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위룡은 스승인 은유도를 존경했다. 한낱 고아에 불과한 꼬마를 받아들여 제자로 받아준 은인. 그는 은위룡에게 있어 스승이었으며, 성을 물려준 아버지였고, 가끔은 둘도 없는 친구였으며, 어떨 때는 짜증나는 형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한 발짝조차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허덕이는 이 한심한 제자를. 무공으로 뭐라 하지 않는다,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해라. 물론, 못내 위로되는 말이었지만…. 그게 과연 본심일까? 이 못난 제자를 내치고 싶지는 않을까? 은위룡은 멍하니 연무장을 올려다보았다. 남궁수아와 남궁명의 대련. 그저 보고 있는 것만으로 가슴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허나 그는 길게 숨을 내쉬어 그 열기를 빼내었다. 무공. 빌어먹을 천재들의 전유물. 몇 번 더 욕지거리를 내뱉으니 가슴이 잔잔하게 가라앉는다. - 점창파의 은위룡…! 심판의 호명에 은위룡이 걸음을 옮겼다. 올려다보던 연무장에 섰다. 사람들의 시선에 움츠러들려는 몸을 펴고, 동아줄을 붙잡듯 검의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기대하지 않는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하지도 않는다. 해를 향해 쏘아낸 검이 닿지 않아도, 괜찮다. 가능할 것이라 생각지도 않았기에. - 황보세가의 황보혜지…! 은위룡은 맞은편에 선 여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주 바라보던 황보혜지가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그 뻔뻔한 낯짝을 두들겨 패줄 수 있겠네요.” “해보시오. 할 수 있다면.” 속이 울렁인다. 여기서 진다면? 상상하는 자신의 미래는 비참하기만 하다. 내심 기대하는 스스로의 속내가 얄궂다. 어쩌면, 내게도. 저 하늘 위의 태양을 쏘아 떨어뜨릴 잠재력이 있지는 않을까…. - 시작하시오…! 심판의 시작 신호. 은위룡은 검을 뽑아든 채 황보혜지를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표정을 잔뜩 구긴 황보혜지가 성큼 발을 내디뎠다. “그 표정은 뭔가요?” 앞발을 밀어내며 허리가 틀어진다. 뒤로 당긴 주먹에 거력이 깃들고, 이내 쏘아진다. 태산거권(太山巨拳). 태산의 기세를 담은 듯 무거운 주먹이다. 은위룡은 반사적으로 몸에 익은 검술을 펼쳤다. 섬광분운검(閃光分雲劍). 구름을 가르는 섬광이 은위룡의 손에서 쏘아져나갔다. 쉬익-! 먼저 휘두른 황보혜지의 주먹보다도 빠르다. 황보혜지의 눈이 크게 뜨였다. 코앞까지 다가온 검끝. 주먹을 거두며 급히 몸을 비틀었다. 파라락-! 옷자락이 휘날린다. 황보혜지는 그대로 몸을 회전시키며 다시 한 번 주먹을 내질렀다. 꽈아앙-! 검으로 막아낸 은위룡의 신형이 뒤로 주욱 밀려난다. 황보혜지는 주먹의 얼얼한 감각을 되새기며 눈을 사납게 떴다. “한심하긴.” 뭐란 말인가. 저 얼빠진 대응은. 섬뜩한 일검과 달리 그 뒤는 별볼 것 없다. 차라리 몇 년 전 보았던 은위룡의 검이 더 나을 지경이다. “정말로 아예 다 포기할 생각인가요?” 배알이 꼴린다. 누구는 죽을 듯이 노력해서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저놈은 나아가긴커녕 오히려 퇴보해 동태 눈깔이나 하고. “말하지 않았소. 어차피 무공은 될 사람이 아니라면 평생을 매진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소.” 은위룡이 다시금 기수식을 취한다. 말과 달리 빈틈 하나 없는 자세다. 그의 재능, 노력. 그를 몇 번 본 무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다. 저런 검을 펼쳐내려면 검에 얼마나 많은 애정과 노력을 쏟아부어야 하는가. 그런 검을, 몇 년의 허사로 저렇게까지 망쳐놔? 황보혜지는 용납할 수 없었다. “뭐, 그래요. 그러면 그 안 될 놈한테 신나게 얻어터져보시든가.” 그러면 좀 정신을 차리겠지. 이를 악문 황보혜지의 눈이 부릅 뜨였다. 그녀의 전신에서 짙은 갈빛의 내공이 터져나온다. 