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공(正功), 혹은 사공(邪功)으로 이루는 화경이라는 경지는 정기신 중 신의 비대를 통하여 주변 공간을 영역으로 삼는다.(이 또한 무공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나 보편적으로 그렇다.) 시혈만천의 경우 혈공(血功) 자체가 그런 것인지, 혹은 그가 익힌 무공이 특수한 것인지 몰라도 정기신 자체를 혈액(혹은 그러한 심상)에 녹여내어 또 다른 경지를 이루었다. 아마 극마 역시 여타 경지들과는 다른 점이 있을 터. 서준이 이룬 경지 역시 그러했다. 서준의 경우 신이 아닌 기의 비대를 통해 정과 신을 반쯤 합일시켜 새로운 경지를 이룩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 길만을 보았다. ‘왜 정기신 중에 굳이 신의 비대를 이루는지 알겠네.’ 신은 곧 정신이다. 영혼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의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한 신이 비대해질 경우 해당 경지의 무인은 스스로의 존재를 더욱 강하게 자각한다. 서준은 달랐다. 기의 비대를 이루자 신의 영향이 약해지며 자의식이 희미해졌다. 그런 까닭에 세상으로 환원되고자 하는 기의 성질에 따라 육신 자체가 흩어져버릴 뻔하기도 했다. 나중이라면 몰라도 지금 당장 그 미지의 경지에 완전히 발을 디딜 경우, 스스로의 존재가 흩어져 세상과 하나가 될 수도 있었다. 그 또한 어찌 보자면 더욱 위대한 존재로 거듭난다고 할 수 있겠으나…, 최소한 서준은 그런 일을 원하지 않았다. ‘가끔 쓰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긴 한데.’ 지금 당장도 자신을 초절정이라 칭하기에는 애매하다. 마인화를 쓰지 않고도 화경 초입 정도는 비벼볼 수 있을 것 같긴 하지만…. 서준이 바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완전한 경지에 오르는 것. 그래야만 더욱 높은 곳에 다다를 수 있다. “그러면 제가 화경에 오르려면 뭐가 더 필요한 것 같아요?” 그런 까닭에 한 질문이었다. 그리고 검신은 일말의 고민조차 없이 답했다. “시간.” “시간이요?” “그래. 네게는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보아하니 무공을 익힌 지 20년쯤 된 것 같은데, 재능이라는 것이 경지에 오르는 시간을 줄여준다고는 하나 아예 그것을 영으로 만들 수는 없다. 과실이 익는 데 시간이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지.” 20년은 아니고 2년쯤 되긴 했는데. 이 사람 믿어도 되는 건가? 서준이 턱을 긁적이자 검신이 덧붙였다. “신이 무르익는 데 필요한 시간. 네가 화경에 이르기 위해 부족한 것은 그뿐이다. 뭐, 내 보기에는 화경보다 극마를 이루는 쪽이 빠를 것 같지만.” “극마요?” “그래. 화경과 달리 극마는 정기신 자체를 마로 물들여 하나로 묶어낸다. 그리하여 정기신이 마로 화하니 마의 극이라, 극마라 칭하는 것이지.” 서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춘봉이 할아버지…?” “그냥 선배라 불러라.” “아, 네. 선배는 정파 쪽 고수 아니에요?” 그런데 후배한테 극마를 추천해주고 그래도 되나? 서준의 질문에 검신이 허허 웃었다. “정사마를 가려서 뭐 하나. 다 애들 소꿉장난이지. 내 보기에는 다 똑같다.” “아하….” 서준이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검신이 물었다. “네가 무공을 익히는 이유가 무엇이냐?” “이유요?” 이유가 있었던가? 뒷골목 시절에는 반쯤 살기 위해 익힌 것에 가깝고, 지금에 와서는 재미도 있거니와 무공에 재능이 있어 이 길을 택했다. 그리고 또…. “힘은 중요하니까요. 오늘만 해도 제가 약했으면…, 뭐. 아주 좆같았을 테고.” “그렇군.” “네. 그래서 이유는 왜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다.” “아, 예.” 검신이 웃었다. “지금의 마음을 잊지 마라. 