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 점창에 기재가 나왔구려.” “마지막 일격은 나조차 섬뜩함을 느꼈소.” “이게 얼마만에 나오는 사일검수인지….” 웅성대는 장로들. - 와아아아아────────!! 멋도 모르고 환호를 내지르는 관중들. 연무장 한가운데 우두커니 선 황보혜지는 굳어진 표정을 애써 가다듬었다. “…비겁해.” 이래서야 이겨도 이긴 게 아니다. 질끈 눈을 감았다 뜬 황보혜지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을 바라보는, 유독 뜨거운 시선 하나. 그 앞에 선 채 애써 미소 짓자 매서운 목소리가 날아든다. “너는 그 득의양양한 꼴을 보고 싶니? 얼마나 여유를 줬으면 대련 중에 깨달음을 얻어?” “어머니…, 그래도 제가….” “혜지야. 이 어미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니. 항상 최선을 다해 상대를 짓밟아야 네가 올라설 수 있는 거라고.” “그래도 용봉의 칭호도 받았는데….” “지금 그게 중요하니?” 황보혜지의 모친, 황보서린의 날카로운 눈이 황보혜지를 훑었다. “주변에서 떠드는 소리를 들어보렴. 멋모르는 관중들이야 네가 이겼다며 시끄럽지만, 무공에 대해 아는 이들은 네게 관심조차 없어.” “하지만….” “점창. 점창. 너는 네가 이기고도 이런 소리를 듣고 싶니?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잖아. 그런데 왜 이 어미가 말하는 대로 하지를 못해.” “…죄송합니다.” 황보혜지가 고개를 숙였다. 간단한 조치를 받았는데도, 부상당한 어깨가 유독 아파왔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황보서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싫은 소리 해서 미안하다. 그래도 다음에는 잘할 수 있지?” “예, 어머니….” * 황보혜지는 생각했다. ‘마음가짐 하나로 그렇게 달라질 수 있구나.’ 은위룡의 마지막 일검은 눈부셨다. 그 썩어빠진 동태 눈깔로 펼친 검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마음을 바로 세우는 것. 그리하여 스스로에 대한 확신으로 드높은 곳에 다다르는 것. 황보혜지 역시 듣는 귀가 있어 알았다. 이 이상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허나 알면 뭐 하는가. 알아도 행하기 어려워 인생이다. 아는 대로 행할 수 있다면 그 자가 곧 신선이겠지. “황보 소저, 축하드립니다. 부상은 괜찮으십니까?” “남궁 소협…. 네, 괜찮아요.” 황보혜지는 남궁명을 웃으며 반겼다. 하지만 남궁명은 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눈썹을 들썩였다. “소저,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아뇨, 무슨 일은요. 남궁 소협이야말로 아쉽지 않으세요? 8강이 코앞이었는데….” “저는 괜찮습니다. 다음에 다시 도전하면 그만이지요.” 남궁명은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듯 웃었다. 그때,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뭐야. 우리 아우 거기서 뭐해?” 고개를 돌려보니 서준이 씩 웃으며 그들을 보고 있었다. “아, 형님.” “그래그래, 아우. 연애 사업 중이야?” “그런…!” 남궁명이 화들짝 놀라자 서준이 낄낄 웃는다. 그러더니 황보혜지를 한 번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아.” “예?” “애매할 때는 확 질러버려.” “무슨 말씀이신지….” “뒷감당은 걱정 말고. 장인어른 말고 나도 있으니까. 뭣하면 패진광 그 영감도 있고.” 화이팅!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기고 서준이 사라졌다. 남궁명은 그가 있던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며 뺨을 긁적였다. “초절정쯤 되면 독심술도 할 줄 알게 되는가 봅니다.” “보는 시야가 아예 달라진다고들 하니까요.” 황보혜지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남궁명은 손을 뻗었다. “어, 어…?” 손을 붙잡힌 황보혜지의 낯이 발갛게 익었다. “소저, 자당을 한 번 뵙고 싶습니다.” “어, 어머니를요…?” “괜찮겠습니까?” “네, 네…! 물론이죠!” 일단 고개부터 끄덕이는 황보혜지를 보며 남궁명이 옅게 웃었다. ‘이 이상은 위험할지도 모르겠어.’ 황보혜지의 상태가 그리 좋아보이지 않았다. 이맘때의 무인들은 곧잘 심마에 들고는 한다. 아직 스스로의 길을 확실히 하지 못한 어린 무인들이기에 특이한 일도 아니었다. 어지간해서는 남의 집안일에 끼어들지 않으려 했지만…. ‘후회하느니, 지르는 게 낫겠지.’ 형님을 보며 배운 것이다. 여차하면 남궁이라는 이름도 있지 않은가. 가문의 힘이라는 것은 이럴 때 쓰기 위해 키운 것이다. * 황보혜지의 모친, 황보서린은 절정경의 무인이다. 그녀의 남편이 데릴사위로 들어와 황보씨의 대를 이었다. 그녀는 본디 무(武)에 뜻을 두었으나, 재능의 부재로 현재는 가문의 대소사를 관리했다. 또한 책사로서 두각을 드러내어 세가 내에서 어느 정도 입지를 쌓았다. 남궁명도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얼핏 알았다. 무에 대한 꿈을 저버리지 못해 딸에게 과한 기대를 하고 있다는 것 역시. 남궁명은 대뜸 황보혜지와 함께 황보서린을 찾아가 인사를 올렸다. “후배가 인사 올립니다.” 황보서린은 남궁명과 그에게 손을 붙잡힌 채 따라온 딸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잠시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던 황보서린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남궁명의 인사를 받았다. “남궁의 소가주시군요.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는지요?” “갑작스럽다는 것은 압니다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남궁명은 손을 당겨 황보혜지를 황보서린의 옆에 세웠다. 