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음….”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이다. 서준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문득 익숙한 무게감을 느꼈다. ‘이건….’ 가슴을 적당히 압박하는 무게와, 따끈따끈한 온기. 색색 옷 너머로 파고드는 숨결이 간지럽다. 서준은 슬쩍 고개를 들어 제 배를 내려다보았다. 춘봉이 서준의 배를 벤 채 침을 질질 흘리며 잠들어 있었다. “춘봉아.” “으음….” 춘봉이 잠꼬대를 하며 서준의 배에 파고들 듯 얼굴을 부빈다. 그런데 그 눈가가 발갛게 물든 채 퉁퉁 부었다. 서준은 퍼뜩 놀라 춘봉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번쩍 치켜들었다. “우리 춘부이 왜 울었어!” 꿈뻑-, 춘봉이 가물거리는 눈을 비빈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멍하니 서준을 바라보다가, 번쩍-! 그 커다란 눈을 부릅 떴다. “오빠…?” 춘봉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진다. 그녀는 크게 떴던 눈을 찔끔 감았다. 구슬 같은 눈물 방울이 뚝뚝 떨어져내린다. “오, 오빠아아….” 턱이 쭈글쭈글해진 춘봉이 잉잉대며 품에 안겨온다. 이건 또 보기 드문 일이었기에, 서준은 당황하면서도 품에 안긴 춘봉의 등을 토닥였다. “왜 그래. 응? 누가 괴롭혔어?” “나는, 크응….” “응. 우리 춘봉이는.” “오빠가 진짜, 잘못되는 줄 알고….” 서준의 품에 고개를 묻고 그의 가슴팍을 눈물로 적시던 춘봉은, 크응- 코를 훌쩍이며 꼬물꼬물 달라붙어 그에게 완전히 밀착했다. “아이고 우리 춘봉이.” 서준이 그녀를 둥기둥기 흔들며 나직이 말했다. “내가 왜 잘못 돼. 이 오빠는 목이 떨어져도 안 죽어요.” “그치만…. 내 눈앞에서 몸이 터졌는데…. 저, 정신 차려보니까 오빠는 또 기절해있고…. 나는, 또…. 또 잃는 줄 알아서….” 웅얼웅얼 대답하는 춘봉의 말을 들어보니 아무래도 그녀에게는 검신이 깃들어 있을 적의 기억이 없는 듯했다. 그러니까 눈앞에서 서준의 몸이 펑-! 하고 터졌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애가 골골대며 기절해있는 상황이라는 거다. ‘흠.’ 그건 확실히 빡세긴 하다. 안 그래도 이미 한 번 금가가 멸문당하며 가족을 잃었던 그녀다. 이번 일로 그날의 일을 다시금 떠올렸어도 이상하지 않다. 이거…, 아무래도 춘봉 멘탈 관리가 필요할 것 같았다. 달칵- 그때, 문이 열리며 남궁수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손에는 물수건과 미음이 담긴 그릇을 든 채였다. “서준아…!” 그녀는 서준이 일어나 있는 것을 보고 잰걸음으로 다가오더니, 포옥-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곁에 주저앉았다. “다행이다….” “뭐야. 나 혹시 한 달 정도 누워있었어?” “그런 건 아니고…. 하루 꼬박 정도?” “얼마 안 됐네?” 반응만 보면 몇 달 누워있었던 줄 알겠다. “원래 그 정도 누워 있어야 되는 부상이거든?” 남궁수아가 입술을 삐죽 내민 채 미음을 후후 불어 서준의 입가에 가져다댔다. “먹어 봐.” 서준은 군말 없이 미음을 받아먹었다. 맛이 썩 괜찮다. 남궁수아가 물었다. “간은 괜찮아?” “응. 누나가 만들었어?”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 남궁수아는 서준의 뺨을 한 번 쓸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일단 다른 분들께 말을 좀 전하고 올게. 다들 걱정하고 계셔.” “고마워.” “뭘. 