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그래, 검술을 그냥 넘기자라….” 남궁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유는?” “저 무공 배운 지 얼마 안 돼서 검술 잘 못 해요.” 초절정 씩이나 되는 놈이 뭐가 어째? 남궁혁은 오만가지 말들을 가슴 속에 꾹꾹 눌러담은 채 겉으로나마 가까스로 평온을 유지했다. “그래, 무공을 언제 배웠길래 그런 망언…, 아니, 말을 하는가.” “이 년 정도?” “…검을 이 년 전에 잡았다고?” “아뇨. 무공을 이 년 전에 배웠다니까요?” 남궁혁이 제 귀를 툭툭 두드렸다. “이십 년?” “이 년.” 이번에는 남궁진천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 년. 그래. 정말로 이 년이란 말이지…. 그게 말이 되나? 아무리 시간이 흘렀어도 그렇지, 자신의 상식마저 부정당할 정도로 세상이 바뀌었단 말인가? 하지만 다행이라 해야 할지 아직 그 정도는 아닌 모양이었다. “이 년? 도련님이 무공을 익힌 지 이 년밖에 안 됐다고?”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않겠나?” “지금 도련님께서 그러셨잖아.” “남궁의 무공을 익힌 게 이 년 전이라는 거 아닌가?” “도련님이 세가에 오신 지 일 년이 채 안 됐는데 무슨 소린가.” 세가의 인원들마저 혼란에 빠져 술렁인다. 남궁혁은 그냥 받아들였다. 이미 신공을 창시했니, 연단의 천재니 하는 말들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뭐가 더 나와도 놀랍진 않았다. 아니, 놀랍긴 한데. 어떻게든 받아들일 수는 있었다. “그렇단 말이지….” 남궁혁의 눈이 빛났다. 저 말이 진실이라면, 한층 더 확실해진다. 저놈은 무조건 잡아야 된다. 남궁세가가 천하제일세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 세월을 감안해 판단토록 하지.” “아뇨, 그냥 무공부터 하고 싶은데요.” “…그러면 그리 하거라.” 남궁혁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서준은 그런 남궁혁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아무래도 무공을 보려면 상대가 있는 게 낫겠죠?” “…그렇지.” “원로님이 자격을 판단하시니, 원로님과 대련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서준의 기감에 느껴지기로 남궁혁은 화경에 가깝다. 그렇다고 온전한 화경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은데, 초절정이라 하자니 조금 애매한 듯한 느낌이 있다. 딱 사이에 발을 걸치고 있는 느낌에 가깝다 할 수 있겠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원래 경지라는 것이 그렇게 딱딱 나눠떨어지는 것이 아니니까. 무림의 보편적인 기준이 있을 뿐, 세세하게 따지자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경지의 구분이 생길 터였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패진광이다. 패력괴신무의 경지를 보편적인 경지로 치환하면 그의 경지가 대충 저쯤 된다. 굳이 따지자면 남궁혁이 조금 더 높겠고. 물론 패진광과 남궁혁이 싸웠을 때 누가 이길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본 원로와 대련을?” “네. 가주님도 계시니까요.” “…확실히 사달이 날 일은 없겠군.” 어찌 보자면 이건 하나의 기연이었다. 남궁진천이 옆에 있는 상황에서 화경에 가까운 무인과 대련을 할 수 있다? 진지하게 영약 중 첫째로 손꼽히는 대환단이니 뭐니 하는 것들보다도 훨씬 가치 있는 일이다. 생사결에 가깝게 싸워도 남궁진천이 적당한 때 개입하면 누구 하나 크게 다칠 일이 없을 테니까. ‘이 또한 장인어른의 은혜겠지요….’ 가볍게 남궁진천을 찬양한 서준이 씩 웃었다. “그럼 결정이죠?” “그리하지. 허나 당연하게도 대련의 승패에 따라 결과가 정해지진 않을 것이다. 물론, 네가 승리한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자격을 증명한 셈이나, 패한다 하여도 그 과정에서 펼친 무공을 토대로 판단을 내리도록 하겠다.” “흠.” 골똘히 생각하던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이기면 되는 거네.’ 