훗날 도움이 될 테니.” “옙.” “슬슬 시간이 됐군.” 검신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듯 눈가를 좁힌 그는, 이내 하늘 높은 곳에 걸린 태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건 선물이다.”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서준이 재빨리 기절한 남궁혁의 옆구리를 콱콱 걷어찼다. “허억…!” 남궁혁이 기겁하며 일어났다. 아직 내상이 남아있었지만 뭔진 몰라도 지금 일어날 일을 놓치면 남궁혁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검신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검지를 뻗어 좌에서 우로 기다란 선을 그었다. ────────────── 오싹-! 서준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허나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던 그때, 문득 세상이 조금 어두워졌다. “어…?” 서준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태양이 절반으로 쪼개져 떨어져내린다. “뭔 씹….” 사일 같은 것과는 본질부터 다르다. 스스로의 심상 속 태양에 구멍을 뚫은 것이 아니다. 실재하는 태양이 반으로 잘렸다. 반으로 잘린 태양은 천천히 떨어지며 부서져내렸다. 태양이 흩어질 때마다 세상이 조금씩 어두워진다. 결국 태양이 완전히 스러졌을 때, 세상은 완전한 어둠에 잠겼다. “좆됐네.” 이제 빙하기 시작인가? 춘봉이는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설탕물 묻혀서 밖에 두면 바로 빙탕호로 뚝딱이겠네. 서준이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보자 검신이 껄껄 웃었다. “뭐, 너무 놀랄 것 없다.” 검신이 손을 휘젓자 일순 세계가 깜빡였다. 영상의 일부를 짜깁기한 듯 순식간에 밝아진 세상 속, 태양은 여전히 하늘에 떠있었다. “와오.” 뭐 어떻게 한 건진 몰라도 대단하긴 하다. 서준이 짝짝 박수쳤다. “환검이에요?” “아니. 태양이라는 개념을 벤 것이다.” “뭐요?” “심검(心劍)의 일종이지.” 검신의 목소리가 점점 흐릿해진다. 서준이 물었다. “혹시 진짜 태양도 벨 수 있어요?” “안 될 것 없지. 하늘이 허락한다면.” “아니….” 하늘이 도대체 뭐 하는 놈이길래? 어떻게 태양조차 벨 수 있다 단언하는 검신을 억제할 수 있다는 말인가.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다.” 검신이 웃었다. “또 보자꾸나. 어쩌면 네가 선계에 오는 것이 더 빠를지도 모르겠어.” 그 말을 끝으로 검신의 존재감이 사라졌다. 춘봉의 몸이 쓰러진다. 서준은 즉시 그녀를 붙잡아 가슴에 귀를 가져다댔다. 쿵, 쿵, 심장은 멀쩡히 뛴다. 호흡도 정상이고, 내공의 흐름 역시 이상 없다. 스으- 피유…. 호흡 패턴 역시 춘봉의 것과 일치하니 일단은 걱정을 놓을 수 있을 듯했다. “하아…. 깜짝 놀랐네.” 서준은 춘봉을 품에 안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시체는 여전히 시체였고, 살아있는 사람들은 조금 멍해 보이긴 해도 멀쩡하다. “커헉…!” 남궁혁이 또 피를 토하며 쓰러지긴 했지만, 저건 오히려 기연이라 할 수 있다. 마음만 꺾이지 않는다면 내상을 치료한 뒤 깨달음을 갈무리할 수 있을 터. 서준 역시 검신이 보여준 한 수를 기억에 잘 새겨넣었다. 분명 도움이 될 것이었다. 얼추 일이 마무리된 느낌에 서준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서준에게 조심스레 다가온 남궁수아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서준아.” “응?” 남궁수아의 낯이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얗다. 서준은 문득 스스로의 상태를 살폈다. 일단 팔이 여섯 개. 머리에는 뿔. “엇.” 서준은 즉시 뿔과 잉여 팔 네 개를 뚝 떼어내 저 멀리 던져버렸다. 혈공을 대강 베낀 덕분에 그 과정이 상당히 깔끔했다. 