물들어 하나로 묶인 정기신이 서로를 강하게 잇는다. 서준은 극마라는 경지가 여기서 무언가 더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간단하니까. 화경과 비슷한 위치에 있는 경지인 만큼 그렇게 쉽게 도달할 수는 없으리라 여겼다. 오산이었다. “…말도 안 돼.” “오만에 대한 대가를 치러라.” “아니, 진짜 이게 다라고? 이러면 굳이 마교까지 올 필요도 없었는데?” 검신이 말하길,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라 하였다. 과실이 익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느니, 신이 무르익는 데도 시간이 어쩌고 저쩌고…. 헛소리였다. 이 정도면 그냥 그 자리에서도 할 수 있었다. ‘검신 그 양반 진짜 등선 어떻게 했지?’ 서준은 헛웃음을 흘리며 정기신을 마로 물들였다. 그리고 극마에 도달했다. 놀라우리만치 아무런 이변도 없었다. 상상 이상으로 너무 쉽다. 이게 화마경이나 기신경 따위의 경지와 비견된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아니지. 확실히 화마경은 극마보다 반 수 정도 앞서는 것 같긴 한데…. “어떻, 게…?” 환치성이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서준은 그를 무시한 채 생각을 이어갔다. ‘화마경과 극마.’ 서로 충돌하는 개념은 아니다. 화마경이 조금 특이한 경지인 까닭이다. 화마경은 정기신의 균형을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정기신은 그대로 둔 채 오롯이 스스로 마로 화하여 드높은 곳에 다다른다. 그 말은 곧 두 경지를 동시에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극마를 이루며 정기신까지 완벽하게 마로 물들인 서준은 환하게 빛나는 세상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이거야 원…. 처음부터 마공을 익혔으면 진작에 다다랐을 곳인데.” 참 멀리도 돌아왔다. 서준은 날뛰는 충동을 억누르며 환치성을 바라보았다. 멍하니 서준을 바라보던 환치성이 소리쳤다. “개소리 마라…!” 이를 악문 환치성이 도를 뽑았다. 번쩍-! 간결한 일도가 서준의 목을 노린다. 서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일견 반응하지 못한 듯도 보였다. 까앙-! 허나 도는 맥없이 튕겨나왔다. 서준과 가까워진 순간 마기가 흩어지고, 한낱 날붙이는 호신강기를 뚫지 못했다. 환치성의 눈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다. 이건…. 너무 불합리하다. “흐아아아아……!!” 환치성의 정기신을 물들인 마가 폭주한다. 폭주한 마는 마음에 깃들어 심마가 되었다. 한평생 쌓아올린 깨달음. 드디어 내디딘 한 걸음.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부정당했다. ‘아니다. 흔들리지 마라. 속임수다.’ 이미 극마에 올라있던 노괴이리라. 후배를 조롱하는 것이 취미인 성격파탄자요, 나잇값도 못 하는 철부지이리라. 스스로를 세뇌해보지만, 그도 알았다. 저 자는 진정 이곳에서 극마에 올랐다. 다잡은 마음이 부질없이 무너진다. 스스로 마에 물들어 극마에 오른 환치성은 아직 그 마를 감당하지 못했다. 마는 변덕스럽다. 그 이름의 원천인 마라를 닮았다. 극마는 곧 마라를 닮아가는 과정. 마의 극에 다다랐으나, 완숙하지 못한 이상 언제나 심마의 위험을 품고 살아간다. “끄으으…!” 왜. 어째서. 나는 천재가 아니었던가? 저런 부조리한 재능 앞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지? 마음이 무너진다. 무너진 마음에 마가 들어찬다. 아주 깊숙한 곳부터 들어찬 마가 끝내 환치성을 완전히 물들였다. “아아아아──────!!” 새카맣게 물든 팔이 도의 손잡이를 잡는다. 환치성의 눈에서 마기가 줄줄 흐른다. 눈앞의 적. 부조리의 화신. 현신한 심마를 베어낸다. 번쩍──────────!!! 빛보다 빠르게, 더 멀리, 아득한 곳으로. 뻗어낸 도가 나아간다. 환치성은 보았다. 사내가 웃는다. 팅-! 뻗어진 도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튕겨나온다. 머리가 하얗게 물든다. 분노가 벼락이 되어 이성을 태운다. 더 빠르게. 빛을 넘어서. 나는 어디까지 갈 수 있지? 한계. 