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준은 마인의 시체를 내버려둔 채 자리를 떠났다. 마인은 처리해뒀으니 뒷처리 정도야 도시의 무인들이 알아서 할 수 있리라는 생각이었다. 이후 그는 하오문에서 얻은 지도를 토대로 일대를 쏘다녔다. 지도에는 총 6곳의 장소가 표시되어 있었는데, 그 중 4군데서 마인들을 찾을 수 있었다. 역시 하오문. 타율이 꽤 좋다. 그 모든 일이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당장 생각해둔 일이 모두 끝나자 서준은 고민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진짜 뭐지?’ 이번에 마주친 총 4명의 마인들은 모두 절정 이하의 잔챙이들. 하지만 아무리 잡것이라 해도 서준에게 말 한마디로 사람을 조종하는 능력 따위는 없었다. 허나 그들은 서준의 말에 강제성이라도 있는 듯 자살하라는 명령조차 저항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연히 마인이라는 특이성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는 가정을 세울 수 있다. 물론 이전에도 비슷한 짓은 한 적이 있다. 사람을 붙잡아 뇌를 마기에 절인 뒤 자백을 받아내는 것. 몇 번 써먹긴 했으나, 그것과 이건 다르다. 그건 마기로 의식 대부분을 표백시켜 질문이라는 트리거에 알맞는 대답을 이끌어내는 방식이다. 이번처럼 무슨 언령이라도 되는 것마냥 써먹을 수 있는 방식이 아니다. ‘이건 조금 더 알아보긴 해야겠네.’ 결론을 내렸다. 춘봉이에게 빨리 돌아간다고 하긴 했지만, 예상보다도 일이 훨씬 빨리 끝났다. 여유 시간이 생겼으니 그동안 마인을 몇 마리 더 잡아서 실험해도 될 것 같다. 겸사겸사 뉴 혼원신공의 실험도 해보고. * 뉴 혼원신공. 말은 거창하지만 별건 아니다. 이번에 마인들을 족치며 아주 손쉽게 그들의 무공을 강탈할 수 있었는데, 그들의 심법 전부가 내공을 역방향으로 운용하는 역류의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것이 수준 낮은 마공이라 그런 것인지, 혹은 대부분의 마공이 그런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인지는 아직 모른다. 서준의 경우 그런 방식을 취하지 않아도 마기를 만드는 일 정도야 어렵지 않았기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아무튼 마공 계열의 심법을 얻지 않았는가. 추후 노리는 경지가 극마와 화경의 중도이니만큼, 혼원신공 역시 그에 따라 변할 필요가 있었다. ‘뭐더라. 양자 중첩이라 했던가?’ 서준은 가물가물한 기억에 의지해 뉴 혼원신공의 토대를 세웠다. 대충 양자 상태를 측정할 때 여러 결과 상태가 이미 확률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인데, 제대로 기억이 나진 않아서 모티브만 따왔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예로 들 수 있다. 이 상자 안의 고양이가 죽었을까 살았을까? 상자를 열어보기 전에는 고양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방법이 없다. 그 두 결과에 대한 확률이 동시에 존재하고, 상자를 열어 관측함으로써 고양이의 상태가 확정된다는 것인데─ 뉴 혼원신공의 묘리가 그러했다. 여기서 관측자는 당연히 서준 자신. 기(氣)라는 것은 실재하면서도 실재하지 않으므로, 서준은 혼원신공의 운기 경로만을 확정지은 채 운기 방향을 확정하지 않았다. 이때 운기 방향은 파동 그래프로 나타낼 수 있…, 는 건 개소리고. 그냥 내공이 동시에 정(正)으로도 흐르고 역(逆)으로도 흐른다는 소리다. 