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준은 풀었다 다시 짜낸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생각보다 괜찮네.’ 일단 이기어검보다 편하다. 실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있기에 그렇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 번 해보고 나니 요령을 알겠다. ‘아예 풀었다 다시 짤 때 문양을 바꿀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기를 이용해 실뜨기를 하는 느낌이다. 본래 이 천잠사로 지어진 옷, 서준이 대충 천잠사의(天蠶絲衣)라고 부르는 신병이기에 그런 공능은 없었지만, 그냥 하려면 또 못 할 것도 없었다. 절정 시절부터 내공으로 실뜨기를 하고 놀았는데 이 정도쯤이야. 서준은 백서준을 연기하며 대충 주변을 훑었다. 방금의 일격으로 일백에 가까운 수의 마인이 죽었지만, 아직 그래도 수가 꽤 많다. 전장이 이곳만 있는 것도 아니다. 자세한 상황은 몰라도 꽤 많은 전력이 곤륜에 쳐들어온 것 같은데…. “이보시오 말코도사.” “…뭐냐.” “너무 그리 겁먹을 것 없소. 오늘은 기분이 좋거든.” 백서준이 싱긋 웃으며 도사에게 다가섰다. “이렇게 만났으니 통성명이나 좀 하지. 이름이 어떻게 되시오?” “사흑련 잡것에게 알려줄 이름 따위 없다.” “허, 잡것?” 서준의 눈이 일대를 훑었다. 어느새 전투는 소강 상태. 수가 확연히 줄어든 마인들과, 지친 기색의 정파 무인들이 서준을 바라본다. “이 잡것의 눈에는 당장이라도 치울 수 있는 반푼이들밖에 보이지 않는데. 어찌, 한 번 해볼 생각이오?” “…풍월이다.” “호오. 풍월. 썩 풍취를 아는 이가 지은 도호로군.” 대화를 나누는 도중 드넓게 퍼져나간 서준의 기감이 일대의 무인들을 파악했다. 초절정 수준의 마인은…, 일단 기감 내에는 셋 정도. 전체적으로 곤륜이 우세해 보이긴 하지만, 마교의 전력이 이뿐일 리는 없다. 그야 정사마 중 한 축을 차지하는 마교와, 십육명문이라고는 하나 정파의 일개 문파에 불과한 곤륜의 싸움이다. 당연히 마교가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다. “아까도 말했듯 내 오늘은 기분이 좋소. 헌데 마실 차 나온 곤륜에 이리 마인들이 득시글거려서야.” “…원하는 게 무엇이오.” “전력을 물리시오.” “불가.” “허면?” “허면은 무슨. 마인들을 이대로 놓아주기라도 하라는 거요?” 풍월의 말투가 꽤나 공손해졌다. 서준은 뭔가 간질간질한 쾌감을 느끼며 크게 웃었다. “하하! 떠볼 생각일랑 마시오. 내 알아서 처리할 테니 어디 높은 곳에 앉아 구경이라도 하는 것이 좋겠군.” “내가 그대를 어찌 믿고?” “믿지 않으면, 무언가 방도가 있소?” 풍월은 묘한 미소를 머금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오랜 세월 강호를 누빈 풍월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 자가 사용하는 무공은 북해빙궁의 빙백신공. 지금 정파와 전쟁 중인 사흑련의 고수라는 뜻이다. 하지만 여기서 상대하기에는 상상 이상으로 그 실력이 대단했다. ‘화경? 모르겠군….’ 전력을 내비치지 않으니 알 방도가 없다. 허나 방금의 일수로만 보아도 평범한 초절정 수준은 아니다. 상대하려면 장문인이 나오거나, 장로들이 합공해야 한다. 하지만 굳이 그럴 이유가 있는가? 적이라고는 하나 당장은 곤륜에 피해를 끼친 것이 없는데? 