하지만 남궁수아의 안색은 더욱 안 좋아졌다. “아….” 비틀대던 그녀가 서준의 품에 쓰러졌다. 그녀는 쌕쌕 숨을 몰아쉬더니, 작게 속삭였다. “다행이야…. 무사해서….” 그 말을 끝으로 남궁수아가 의식을 잃었다. “누나?” 깜짝 놀란 서준이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상태는 멀쩡했다. 그냥 기절한 것 같았다. “어휴, 이게 뭔 일이야 진짜.” 서준이 지친 몸을 이끌고 반쯤 부서진 마차에 춘봉과 남궁수아를 눕히자 장극이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주군이 인간 같지 않다지만 사람의 마음은 잊으면 아니되오.” “거 아재요, 왜 또 헛소리야.” 패진광이 합세했다. “헛소리는. 난 이제 슬슬 네가 사람 새끼가 맞는지 아닌지도 헷갈린다.” “아니, 하고 싶으면 헬리콥터도 될 수 있는 세상에 그게 뭔 소리예요? 내가 인간이라 생각하면 인간인 거지.” “헬리, 뭐?” “아차. 여기는 아니구나.” 서준이 낄낄 웃으며 힘없이 마차 벽에 기댔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곧 죽을 것 같았다. “아…. 남궁세가까지 언제 가냐.” “걱정 말게….” “어?” 서준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방금까지 없던 사람이 하나 추가되어 있었다. “장인어른?” “무슨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었던 모양이군…. 고생 많았네, 사위….” 남궁진천이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시신들과 마차의 파편 따위가 저절로 움직이며 착착 정리되었다.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누군가 태양을 베었기에 와봤지…. 검식 자체가 황운신검에 가까웠는데…. 혹시 사위가 그랬나…?” “아뇨. 검신이 그랬죠.” “검신 선배가…? 그렇군….” 남궁진천은 의외로 간단히 납득했다. 하지만 서준은 아니었다. “아니, 근데 그게 거기서도 보였어요?” “당연한 일이네…. 중원의 모두가 보았겠지…. 느닷없이 태양이 베여 떨어지는데 그걸 누가 보지 못했겠나….” 그게 여기 있는 사람들의 인식을 베어내거나 그런 게 아니었다고? “쉣.” 말도 안 되는 신위다. 서준이 혀를 내둘렀다. 그때, 황금색 빛덩어리 하나가 순식간에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소림의 방장 덕성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그는 당황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남궁진천과 짧게 대화를 나누었다. 방장은 상황을 파악하고자 하는 듯했으나, 남궁진천은 고개를 저었다. “얘기는 나중에 하는 게 좋겠소….” 남궁진천의 손짓에 서준 일행과 마차가 둥실 떠오른다. ‘어이가 없네.’ 화경 비슷한 경지를 찍먹해본 입장에서 봐도 말도 안 되는 수준의 허공섭물이다. “우선 쉬고들 있게…. 세가까지 얼마 걸리지 않을 걸세….” 역시 우리 장인어른. 서준은 든든함을 느끼며 무겁게 내려앉으려는 눈꺼풀에 주고 있던 힘을 풀었다. 순식간에 의식이 저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다. ‘극마라….’ 서준은 멍하니 생각했다.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다고? 무려 그 검신의 조언이었지만, 서준은 동의하지 않았다. 무공을 익힌 시간도 몰라보는 사짜 아닌가. 눈앞에서 볼 수만 있다면, 화경은 몰라도 극마는 금방이라도 닿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서준은 몽롱한 의식으로 되새겼다. 앞으로 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 만큼, 힘이 필요하다. 소중한 것을 잠자코 내어줄 생각 따위 추호도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준의 의식이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