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비밀스러운 이야기지만, 춘봉은 사실 연애소설을 즐겨 읽었다. 아직까지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그녀만의 비밀이었다. 연애소설이라는 것은, 사실 그 구성이 뻔하다.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 곁가지로 어떤 이야기를 넣건 그 본질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춘봉은 그걸 좋아했다. 어찌 되었건 결말에서는 두 사람이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기에. (간혹 이상한 결말을 내는 작가도 있긴 하지만 그럴 때는 57000자 정도 되는 장문의 편지를 보내고 나면 어느 정도 그 찜찜함을 잊을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춘봉은 이론적으로 연애에 대해서는 초절정의 경지에 올랐다 할 수 있었다. 당연히 연애의 기본적인 진도에 대해서도 빠삭하다. 만남 따위의 앞부분은 모조리 건너뛰고, 지금 춘봉의 상황에서 적용할 수 있는 부분들. 그러니까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때. 그때는 열에 여섯 정도 되는 소설들이 비슷한 방식을 채용한다. 고요한 밤, 은은한 달빛 아래 수줍은 입맞춤…. ‘그래, 난 전문가야.’ 비록 지금이 밤이 아닌 낮이라 해도, 큰 가지는 다를 게 없다. 춘봉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물론 두려웠다. 인생은 소설이 아니니까. 중간에 덮고 다른 걸 읽으면 되는 소설과 달리, 인생은 중간에 덮는 일 따위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그보다도 애타는 갈망이 그녀의 마음을 부채질했다. 용봉지회 우승과 더불어 점점 나아지는 상황, 풍족해지는 마음은 그 갈망 위로 기름을 부었다. 부족하던 요소들이 점차 채워지며 이제 슬슬 남녀상열지사에 대한 열망이 고개를 번쩍 치켜든 것이다. 더욱이 요즘 들어 춘봉의 자존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숨만 쉬어도 날아드는 서준의 칭찬 세례는 춘봉 스스로 자신의 귀여움에 대해 깊이 깨닫도록 했다. “이제 금가를 재건할 여건도 대충 갖췄고…, 경지도 높아져서 어디서 맞고 다닐 일도 없고….” “그렇지?” “근데 가문이라는 게, 필수 요소가 있잖아…?” 물론 여전히 겁많은 춘봉이었기에, 최초의 목적은 차마 입에 담지 못했다. 가문의 필수 요소. 그러니까 가정(家庭). 우리 아이나 하나 낳을까? 하는 말…. “그러니까 그….” “그?” “그, 왜. 있잖아.” “뭐가?” “아이…, 잇 씻팔…!” 이럴 거라 생각했다. ‘내가 그렇지 뭐.’ 겁만 많은 스스로를 질책하면서도, 춘봉은 한 발짝 나아갔다. “눈 감아봐!” 빼액 소리치자 서준이 눈을 감았다. ‘말은 또 잘 들어요.’ 원래 이렇다. 해달라는 건 다 해준다. 그런 그를 보며 춘봉은 다짐했다. ─앞으로 평생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게 해주겠다고. 손에 묻히는 건 빙탕호로의 녹은 설탕물만으로 충분하게 해주겠다고. 쪽- 입술과 입술의 접촉. 공기를 빨아들이며 나는 작은 소리. 묘하게 부드러운 감각과, 얇은 점막 사이로 오가는 체온. 나열해놓고 보면 별것 아닌 자극에 춘봉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몸이 둥실 떠오르는 듯한 기분. 춘봉은 헤실헤실 웃다가, 번쩍 뜨인 서준의 눈과 마주쳤다. “아.” “어?” “으, 으끼야아아악…!” 춘봉은 온몸이 베베 꼬이는 부끄러움과, 혹시 모른다는 두려움에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뽀, 뽀뽀도 했으니까 이제 연인인가?’ 