태산벽력신권(太山霹靂神拳). 가문의 기대. 또 어머니의 기대. 그 무게만큼 더 무겁게. ‘저런 사람한테는 절대 못 져.’ 한 발을 크게 내딛고, 주먹을 앞으로. 꽈아아앙──────────!!! 허공을 후려친 황보혜지의 주먹에서 굉음이 터져나온다. 급히 몸을 비튼 은위룡의 눈이 번뜩였다. 찰나. 그의 검이 빛을 갈랐다. 쐐액-! 노리는 곳은 어깨. 황보혜지는 빠르게 판단했다. 검을 무시하고 다시 한 발 앞으로. 콰악-! 어깨에 틀어박힌 검. 내공을 덧씌워 막아냈으나, 완벽하지 못해 피가 튀었다. 은위룡의 눈이 부릅 뜨인다.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 흔들림은 검까지 전해져 검끝이 헤맨다. “좀…!” 황보혜지가 주먹을 휘둘렀다. 꽈앙-! 복부를 얻어맞은 은위룡의 신형이 땅을 굴렀다. “커허윽…!” 몇 번이고 땅을 구른 은위룡이 고개를 들었다. 내려다보는 황보혜지. 이를 악물고 일어나려다 전부 우스워졌다.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다.’ 일어나서, 추하게 발악한들 뭐가 달라지지? 은위룡의 입술이 달싹였다. 기권. 그 말을 입에 담으려던 은위룡의 눈이 높은 곳의 관중석을 보았다. 스승님이 자신을 바라본다. 그 낯에는 실망도, 경멸도 없다. 그저 옅은 미소를 짓고 있을 뿐. ‘왜.’ 분노가 몸을 채찍질한다. 왜 스승은 나를 질책하지 않는가. 이런 모습을 보였는데도, 실망하지 않는가. 기대가 없으면 실망하지 않는다. 그래, 내게 처음부터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았나? 병신 같은 생각이라는 건 알지만, 마음은 머리를 따르지 않는다. 비틀대며 일어선 은위룡이 황보혜지를 보았다. 황보혜지도 은위룡을 보았다. 그 눈에 담긴 질척하고 못난 감정. 얼핏 알아본 황보혜지의 입가에 삐뚜름한 미소가 새겨졌다. “차라리 그게 낫네요.” “…뭘 안다고.” 은위룡의 검이 잘게 진동한다. 미세한 진동은 커다란 떨림이 되고, 이내 잘게 부서져 검끝이 환영처럼 불어난다. “알아서 조심하시오.” 은위룡의 검이 빛살처럼 쏘아졌다. 쉬쉬쉬쉭-! 희미한 잔영을 남기며 황보혜지를 덮친다. 황보혜지는 눈을 부릅 뜬 채 단 한 번의 주먹을 내질렀다. 꽈앙-! 무수한 검격이 스러진다. 허나 그만큼 황보혜지의 몸에 상처가 남았다. 황보혜지는 한 발 더 나아갔다. 이를 악문 은위룡은 수십 번의 검을 휘둘렀다. 꽈앙-! 또 한 번. 검이 파훼되고, 몸에 상처가 남는다. 피로 물든 연무장. 황보혜지의 발자국은 오직 정면만을 향했다. 앞섰던 은위룡은 방황하던 새 녹슬었고, 뒤처졌던 황보혜지는 우직하게 나아가 어느새 그를 앞섰다. 꽈앙-! 다시 파훼되는 검. 은위룡의 눈이 떨렸다. 이길 수 없다. 그도 알았지만, 이미 늦었다. 깊숙한 곳에 묻어두었던 울분이 터져나와 이제는 스스로도 멈출 수 없다. “왜────!!” 스승. 은유도. 당신께서는 나를 바로잡지 않는가. 이토록 엇나가고 있는데. 하염없이 못난 제자를 믿기만 하여 무엇이 달라지는가. …제자는 당신께 무엇도 해드릴 수 없는데. 꼴사납게 맺힌 눈물에 내리쬐는 햇살이 부서진다. 눈이 부시다. 우직하게 다가오는 황보혜지의 땀방울. 흐르는 피는 바닥을 적신다. 그녀의 주먹이 당겨진다. 이제는 닿을 거리. 저 주먹이 닿는다면 버티지 못한다. 생각보다도 먼저 몸이 움직였다. 섬광분운검. 전신에 지독하게 새겨진 초식은 한 점 흐트러짐 없이 펼쳐진다. 은위룡은 그것을 높은 곳에서 보았다. 스스로 움직이는 몸. 따라가는 정신. 그의 눈은 구름 사이로 드러난 태양을 보았다. 태양빛이 구름을 가르고 떨어진다[閃光分雲]. 울분이 치솟는다. 그 빛을 거슬러 원점. 빛을 내리는 태양을 바라본다. 저 빌어먹을 태양에 한 점 구멍이라도 낼 수 있다면. 하늘에서 떨어진 햇살이 검에 담기고, 검은 배은망덕하게도 은혜를 내린 태양을 꿰뚫는다. ‘정저지와는 좌정관천이라.’ 우물 안 개구리는 하늘을 바라본다. 한낱 개구리는 하늘의 깊이를 알지 못한다. 허나 태양이 먼저 손을 뻗었다면, 그때도 태양에 닿지 못할까? 은위룡의 검이 하늘로 뻗었다. ‘그렇구나.’ 점창의 검이 태양을 꿰뚫고, 태양의 중앙에 검은 점이 새겨졌다. 사일(射日). 은위룡은 태양 너머로 뻗어나간 검을 보며 웃었다. “하하하…!” 꽈앙-! 황보혜지의 주먹이 은위룡의 복부를 후려갈겼다. 황보혜지는 당황한 듯 몸이 굳었지만, 얻어맞은 은위룡은 드러누운 채 계속 웃었다. “하하, 아하하하…!” 다시금 바라본 하늘의 태양은 여전히 한 점 티없이 맑았다. 