언제든 서준이 바랄 때 그 방향을 확정지을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 채. 한마디로 ‘내 좆대로 좆대로 무공’이라 할 수 있겠다. ‘쉽네.’ 서준이 눈을 떴을 때는 은은한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밤을 샜음에도 컨디션은 어느 때보다 좋다. 서준은 나무 위에서 내려왔다. 어젯밤 적당히 가지 위에 걸터앉아 운기조식과 동시에 뉴 혼원신공을 창시한 까닭이다. 솔직한 말로 뉴 혼원신공에 큰 의미는 없었다. 서준은 운기 경로 따위에 구애받지 않고 마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럼에도 굳이 뉴 혼원신공을 만들어낸 이유는 별게 아니었다. 이후, 극마와 화경 사이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더 좋은 마공 하나 얻으면 다시 조정하면 되지.’ 어려운 일도 아니다. 서준은 개운하게 기지개를 한 번 켠 뒤 오늘의 계획을 정리했다. 1. 기감을 펼친 채 혼원보로 열심히 돌아다닌다. 2. 기감에 마기가 걸리면 바로 가정 방문 실시. 3. 대충 결과가 나오면 하남으로 돌아가 춘부이 볼따구를 주무른다. 완벽한 계획이다. “렛츠 고.” 플라잉 서준이 강호를 쏘다녔다. * 잠시 잊고 있었다. 이 미친 중원. 과장 하나 없이 진짜 미친듯이 넓다. 양민들이 중원 전체를 여행하려면 수명 전체를 써도 모자를 게 분명했다. 온갖 위험 요소를 감수할 수 있는 커다란 간덩이는 둘째 치더라도…. 서준은 섬서와 감숙, 녕하를 사흘 간 잠 한 숨 안 자고 뒤진 끝에 겨우 마기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다. 감숙의 서쪽, 사흑련의 영역과 가까운 곳이었는데, 이게 또 은근히 마교와도 가까운 위치다. 물론 마교의 본거지인 천산은 터무니없이 멀리 있다지만, 일단 곤륜파가 있는 청해와는 거의 맞붙다시피 하는 곳이다. “럭키.” 대신 그동안 쏘다닌 보상이라도 되는 걸까? 마기의 흔적으로 보아하니 마인 하나 달랑 있는 곳은 아니다. 최소 셋. 이거 잘하면 실험체를 넉넉히 장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준은 우선 역용술을 사용해 얼굴을 바꿨다. 중년 간지 천서준의 얼굴이다. 물론 아직 정파의 영역이니만큼 당당히 마기를 드러내는 미친짓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들어선 현의 이름은 고랑현(古浪縣). 당당히 고랑현에 들어선 서준은 마기의 흔적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뭐지?’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절정 이하의 잡것들은 마기를 감추는 것에 능숙하지 못한데, 예상 이상으로 사방팔방을 쏘다닌 흔적이 가득하다. 어느 정도 수준이 있는 무인이라면 눈치를 못 채는 게 이상한 수준이다. 그리고 그 중 하나의 흔적이 향하는 곳은 고랑현에서 가장 거대해보이는 문파 내부. 미간을 찌푸린 서준은 월하무영을 펼쳐 그림자 속에 녹아들었다. 문파 정문의 현판에는 힘이 넘치는 필체로 ‘정현문(正玄門)’이라는 글씨가 적혀있었다. 서준은 은밀히 그 내부로 잠입해 정현문을 쏘다녔다. “자네, 오늘 수련이 끝나면 술 한 잔 해야지.” “그거 좋지! 이번에는 자네가 사는 거겠지?” “흠…. 내가 지금 돈이 없는데….” “끄응…. 그러면 다음에 사게. 이번에는 내가 사지.” “하하! 고맙네!” 마기의 흔적이 있는 것치고는 평범한 문파와 다를 것이 없다. 딱 적당히 자그마한 도시에 있을 법한, 적당히 커다란 문파의 모습이다. 서준은 의문을 품은 채 마기의 흔적을 따라갔다. 마기의 흔적은 문파의 깊숙한 곳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문주가 머무는 곳으로 보이는 나름 장엄한 건물까지. ‘뭐지? 