졌지만 잘 싸웠다? 그런 건 용납 못 한다. 기필코 이번 대련을 이겨서 저 노인네의 정수리에 꿀밤을 먹여주고야 마리라. * 대련은 그대로 대연무장에서 진행되었다. 애초에 이곳에 모인 인원들은 그 전부가 남궁세가의 일원이라 할 수 있는 이들. 대련을 본다고 문제될 건 없었다. 오히려 고수들의 대련을 볼 수 있다면 그들에게도 도움이 된다. 그렇다 보니 다들 멀찍이 물러났을 뿐 자리를 떠난 이는 없었다. 멀뚱히 선 서준의 앞에서 남궁혁이 대련의 규칙을 다시 한 번 설명했다. “아무리 가주가 있다 하나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가능한 한 살초는 자제하지.” 그게 전부였다. 생사결에 가까운 대련. 남궁혁이 검을 뽑아 서준을 겨누었다. “삼 초를 양보하마.” 서준이 세 번의 초식을 펼칠 동안 역으로 공격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 말은 곧 서준이 한 시진 동안 힘을 끌어모아도, 남궁혁은 자잘한 방해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서준은 한 시진 정도 힘을 끌어모으면 남궁혁의 머리를 깜찍한 별 모양으로 커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서야 영 김이 빠진다. 탁- 탁- 탁- 서준이 세 번 손가락을 튕겼다. 날아간 지탄이 남궁혁의 검에 허무하게 막혔다. “됐죠? 삼 초.” “…패기는 좋구나. 어디 실력도 그만한지 한 번 보자꾸나.” 남궁혁이 천천히 다가온다. 서준은 픽 웃으며 손가락을 아래서 위로 크게 그었다. “그러다 두들겨 맞아도 난 몰라요.” 오행, 토, 사출. 대연무장의 바닥에서 거대한 기둥들이 나무가 자라나듯 빠르게 솟구친다. 남궁혁이 즉시 땅을 박찼다. 가볍게 몸을 틀어 피해낸 그의 눈썹이 들썩였다. “주술? 재주가 많구나.” 무공을 만드는 걸로 모자라 연단, 거기에 주술까지? “허나 그래서는 어느 하나 대성하지 못할 것이다.” 탁, 기둥의 옆면을 박찬 남궁혁이 날아들었다. 그의 검에 새파란 강기가 깃들더니, 이내 위에서 아래로 크게 휘둘러졌다. 창궁무애검법이다. 알아본 서준이 픽 웃었다. “나름 다 대성했는데.” 허리춤의 검집. 안에 담긴 검을 엄지로 툭 밀어낸다. 서준의 검이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의 뒤로 희미한 제왕의 형상이 어렸다. 제왕검형과 거령신공의 합작이다. 나름 제왕검형의 자격을 판단하는 자리 아닌가. 제왕검형을 적극적으로 써주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쿠우우웅────────!! 공간을 찍어누르는 압력에 날아들던 남궁혁이 땅에 처박혔다. 서준은 발 딛고 서있던 기둥에 손을 짚었다. 동시에 전신에 넘치는 패력괴신무의 힘을 의식하며, 한 발짝. 쿠웅-! 서준이 뿌옇게 인 흙먼지 사이로 쏘아졌다. 기다리던 남궁혁이 마주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검과 검의 격돌에 흙먼지가 단숨에 걷혀나간다. 뒤로 크게 밀려난 남궁혁이 저릿한 손을 풀며 눈가를 좁혔다. ‘무슨 놈의 힘이….’ 정면으로 맞서면 자신이 밀린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쌓은 내공과 경지가 다르거늘. 하지만 이 정도로 놀라기에는 이미 너무 많이 놀랐다. 빠르게 당황을 수습한 남궁혁이 검에 하늘을 휘감았다. 어느새 다가온 서준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놈…!” 바다를 닮은 하늘이 땅에서 솟구친다. 서준이 반응했다. 펼치고 있던 왕씨도법을 살짝 비틀어 백하귀양의 심상을 섞었다. 투웅-! 힘을 흘려낸 서준의 신형이 하늘 높이 떠오른다. 발밑에 매화를 피워내 한 번 더 도약한 서준이 바위 기둥에 내려앉아 남궁혁을 바라보았다. “요즘 실전을 경험할 일이 별로 없으셨나? 좀 무딘데요?” “옳다. 근래에 맞수와 검을 나눈 적이 없었지. 그러니 조심하거라.” 화아악-! 남궁혁의 검에서 흐르는 강기가 공간을 집어삼킨다. 검 주변의 공간이 하늘로 물들었다. 서준의 눈이 빛났다. 영역이다. 다만 화경의 그것과는 달리, 검 주변만을 감싸는 제한적인 영역. 허나 무시할 수 없다. 저 검의 영역에서는 남궁혁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노부의 검은 날카로워질 테니.” 파악-! 남궁혁이 달려든다. 서준은 씩 웃으며 바위 기둥을 박찼다. 