꿰뚫었던 그 감각이 착각이라는 듯. 허나 은위룡은 알았다. 더, 조금만 더. 끝없이 나아간 그 끝에 태양이 있음을. 또, 자신이 바란 것은 태양을 쏘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었음을. 오히려 그조차 꿰뚫어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는 것. 그리하여 오히려 태양을 보듬는 것. 그것이 진정 자신이 바라던 것이었음을. “알겠습니다, 스승님.” 미혹이 눈을 가려 헤매었으나, 그 끝을 아는데도 헤맬 이유는 없다. 은위룡은 손을 뻗었다. 마주 뻗어진 햇빛이 그의 손을 잡았다. 그 온기가 마치 스승의 믿음과 같다. 이것이 도. 또 사일이라. * - 승자! 황보세가의 황보혜지…! 심판의 선언이 울렸으나, 십육명문의 장로들은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하늘을 울리는 관중들의 환호성 속, 서준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미친놈 아니야 저거.” 대련을 하다말고 느닷없이 하늘에 검을 찔러? 서준이 낄낄 웃어대자 곁에 있던 한 노인 역시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내 제자놈이 제정신은 아니지.” “아, 제자예요? 축하합니다.” “축하는 무슨. 저 썩을 놈. 어차피 저럴 거면서 뭣하러 그리 빙빙 헤매고 앉아있어?” 말은 저리 하는 주제에 아주 싱글벙글 입가가 찢어질 것 같다. “빨리 데려가요. 깨달음만 잘 정리하면 몇 년 안에 초절정까지 무난하게 갈 것 같은데.” “음, 그래야지.” 싱글벙글 웃던 노인이 땅을 박차 날 듯이 연무장에 뛰어들었다. 쓰러진 채 실실 웃던 은위룡이 그를 보았다. “오셨습니까, 스승님.” “그래, 왔다 제자야.” “스승님.” “뭐냐.” “도란 무엇입니까?” “나도 모른다. 알았으면 등선했지.” “아주 모르십니까?” 은위룡의 시선에 은유도가 껄껄 웃었다. “마음이 진정 바라는 것. 나는 그것이 도라 생각한다.” “그러면 사람에 따라 도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그야 당연한 일이지. 사람이 다른데 어찌 같은 길을 걸을까.” 은유도가 허리를 굽혀 제자를 내려다보았다. “도는 목표가 아니라 길이다. 그 왜, 양놈들 말로 웨이(way)라 하던가?” “그건 또 무슨 헛소리십니까?” “도(道)가 왜 도겠느냐. 길이라 그렇다. 도라는 것은 그 끝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곳까지 가면서 걷는 길을 말하는 것이지.” “태양을 보았습니다.” 은위룡은 스승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사일. 나를 쏘아내, 당신을 넘어 더 높은 곳까지. 당신이 뻗은 손을 붙잡고 올라, 그 누구보다도 자랑스러운 제자가 될 수 있게. “네 눈이 삐었나보지.” “저는 아직 정정합니다.” “고얀 놈.” 혀를 찬 은유도가 말을 이었다. “보았다면 나아가라. 그게 네 도다.” “하하…! 알겠습니다.” “싱거운 놈.” 은위룡은 대꾸하는 대신 몸을 일으켰다. 높은 곳의 관중석을 바라보니 진기재천의 모습이 보인다. “고맙습니다, 선배님!” 크게 외치자 전음이 날아들었다. [뭐가.] [정저지와는 좌정관천이라. 그 말 말입니다.] [도움이 됐나?] [예. 우물만 한 하늘에도 태양은 뜨더군요.] [말은 잘 하네.] [별 생각 없이 사시는 것 같은데 의외였습니다.] [뭐 이 새끼야?] 건방진 놈. 서준이 픽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무래도 조만간 무림에 초절정이 하나 늘어날 것 같았다. 물론 저러다 생사현관에서 막히면 큰일나는 거긴 한데, 보아하니 별 문제는 없을 것 같다. 몇 년 정도 기틀을 다진 뒤 깨달음을 토대로 초절정에 도전하면 무난하게 닿을 수 있으리라. 벽에 막혀있던 놈이 깨달음 한 번 거하게 얻었다고 저렇게 될 줄이야. ‘뭐, 덕분에 나도….’ 서준이 태양을 바라보았다. 검지와 엄지를 펼쳐 손가락 총을 만들고, 태양을 향해 쏘아낸다. “빵.” 일순 태양에 검은 구멍이 뚫린 듯했다. 서준이 씩 웃었다. 사일. 그 묘리가 손에 잡힐 듯 훤하다. ‘옆에서 보면 주워먹기도 쉽구나.’ 고마워요, 점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