문주가 마공이라도 익혔나?’ 마공을 익혔다고 때려죽일 생각은 없다. 뭐, 마공쯤이야 익힐 수도 있지. 사실 그렇게 따지면 서준은 당장 무림공적 리스트에 이름을 올려도 이상할 게 없었다. 서준은 우선 문주전 내부에 들어섰다. 내부는 휑했다. 사람의 흔적은 있는데, 보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서준의 기감은 이 밑에 숨겨진 공간이 있음을 알아챘다. ‘비밀 공간 정도야…. 있을 수도 있지.’ 서준은 열린 마인드로 비밀 공간의 입구를 찾아 헤맸다. 물론 못 찾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입구는 찾았는데, 그 입구를 열 방법은 전혀 모르겠다. 결국 만능 열쇠를 쓰는 수밖에 없었다. 스릉- 검을 뽑아든 서준이 비밀 공간과 이어지는 바닥을 깔끔하게 잘라냈다. ‘좋았쓰.’ 아주 깔끔하다. 이건 잘만 끼워두면 당장 들키지는 않는다. 나중에 발각되기야 하겠지만…, 그때 자신은 여기 없을 테니 상관 없다. 비밀 공간 내부에 들어선 서준은 잘라낸 바닥을 그 자리에 조심스레 끼워맞췄다. 달칵, 빛이 차단되며 내부가 빛 하나 없는 어둠에 잠겼다. 서준은 눈에 내공을 불어넣어 안력을 돋웠다. 어둠 속이 환한 대낮처럼 밝아졌다. 저 안쪽에서 사람의 기척이 느껴진다. 서준은 월하무영을 유지한 채 은밀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곧 자그맣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 언제라고?” “곧이다. 천마께서 강림하시는 그때, 중원은 마도천하를 이룰 것이다.” “마도천하에는 관심 없다. 물건은?” “불경한 놈 같으니.” 서준은 말소리가 들리는 곳을 유심히 살폈다. 정파 특유의 정순한 기운이 느껴지는 사내가 하나, 거친 마기가 느껴지는 마인이 하나. 놀랍게도 마인의 경지는 절정의 끄트머리쯤 되었다. 잘은 몰라도 저 정도면 아주 잔챙이는 아니다. “물건은 지금 가지고 있다. 네놈이야말로 말한 건 준비해뒀나?” “그래.” 정파의 사내가 벽의 특정한 부분을 두드렸다. 쿠구궁-! 비밀 공간이 작게 진동하며 벽이 열렸다. 열린 벽 내부에는 자그마한 방이 하나 있었다. 그 방 내부, 열 명쯤 되는 사람들이 사지가 결박당한 채 몸을 꿈틀대고 있다. 기감으로 대략 파악하고 있던 서준은 혀를 찼다. “이거 간첩 새끼였구만?” 느닷없는 목소리에 두 사내가 크게 놀랐다. 정파의 사내는 당황한 듯 멈칫했지만, 마인은 달랐다. 곧장 소매를 휘두르니 그 안에서 십수 개의 단검이 날아들었다. 쉬쉬쉭-! 서준은 아무렇지도 않게 오른손을 내밀어 지그시 아래로 내리눌렀다. 쿠웅-! 흑수대마장(黑手大魔掌)이 펼쳐지며 거대한 손바닥이 단검을 모조리 바닥에 찍어눌렀다. “마공…!” 놀란 마인이 경계하는 눈빛으로 서준을 쏘아보았다. 서준은 우선 마기를 거뒀다. 대신하여 빙백신공을 운용하며 말했다. “오른팔을 잘라라.” 마인이 멈칫한다. 하지만 따르려는 기색은 없었다. 이번에는 서준이 빙백신공의 운용을 멈추고 혼원신공을 운용하며 마기를 피워올렸다. “마지막으로 말하마. 오른팔을 잘라라.” 마인의 몸이 부르르 떨린다. 덜덜 떨리는 왼팔이 움직일 듯 말 듯 꿈틀댄다. ‘역시 마기와 관련된 건 맞는 것 같고.’ 상대의 경지가 높아질수록 잘 통하지 않는 것 역시 확실해보였다. 절정 끄트머리쯤 되면 꽤 저항할 수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저항하는 데 모든 심력을 소모하고 있으니…… 콰직-! 서준이 가볍게 펼친 일수에 마인의 사지가 날아갔다. 피할 수 있을 정도의 속도였으나, 서준의 명에 저항하느라 피하지 못한 것이다. “아아악…!” 마인이 비명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