오히려 말로는 마인들을 대신 처리해주겠다고 한다. ‘놈…. 무슨 속내냐.’ 풍월은 사내를 빤히 노려보다 끝내 입을 열었다. “…일단은 그리 하지.” “잘 생각하셨소.” 사내가 싱긋 웃었다. 그가 뒤를 돌아 걸어가려는 찰나, 풍월이 물었다. “헌데…. 내 이름만 듣고 그대의 이름은 밝히지 않을 생각이오?” 우뚝, 사내의 걸음이 멈췄다. 고개를 돌려 풍월을 일별한 사내가 픽 웃었다. “백서준. 북해빙궁의 백서준이오.” * 곤륜산은 그 산세가 험해 범인들은 멋대로 돌아다니는 것조차 어렵다. 나무가 적고 고원이 펼쳐져 있어 숲을 헤매는 불상사가 일어나는 일은 적으나, 날카로운 봉우리가 빽빽해 전투에 있어서도 변수가 많다. - 전원 퇴각하라! 문파로 향하는 마인 놈들만 막고 나머지는 내버려 둬라! 내공이 담긴 풍월의 목소리가 곤륜산에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남은 마인들을 빠르게 제거한 서준은 가벼운 걸음으로 땅을 박찼다. 타악-! 몇 번의 도약만에 봉우리의 꼭대기에 다다랐다. 서준은 그곳에서 복잡하게 얽힌 마교와 곤륜의 무인들을 바라보았다. ‘빠꾸가 없네. 물러나는 걸 굳이 쫓아가?’ 분명 당장은 마교 측이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곤륜의 뒤를 쫓고 있다. 화악-! 서준의 발밑에 혼원일월공이 구체를 이루었다. 우선은 피해가 클 것 같은 쪽부터. 콰아아앙──────────!!! 생체 미사일이 전장 한복판에 내리꽂혔다. * 마교 측의 군사(軍師), 조현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전달받았다. ‘빙공의 고수가 날뛰고 있다라….’ 어차피 이번 공세에 동원된 병력들은 소모품이다. 곤륜의 전력을 깎고 피로를 누적시키기 위한 버림패. 허나 이렇게 아무런 의미도 없이 내다버릴 만한 전력은 아니다. 그랬다가는 조현의 목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다. “귀찮게 하는군. 놈의 현재 위치는?” 부관이 지도 중 한곳을 가리켰다. “가장 최근 소식이 들어온 곳은 이곳입니다. 하지만 워낙 이동 속도가 빨라서….” “이동 경로는 파악했나?” “예!” 부관이 지도 위로 선을 그었다. 빙공의 고수가 이동한 경로였다. 빠르게 눈을 굴린 조현이 지도 위의 한 점을 가리켰다. “뻔하군. 우리의 세가 강한 곳부터 치고 있어. 팔(八) 대주와 연락은 닿았나?” “예!” “그렇다면 다음 목표는 팔 번 대(隊)다. 주변의 육, 십일, 십이 번 대를 동원해 이곳 협곡에서 매복해 한 번에 쳐라.” “현재 십일 대주가 부재 상태입니다.” “안다. 십일 대주라 해봐야 어차피 절정에 지나지 않는 놈. 육 대주와 팔 대주가 초절정이니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제아무리 뛰어난 고수라 하더라도 초절정 둘의 합격과 동시에 사방에서 날아드는 대원들의 공격까지 대처하는 것은 쉽지 않을 터. 전황을 살피던 조현이 명했다. “나머지는 일단 물려라. 이대로 밀고 들어가 봐야 손해밖에 없겠군.” “존명!” 부관이 서둘러 뛰쳐나갔다.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조현은 탁상을 툭툭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누군지도 모를 인물 하나를 찾으라니….’ 윗선의 말로는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그 누군가가 알아서 교로 찾아올 것이라 했지만, 조현은 납득하기 힘들었다. ‘어차피 찾아올 것이라면 왜 굳이 곤륜을?’ 