남궁혁에게 마주 달려드는 대신, 빠르게 움직이는 서준의 신형이 기둥과 기둥 사이를 오간다. 남궁혁은 말없이 검을 틀어쥐었다. 이내 몸을 비틀며 검을 크게 휘두른다. 창궁도래(蒼穹到來). 화아아악─────────!! 푸른 하늘이 파도처럼 넘실대며 바위 기둥들을 베어넘겼다. 몸통이 잘린 바위 기둥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그 파편 중 하나에 걸터앉은 서준이 따악-! 손가락을 튕겼다. “그때까지 버틸 수 있겠어요? 무뎌진 실력으로는 힘들 텐데.” 떨어지는 바위의 파편들. 일순 그것들에서 폭발적인 기운이 터져나온다. 남궁혁이 눈을 크게 떴다. “어느새…!” 문득 그의 머릿속에 장면들이 스쳤다. 서준이 기둥에 손을 짚거나, 기둥 사이를 바쁘게 오가던 모습들. 그 상황에서 자연히 나올 수 있는 대처였으나,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다른 노림수가 있었던가…!’ 콰아아아앙────────!!! 기둥에 심어둔 무수한 혼원일월공이 순차적으로 폭발했다. 폭발에 휘말린 파편들이 어지러이 흩어진다. 불규칙하게 흩날리는 듯하던 파편들은 어느 순간 일정한 배열을 갖췄다. 단순한 형태의 오행진이다. 미리 계산해둔 서준이 여유롭게 수인을 맺었다. 오행(五行), 화(火), 분화(噴火). 혼원일월공의 폭발과 동시에 그 폭발들이 한데 뭉쳐 하늘로 솟구쳐오른다. 쿠우우웅────────!! 땅에 내려앉아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준은 문득 생각했다. ‘주술을 너무 많이 썼나?’ 이래서야 무공이 아니라 주술을 보여준 셈 아닌가. “흠.” 고개를 끄덕인 서준이 양손으로 검을 쥐었다. 어차피 저 정도로 당할 노인네도 아니겠다, 이제부터라도 무공을 쓰면 그만이다. 아니나 다를까. 푸확-! 폭발의 흐름이 단숨에 흩어지며 남궁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옷이 약간 그을리고 여기저기 생채기가 났을 뿐 멀쩡해보이는 모습이다. “…기련문이 생각나게 하는 전술이군.” “뭐 인마?” 표정을 구긴 서준이 제왕검형을 펼쳤다. 쿠웅-! 거대한 압력에 하늘을 밟고 서있던 남궁혁이 미간을 구겼다. “나도 진심을 다하겠다.” 남궁혁이 검을 치켜들었다. 그의 검이 주변 공간을 하늘로 물들인다. 아니, 바다? 하늘인지 바다인지 모를 것이 끝없이 퍼져나가 일대를 뒤덮는다. 남궁혁의 영역은 검을 기준으로 한 자(약 30cm) 정도의 공간이다. 허나 그의 심상은 영역을 벗어나고도 여전히 형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거대한 폭력 앞에 서준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아무리 남궁혁의 실전 감각이 녹슬었다지만, 저건 실전 감각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냥 냅다 내리꽂는 일격에 무슨 실전 감각씩이나 필요하단 말인가. 저지하는 건 힘들어보이니 남은 수는 방어, 혹은 회피. ‘피하는 건 힘들겠고….’ 서준이 숨을 크게 들이쉬며 검에 붉고 푸른 기운을 깃들였다.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며 태극을 그린다. 혼원을 이룬 기운이 칼날의 형태로 깃드니, 곧 혼원일월강기다. 실험명, ‘니 주먹이 센가 내 검이 센가’에서 얻은 교훈이 하나 있다. 혼원일월강기는 그냥 무식하게 쓰면 오히려 평범한 강기보다 효율이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것. 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썼을 때에는, 감히 평범한 강기 따위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짓거리들을 태연하게 행할 수 있다. “후우….” 물론 직접 해보는 건 처음이지만, 아마 되지 않을까? 서준이 검을 뒤로 당긴 채 씩 웃었다. ‘안 되면 장인어른이 막아주시겠지.’ 서준과 같은 자세를 취한 등 뒤의 제왕. 그가 쥔 검 위로 혼원일월강기가 깃든다. 떨어지는 바다. 압도적이다. 해일 앞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티끌에 불과한 듯했다. 서준은 그 거대한 재앙에 맞서 검을 들었다. 한낱 쇠붙이를 든 인간이 해일을 향해 달려들고, 끝내 삼켜진다. ‘태극은 곧 조화요 확산이라.’ 바다의 거친 흐름. 그 속에 잠긴 서준이 검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