남은 건 금 매가 먹여줄 수 있지?” “나 혼자 먹을 수 있는데.” “어허.” 남궁수아가 째릿 귀엽게 눈을 흘기고는 방을 나섰다. 서준은 입맛을 다시며 숟가락을 잡았다. 아니, 탁-! 춘봉이 재빨리 숟가락을 가로챘다. 그녀는 뭐라 꿍얼거리더니 숟가락 가득 미음을 퍼담아 후후 입김을 불어 식혔다. “…넌 움직이지 마.” “넹.” 얌전히 받아먹었다. * 시간이 지나 몇몇 사람들이 병문안을 왔다. 병문안이라기에는 상태가 지나치게 멀쩡했지만, 아무튼 며칠 정도는 안정을 취하라는 남궁수아의 엄명이 있었기에 서준은 잠자코 병문안을 받았다. “아이고 도련님…!’ 특히 천약당주 남궁영보는 온갖 영약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왔는데, 놀랍게도 그게 직권 남용이 아니었다. 제대로 허가를 받았다는 모양이다. 서준은 요상단(療傷丹, 내상을 치료하는 약)을 간식 대신 먹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니, 저 진짜 멀쩡하다니까요?” “그래도 며칠 간은 정말 안정을 취하셔야 됩니다.” 총관 진가위 역시 병문안을 왔다. 그는 서준에게 몇 번이고 안정을 취하라고 당부한 뒤,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도련님이 떠나계실 동안 신병이기들을 조금 구했습니다.” “네?” “대단한 물건을 구하지는 못했지만…, 몸이 나은 뒤 금주당에 한 번 들러주십시오.” 서준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신병이기라…. 말은 들어봤는데 직접 본 적은 없어서 그게 뭔지 궁금하긴 하다. 그렇게 한 차례 병문안 타임이 끝나고, 서준은 찌뿌둥한 몸을 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품에 안겨있던 춘봉이 자연스럽게 땅에 내려와 팔에 찰싹 달라붙었다. “씻으려고.” “응.” 서준이 걸음을 옮겼다. 춘봉도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씻는다니까?” “응.” “이걸 놔주셔야….” 서준이 팔을 빼려들자 춘봉의 눈가에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가지 마아….” “넹.” 씻는 건 포기했다. 어차피 서준의 경지쯤 되면 굳이 씻을 필요도 없긴 했다. 신체에서 나오는 노폐물이 거의 없다시피 하기에. 외부에서 묻은 먼지들 정도야 내공으로 한 번 털어내면 끝이다. 어느새 해가 져 어둑해진 방. 서준에게 얌전히 쉬라며 신신당부한 남궁수아도 제 거처로 돌아가고, 서준과 단둘이 남은 춘봉이 그에게 조금 더 찰싹 달라붙었다. “…오빠.” “응.” “계속 내 옆에 있을 거지?” 겁 먹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 보는 눈동자에 서준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지.” 어차피 춘봉이 말하지 않았어도 그러려 했다. 최소한 그녀가 바랄 때까지는. 언젠가 춘봉이 오빠라는 것을 거추장스럽게 느끼는 날이 올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상에야 그녀의 곁을 떠날 생각은 없었다. “쭉, 내 옆에만 있어야 돼.” “알았대도.” “영원히.” “너 나중에 보자. 오빠 싫다고 찡찡대기만 해봐.” 춘봉이 말없이 서준의 눈을 바라보았다. 섬뜩할 정도로 깊게 가라앉은 두 눈. 서준이 데굴 눈을 굴렸다. “…우리 춘부이는 그럴 일 없겠네.” “응. 맞아.” 춘봉이 서준을 꽉 끌어안았다. “내 거야.” 서준은 분위기를 읽고 얌전히 닥쳤다. * 다음날, 서준은 춘봉을 대롱대롱 매달고 방을 나섰다. 목적지는 가주전이었다. 하지만 서준이 가주전까지 가는 일은 없었다. 미리 기척을 읽었는지, 서준이 채 몇 걸음을 떼기도 전에 마중을 (좀 많이 멀리) 나온 남궁진천이 그를 이끌고 다시 서준의 방에 들어섰다. “아이고 장인어른! 