쯧, 고민하던 조현이 혀를 찼다. 쓸데없는 고민이다. 신녀께서 무언가 뜻이 있으실 터였다. “천마강림 만마앙복.” 마라의 치세 아래 마교에 영원한 영광 있으리. * 서준은 혼원보와 황룡도하를 번갈아 펼치며 곤륜산을 누볐다. 애매한 거리에서 혼원보를 펼치는 것이 쉽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렇게 열심히 마인들을 학살하던 서준은 이내 어느 협곡에 다다랐다. 저 위의 절벽에서 화살이라도 쏘면 아래 있는 사람이 맞고 죽기 딱 좋은 지형이었다. ‘이게 진짜네.’ 그리고 놀랍게도 서준의 기감에 절벽 위에 매복하고 있는 마인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꽤 은밀하긴 한데,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서준의 기감에는 그 기척이 아주 선명하게 잡혔다. 게다가 마기를 품은 마인들이 아닌가? 우리 싹싹한 마기는 서준의 앞에서 그 존재를 감추는 법을 몰랐다. “놈이다…!” 절벽 위에 매복한 놈들이 아닌, 협곡 아래에서 서준을 기다리던 마인들이 눈을 번뜩이며 달려왔다. 선두에 선 이는 초절정. 잠시 고민하던 서준은 그냥 마주 달려들었다. 스릉- 달려나가는 서준의 허리춤에서 검이 스스로 뽑혀나왔다. “이기어검…!?” 선두의 마인이 경악하며 속도를 늦췄지만, 이미 늦었다. 서준이 천잠사의의 소매를 수십 가닥의 실로 풀어내며 손을 휘저었다. 스스스슷────────── 마인, 절벽 할 것 없이 썰려나간다. 그나마 선두의 마인이 실을 어느 정도 걷어냈기에 마인들이 몰살당하는 일은 없었다. 우르릉-! 하지만 토막난 절벽이 무너지며 협곡에 바위들이 쏟아져내린다. 설상가상으로 선두에 선 팔 대주에게는 서준의 이기어검이 닥쳐든 상황. “어서 도와라, 개자식들아…!” 간신히 검으로 이기어검을 막아낸 팔 대주가 외치자, 무너지는 절벽 위에서 허둥대던 마인들이 일제히 시위를 당겼다. 끼기긱-! 투투퉁-! 수십 발의 화살이 서준을 향해 쏟아진다. 절정에 이른 궁수들의 사격이다. 그 화살은 빗나가는 일이 없고, 화살촉에는 옅은 시기(矢氣)가 깃들어 강철조차 꿰뚫는다. ‘마기는….’ 굳이 쓸 필요 없을 터. 백서준이 씩 웃으며 입을 벌렸다. 쩌억──────── 가슴에 닿을만치 벌어진 턱. 목구멍에서 튀어나온 황금빛 내단이 찬란하게 빛난다. “팔한지옥(八寒地獄).” 유사영역이 펼쳐지며 삭풍이 불어닥쳤다. 쩌저저적────────── 날아들던 화살들이 모조리 얼어붙어 떨어진다. 쿠르릉-! 드높이 치솟은 얼음 기둥들. 그 위에 선 백서준이 절벽을 내려다보았다. “성의껏 발버둥 쳐봐라. 놀아는 주마.” 지옥이 강림했다. * “육, 팔, 십일, 십이 번 대, 전멸했습니다….” “…어이가 없군.” 조현은 흉흉한 눈으로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무림인들의 전쟁이 고수들의 승패로 판가름이 난다지만, 온갖 불리함을 안고서 이 짧은 시간에 네 개 대를 전멸시켰다? 심지어 육 번 대, 팔 번 대의 대주는 초절정의 고수들이다. “놈이…, 북해빙궁의 고수가 확실한가?” “예. 스스로 그리 밝혔을 뿐더러, 사용하는 무공 역시 빙백신공이 확실하다 합니다.” “사흑련 놈들이 정신이 나갔군. 감히 본교의 행사에 끼어들어?” 콰앙-! 조현이 탁상을 내리쳤다. “교에 전해라. 사흑련…, 아니지. 북해빙궁이 판에 끼어들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