몇 걸음을 내디뎌, 저 먼 인과의 끝까지. “흐아아아……!!” 환치성의 몸이 빛이 되었다. 육신이 녹아내리고, 일렁이는 마기로 화해 끝내 또 한 번의 한계를 넘어섰다. 히죽- 그를 바라보던 서준이 웃었다. 과하게 흥분하고 있음을 스스로도 알았다. 마에 물든 까닭이다. 허나 그것이 해가 되진 않는다. 당긴 검을 의식하고, 스스로를 담아 내찌른다. 천마신검 제3초, 선인지로. 푸화악-! 찔러넣은 검이 하늘을 꿰뚫었다. 환치성이 휘두르던 도 역시 함께 꿰뚫렸다. “아아아…!” 이성을 잃은 환치성은 스스로의 왼팔을 뽑아내 쥐었다. 새카만 피를 흩뿌리는 팔이 도가 되었다. 물씬 풍겨오는 피냄새에 서준은 환희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물든다. 짜릿한 쾌감이 척추를 가로지르는 것과 동시에 해방감이 솟구친다. 콰드득-! 관자놀이를 뚫고 뿔이 돋았다. 환치성은 신경 쓰지 않고 도가 된 팔을 휘둘렀다. 새카만 피가 날카로운 궤적을 그리며 서준을 덮친다.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 쿠웅-! 허공을 짓밟자 환치성의 몸이 땅에 처박혔다. 서준이 환하게 웃으며 양팔을 활짝 벌렸다. 츠츠츠츳────── 오기조원. 그 다섯 개의 고리가 서준의 등 뒤에서 회전한다. 고리의 중앙에 마기가 뭉쳤다. 다섯 고리 속 다섯 구체. 서준의 손짓에 역천일월공이 쏘아졌다. 스아아아악────────── 다섯 기둥이 대지를 꿰뚫는다. 오기조원의 고리는 서준이 의식할 필요 없이 스스로 마기를 뭉쳐 쏘아냈다. “으아아아…!” 환치성은 부정형으로 일렁이는 몸을 하늘로 쏘아냈다. 역천일월공이 스친다. 스치는 자리마다 깎여나간 몸이 허공에 흩뿌려진다. 어느새 오른손에 쥔 왼팔이 녹아내렸다. 검게 일렁인다. 사람의 팔보다 도(刀)에 가까워진 왼팔을 휘둘렀다. 번쩍────────────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른 일격이었다. 빛의 뒤를 따랐다. 허나 닿지 못했다. 허공에 점점이 피어난 꽃잎들. 환치성은 꽃잎 한 장에 가로막힌 자신의 도를 보며 새카만 눈물을 줄줄 흘렸다. ‘아…!’ 가슴이 턱 막힌 감각과 함께 서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머리에는 뿔이 돋은 채, 허공에 서서 오연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존재. 그를 깊게 들여다보려 할수록 스스로의 존재가 흩어져간다. 끝없는 구렁텅이. 심연에 발을 디뎌 자아마저 흐려진다. “부조리하다….” 유언이었다. 허공의 꽃잎들이 뭉쳐 세 송이의 꽃이 되었고, 꽃에 달린 아가리가 환치성을 씹어 삼켰다. 콰득-! 새카만 피 몇 방울을 남겨두고 환치성이 사라졌다. 히히힝-! 지켜보던 그의 말, 소청이 시뻘건 눈을 한 채 달려들었다. 머리에 맺힌 마기가 뿔이 되어 서준의 가슴을 노린다. 서억- 서준은 검을 휘둘러 말의 목을 베었다.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던 소청이 눈을 부릅 뜬 채 죽었다. 허공에 가부좌를 튼 서준은 주변을 맴도는 세 송이의 꽃과 다섯 개의 고리를 등 뒤에 띄운 채 드높이 떠올랐다. 마기가 칭얼댄다. 더 많은 피를 원한다고. 서준은 문득 깨달았다. 아마 완숙한 극마의 마인들은 꽤나 차분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 혹은 그렇게 되지 못한 마인들은 죄다 심마로 죽었을 테니. 극마라는 경지는 상당히 불안정한 무언가였다. 물론 자신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조용.” 가볍게 내뱉자 이성을 물들이던 충동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화마경과 극마. 내외로 완전히 마를 이룬 이 경지를 무엇이라 칭해야 할까. 고민하던 서준은 문득 기척을 느꼈다. 그제서야 차분하게 주변을 살피다 헛웃음을 터뜨렸다. “흠…. 좆됐나?” 신녀라고 했던가? 아무래도 저 멀리 보이는 여자가 신녀인 듯싶다. 신녀 곁에는 극마의 마인이 둘. 덤으로 이 근방을 둘러싼 수천의 마인들까지. 도대체 언제 온 거지? “반가워요.” 여인의 목소리가 하늘을 웅웅 울린다. 그녀는 불꽃처럼 일렁이는 눈동자로 서준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만나뵙네요. 만마종주의 싹이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