진짜 덕분에 살았어요.” “그런 말 말게…. 내가 더 일찍 갔어야 했는데….” “에이, 검신 선배도 일 다 끝나고 왔는데요 뭘.” 춘봉과는 이미 어젯밤에 많은(진짜 많은) 대화를 나눴기에 그녀도 일이 어떻게 됐는지는 전부 알고 있었다. 서준은 남궁진천과 가벼운 대화를 나누다 문득 물었다. “그런데 그 시혈만천이라는 놈, 혹시 누군지 아세요?” “내가 갔을 때는 이미 상황이 끝나 있어서 잘 모르겠군….” “아차.” 생각해보니 가루가 되어 사라졌는데 장인어른이 알 턱이 없었다. “대신 종조부께서 하신 말씀이 있네….” “그 영감이요?” “그래…. 아무래도 사천당가의 무인 같다 하시더군….” 사천당가? 서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미친놈들인가? 혼원일월공 하나 날리고 올까요?” “그 시혈만천이라는 자가 당가 소속은 아닐 걸세…. 아마 과거에 몸을 담았던 것이겠지…. 이건 내 감에 불과하네만, 그 자가 몸 담은 단체가 따로 있을 걸세….” “아하.” “이 일은 내가 직접 알아보겠네…. 어쩌면 금가의 일과 엮여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남궁진천은 가만히 턱을 쓰다듬었다. 머리가 조금 복잡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남궁진천이 작게 숨을 내쉰 뒤 물었다. “그나저나 사위….” “네.” “그 자는 어떠했는가…?” “시혈만천이요?” “그렇네….” 서준이 잠시 고민했다. 고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세긴 했는데…, 전에 봤던 기련문주 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요?” “그런가…?” “네. 장인어른이랑 비교할 건 당연히 아니고요.” 빈말이 아니다. 당장 경지를 이루지는 않았지만, 한 번 화경과 비슷한 경지를 이뤘던 만큼 서준의 시야는 이전에 비해 확연히 넓어져 있었다. 당장 그때의 자신이 남궁진천과 싸운다? 서준은 삼 초(招)만 견뎌내도 스스로를 아주 장하게 여길 자신이 있었다. “그렇군…. 이상한 일은 아니네…. 실상 칠사흑문의 문주들은 화경 중에서도 뛰어난 이들이 대부분이지….” “하긴. 생각해보면 원래 있던 데서 잘 나갈 수 있는 놈이 굳이 이상한 단체에 몸 담을 필요는 없을 것 같긴 하네요.” 고개를 끄덕이던 서준은 문득 든 생각에 미간을 좁혔다. ‘아니지?’ 화경과 비슷한 수준이면 잘 나가는 놈이 맞는데? 시혈만천이 기련문주보다 떨어지는 것 같다고는 해도 그게 약하다는 말은 아니다. 그 정도 실력이면 정파에서 한 자리 차지하는 수준도 아니고 거의 왕처럼 살 수 있을 텐데, 왜 굳이? 서준은 고민하다 깔끔하게 포기했다. 요즘 하도 머리를 안 써서 그런가 고민을 10초 이상 이어가면 머리가 아팠다. “아무튼…. 이번 일로 느낀 게 있어요.” “느낀 점이라…?” “최근에 조금 안일하게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좀 빨리 강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더라고요.” “사위…. 자네는 이미 무림 역사상 가장 빠르게 강해지고 있네만….” “이미 저보다 오래 산 놈들이 수두룩하잖아요. 이 정도로는 부족해요. 최소한 화경. 그 정도는 돼야 뭐라도 될 것 같아요.” “으음…. 내가 도와줄 것이 있는가…?” “네. 조만간 마교로 건너갈 생각인데, 거기 정보… 켁…!” 춘봉에게 멱살이 잡혔다. 서준이 데굴 눈을 굴려 그녀를 보았다. 춘봉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어디 안 간다며.” “…라, 라고 할 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