둘 모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까닭이었다. “무례인 건 압니다만, 이제 따님을 놓아주실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확실히 무례한 말이었다. 황보서린이 황당한 표정을 했다. “아니,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이대로라면 황보 소저의 마음에 심마가 깃들 겁니다. 무릇 무인이라면 스스로의 뜻을 세워야 하는 바. 선배님의 뜻과 황보 소저의 뜻이 안에서 충돌한다면 자칫 주화입마가 올 수도 있습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남궁 공자, 하실 말씀은 그게 전부인가요?” “아뇨.” 남궁명은 황보혜지를 바라보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에 그녀의 눈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조금 더 상황을 지켜봤어야 했나…?’ 망설임이 고개를 들었지만, 남궁명은 고개를 저어 떨쳐냈다. 이제 와 할 고민은 아니다. 이미 늦었다. 시작한 이상 끝을 보는 편이 낫다. ‘형님만 믿겠습니다.’ 애매할 때는 확 질러버려라. 형님께서 분명 자신의 고민을 꿰뚫어 보고 해주신 조언일 터. 남궁명이 진지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소저, 제 말은 모친과 반목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무릇 가족끼리는 서로의 의견을 존중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허나, 그 안에 소저의 의지가 없어서는 아니됩니다.” “나, 남궁 소협….” “소저께서 진정 모친의 말씀이 옳다 생각하신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만…. 제 눈에는 그리 보이지 않는군요.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과연 소저의 뜻이 무엇인지.” 황보서린과 남궁명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하던 황보혜지는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이, 이만 돌아가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 하겠습니다.” 말 한 마디로 무언가를 바꿀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실례 많았습니다.” 남궁명은 인사나마 공손히 마친 뒤 황보세가의 별장을 빠져나왔다. * “뭐? 진짜?” 서준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황보준이 그 앞에서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것 때문에 내가 별장에 돌아갈 수가 없다. 분위기가 워낙 살벌하니 원….” 남궁세가의 별장. 반쯤 강제로 쫓겨난 듯한 황보준이 피난을 온 장소였다. “아니, 근데 왜 여기로 와? 친구 없어?” “…남궁세가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내가 그럼 어디로 가나?” “친구 집 새끼야.” “흥.” 흥 이 지랄. 쳐맞으려고. 서준은 혀를 차면서도 남궁명의 담대함에 감탄했다. “그나저나 우리 아우가 그렇게 추진력이 있는 사람인 줄은 몰랐네.” 갑자기 황보세가에 쳐들어가서 그런 말을 할 줄이야. 황보혜지에게 확 들이대라고 하긴 했는데, 그걸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역시 우리 동생. 할 때는 해야지.” 아무튼 마음에 든다. 어찌 됐건 지를 때는 속 편하게 확 지르는 편이 낫다. 뒷감당이야 어떻게든 되지 않겠는가. “나는 그럼 어쩌라는 거냐.” “아니, 제수씨가 조카손주면 걔 어머니도 조카쯤 되는 거 아닌가? 뭘 그렇게 쫄아있어?” “세상은…, 배분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확 꿀밤이라도 때리든가.” “미친놈. 무력만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되지 않나?” “사람이 덜 됐군. 너는 꼭 네 아내도 후려패라.” “뭐 이 새끼야?” “…미안하다. 실언했군.” 서준이 치켜들었던 주먹을 내렸다. ‘뭐, 명이가 알아서 잘 하겠지.’ 일단 자신보다는 현명한 아우다. 그러다 정 안 되면 뭐…, 고양이 손이나마 보태주면 되지 않겠는가. 가족인데. 우리 아우 연애 사업 정도야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다. * 16강부터는 하루에 두 번의 대련이 치러진다. 이렇게 느긋해도 되나 싶긴 한데, 생각이 있으니 그렇게 진행하지 않을까? 아마 결승에 점점 가까워지는 만큼 후기지수들의 컨디션을 생각한 것이 아닐까 싶다. 춘봉의 대련을 지켜보기 위해 자리에 앉아 대기하던 서준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근데 황보세가랑 남궁세가랑 사이 안 좋지 않았나?’ 이전에 남궁세가 무인들 반응을 보니 별로 친해보이지는 않던데. 이게 그건가? 적대진영 사이에서 꽃피는 사랑? 그 왜, 있잖은가. 로미오와 줄리엣. 그냥 로맨스 영화 한 편 뚝딱이다. “허허, 벌써 와있었군.”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노인 하나가 서준을 향해 다가왔다. “아, 그….” “점창의 은유도일세. 무림에서는 관양지검(貫陽之劍)이라 불리고 있지.” 은유도는 서준과 짧게 인사를 주고받은 뒤 곧장 본론을 꺼내들었다. “제자에게 해준 조언은 정말 고맙네. 정저지와는 좌정관천이라. 위룡의 상황과 점창의 무공을 모두 절묘하게 관통하는 말이더군. 점창의 무공에 대해 잘 모를 텐데. 역시 천재가 보는 시야는 다른가 보이.” “그래요?” 그냥 느껴지는 대로 애기한 건데 어찌 아다리가 잘 맞았나 보다. 서준이 미소 짓자 은유도 역시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오늘 금가의 후계자가 대련을 치르는 것으로 아는데.” “맞죠.” “상대가 무당의 무혜였지 아마? 어려운 상대일 텐데, 괜찮겠는가?” “제가 안 괜찮을 건 없죠.” 이제 춘봉이가 괜찮냐 안 괜찮냐가 문제긴 한데…. 아마 괜찮으리라 본다. “이십 초(招).” “음?” “그 안에 끝날 거라 봅니다.” 무당의 태극? 우리 춘봉이는 혼원일월강기로 미리 예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