그게 아니더라도 이제 자신을 보는 눈이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희망찬 미래를 상상하며. 홀로 남은 서준만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 춘봉이 도망친 자리, 홀로 남은 서준은 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춘부이 뽀뽀….” 춘봉이 눈을 감으라 하긴 했지만, 초절정쯤 되면 눈을 감아도 눈앞의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지기 마련이다. 눈을 찔끔 감은 춘봉. 파르르 몸을 떨며 다가와, 코앞에서 머뭇머뭇. 그러다 후욱- 입술에 와닿는 따스한 콧김과, 꽉 오므린 채 삐죽 내민 입술이 쪽- 맞닿는 순간. “미친 효도 머신 금춘봉….” 순식간에 한계치를 뚫고 하늘 높이 날아가버린 도파민 수치에 서준은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방에 틀어박혔다. 느낌이 왔다. 무조건 지금이다. 직감에 따라 목함을 열어 대환단을 꺼낸 뒤 곧장 입에 털어넣었다. 대환단이라는 이름과 달리 크기 자체는 다른 단환들과 비슷하다. 혀에 닿는 순간 녹아내리는 대환단을 곧장 꿀꺽 삼키니, 화한 느낌과 함께 막대한 양의 기가 서준의 전신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흠.’ 물론 그래봤자 기다. 서준이 뜻을 세우자 곧장 말 잘 듣는 개가 된 대환단의 기가 얌전히 체내를 순환하며 단전에 깃들었다. 하지만 대환단은 단순한 기 덩어리가 아니다. 기 자체는 중도의 성향을 띠고 있지만, 내부에 깃든 묘한 이치는 심오한 불가의 가르침을 따른다. 너울너울 퍼져나가는 이 깨달음을 잡는 것이 곧 대환단을 완벽히 소화해내는 것이요, 내공을 늘리는 데서 그친다면 대환단은 그냥 흔한(다만 내공 증진이 좀 많이 되는) 영약에 지나지 않는다. 서준은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체내의 대환단을 관조했다. 잔잔한 연못에 물방울을 떨어뜨린 듯 작게 퍼져나가는 파동. 서준이 그것에 관심을 기울이자, 체내의 모든 내공이 그의 뜻에 따라 대환단의 이치를 재현했다. 자유롭게 흐르던 내공의 흐름이 고요해지고, 내공의 고요함이 마음까지 이어져 평온을 가져온다. 일순 지끈거리는 두통과 함께 화한 상쾌함이 머리를 시원하게 맴돌았다. “아….” 서준이 번쩍 눈을 떴다. 세상이 맑다. 하루 온종일 마음을 어지럽히던 충동들은 온데간데없고, 자극을 찾아 헤매던 심상 속 만물들은 명경지수를 유지하며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서준은 황금빛 정광이 도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대환단에 깃든 불가의 가르침은 명경지수와 무소유. 그 끝에 인간으로서의 오욕칠정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신으로서 거듭나는 길이 보였다. “내가 왜?” 째앵-!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명경지수가 한순간에 깨어졌다. 서준은 찝찝함에 몸서리치며 괜히 입에 남은 대환단의 향을 후후 불어냈다. ‘으…, 극혐.’ 이거였구나. 왜 그동안 불가의 내공이 그토록 꺼림칙했는지 깨달았다. 애초에 그들이 걷고자 하는 길은 서준과 완전히 대비된다. 오욕칠정을 벗어던져? 그런 미친짓은 할 생각이 없다. 그 좋은 걸 왜 버린단 말인가? 불가 내에서도 여러 깨달음이 있겠으나, 이쪽 길을 걷는 친구들과는 상종조차 할 수 없을 듯했다. 춘부이 볼따구를 만져도, 심지어는 춘봉 뽀뽀를 받아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정신적 고자 같은 놈들 같으니…. 그 외에도 한 가지. ‘이걸 심마…, 라고 해야 하나?’ 잠시 맑은 정신을 유지해보니 알겠다. 지금 자신의 상태가 아주 정상은 아니다. 아니, 정상이 맞긴 한데…. 이게 참 애매하다. 명경지수의 상태로 자신의 행적을 돌아보니 도대체 왜 저렇게 사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들면서도, 원래 자신의 성격이 그랬으니 오히려 이게 정상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요점만 말하자면 그냥 평소에 머리가 반쯤 돌아있는 거 아닌가? 라는 거다. ‘확실히 평범하지는 않지.’ 잠시 고민했으나, 이내 서준은 신경을 껐다. 평소에 별 문제 없으면 된 거지. 사람이 좀 미친 것처럼 살아도 별 문제 없으면 만사 오케이다. “히히, 우리 춘부이 보러 가야지.”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또 뽀뽀 해주려나? * 시혈만천은 수하 몇을 데리고 하남 인근의 인적 드문 산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의 목적은 신혈. 가능하다면 모든 목격자를 지우는 것이 최선이지만, 설령 그러지 못한다 할지라도 신혈만은 세상에서 지워내야 했다. 경험 많은 노고수 시혈만천은 정보의 중요성을 알았다. 그는 동지의 정보에 모든 것을 의존하는 대신 스스로 강호에 풀린 정보들을 구했다. 신혈의 보유자는 회룡봉 금희. 신검금가의 후계자이며 경지는 절정경. 무력적으로는 신경을 꺼도 된다. 절정경은 자신에게 그 어떠한 영향도 끼칠 수 없다. 다음으로, 가장 경계해야 할 인물은 권왕 패진광. 시혈만천은 그를 직접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시혈만천이 강호에서 활동할 때에도 몇 번 이름을 들었던 만큼 주의해야 할 상대임은 분명했다. 살아온 시간은 곧 쌓아온 힘의 깊이. 자세히는 몰라도 패진광의 저력은 분명 대단할 것이었다. 그 다음은 창천대해 남궁혁. 남궁세가의 전대 고수로, 그 무력에 대해서는 자세한 정보가 없다. 하지만 추측하기로 아직 화경까지는 아니다. 주의해야함은 분명하지만, 권왕보다는 그 급이 낮았다. 다음은 전 녹림총채주 장극. 피라미다. 초절정이지만 대단할 건 없다. 시혈만천은 그에게서 신경을 껐다. 마지막, 진기재천 이서준. 기공을 즐겨 사용하는 초절정 고수이자, 황실의 대장군을 압도한 신진 고수. 어느 정도 경계해야 함이 마땅하나, 이번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강호에서 경지를 나누는 기준은 곧 기를 다루는 수준이다. 그런 만큼 다른 무인이라면 몰라도 기공을 쓰는 이들의 경우 그 무력과 경지가 어느 정도 비례한다. 더욱이 기공사가 화경에 오를 경우, 아예 상대의 기공 자체를 무력화시키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이 가능했다. 사실상 천적에 가까운 셈이다. ‘진기재천과 총채주는 동시에 상대하더라도 아무런 부담이 없을 것이고…, 창천대해와 권왕까지 끼어든다면 조금 애매하군.’ 다른 것보다도 권왕이 부담스럽다. 그렇다면 일단 아랫것들을 써서 권왕을 붙잡은 후, 빠르게 진기재천과 총채주를 정리한 뒤 모조리 일망타진하는 것이 최선일 터. “그래, 놈들이 곧 하남을 떠날 것 같다고?” “그렇다 하지 않았수. 됐으니 빨리 돈이나 주쇼. 괜히 꼬투리 잡혔다가는 나도…, 커읍…!?” 하남 내부의 정보를 가져온 하오문의 사내가 입에서 피를 쏟아내며 절명했다. 겉보기로는 아무런 상처도 없으나, 내부의 혈액이 역류하며 즉사한 것이다. “건방진 놈.” 시혈만천은 혀를 차며 사내의 시체 위에 돈주머니를 던졌다. 이내 임시로 머무는 거처에 돌아와 수하들에게 명했다. “가자. 놈들이 곧 돼지 우리 밖으로 고개를 내밀 것이다.” 신혈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