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봉지회 본선의 대진표는 철저한 무작위 방식이다. 예선 정도야 약간 손을 쓰더라도 상관이 없으나, 십육명문의 자제들이 우글거리는 본선에서 손을 썼다가는 그 뒷감당이 상당히 귀찮아지기 때문이다. 손을 쓸 수 있었다면 같은 가문끼리의 대련은 되도록 피했을 터. 허나 그렇지 않기에 남매끼리의 대련이 성사되었다. “대련은 오랜만이네?” 남궁수아가 살풋 웃자 남궁명 역시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예, 누님.” “누나라고 봐주면 안 된다?” “봐주기는요. 저야말로 누님에 비하면 모자란 입장 아닙니까.” “말이라도 고맙네.” 남궁수아가 쿡쿡 웃으며 대검을 뽑아들었다. 스릉- 기다란 검이 모습을 드러내며 검신에 닿은 햇빛을 찬란히 부숴낸다. 남궁명 역시 검을 뽑아든 채 심판의 신호를 기다렸다. 최근 들어 누님은 이런저런 가르침을 받으며 그 실력이 눈에 띄게 늘었으리라 추측되는 상황. 제왕검형의 숙련도에 있어서는 남궁명 자신이 앞서겠으나, 다른 부분에 있어서는 어떨지 모른다. 더욱이 누님은 그간 외부활동이 거의 없어 오로지 이번 용봉지회에서 보여준 모습만으로 실력을 가늠해야 했다. - 시작…! 탓-! 신호가 떨어지는 동시에, 남궁수아가 달려들었다. 비교적 정보의 우위에 선 그녀인만큼 괜히 간을 보다 수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속셈이다. 짐작하고 있던 남궁명은 상단세를 유지한 채 기다렸다. 파츠츳-! 벼락을 머금은 대검이 커다란 반월을 그린다. 남궁명은 물러나지 않았다. 한 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검을 내리찍는다. 쿠웅-! 제왕검형이 펼쳐지며 남궁명의 검이 남궁수아의 대검을 바닥에 처박았다. 남궁명은 물흐르듯 대검의 옆면을 발로 밟아 고정하고, 어깨를 틀어 아래에 깔린 검을 위로 힘차게 그었다. 남궁수아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대검을 비틀어 검날을 세웠다. 치직-! 뇌기를 머금은 검날이 남궁명의 발바닥을 위협한다. 남궁명은 발바닥에 내공을 덧씌워 잠시 시간을 벌었으나, 자세가 흐트러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결국 검로에 빈틈이 생겨나고, 남궁수아가 몸을 비틀었다. 쉬익-! 검이 허공을 스친다. 남궁수아는 즉시 몸을 회전시키며 짓밟힌 대검을 빼냈다. “하압…!” 동시에 그 힘으로 대검을 힘차게 휘두른다. 대검의 사정거리는 검보다 훨씬 우월하다. 남궁명은 몸을 숙여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즉시 날아드는 남궁수아의 발. 콰앙-! 회전하는 힘이 고스란히 담긴 일격을 남궁명이 가까스로 막아냈다. 수 걸음 뒤로 밀려난 남궁명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대단합니다, 누님!” 그러면서도 그는 언제 펼쳐질지 모르는 남궁수아의 절초를 주의했다. 청송과의 대련에서 보여주었던 마지막 일검. 주의하지 않으면 단숨에 승패가 정해질 수도 있었다. 남궁수아 역시 그것을 아는 듯 섣불리 절초를 펼치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 수와 수를 교환했다. 일각(약 15분)이 지나고, 이각이 지날 때까지도 승기는 어느 한 쪽으로 기울지 않았다. 와아아아────────!! 관중들의 환호성. 남궁명은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남궁수아의 움직임을 눈에 담았다. 기본적으로 남궁수아는 대검의 무게를 십분 활용하는 식의 움직임을 펼친다. 대검을 휘두를 때 딸려가는 몸을 힘으로 붙잡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 힘에 몸을 맡겨 나비처럼 팔랑인다. 남궁수아의 힘이라면 능히 대검을 한손검처럼 휘두를 수 있을 터. 그럼에도 저토록 유려하게 힘을 운용하는 방식에 남궁명은 감탄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하아…. 하아…. 조심하십쇼, 누님.” 결국 남궁명이 먼저 승부수를 띄웠다. 그의 전신에서 기파가 터져나오며 일대의 공간을 점한다. 영역이라 하기에는 너무 조악했으나, 분명 절정의 수준에서 펼칠 수 있는 기예는 아니었다. 제왕검형의 공능을 빌린 것이다. 그는 제자리에 꼿꼿이 선 채 검을 치켜들었다. 무방비한 자세다. 아래로 찔러들어올 공격 따위는 염두에도 두지 않은 오만한 자세이기도 하다. 허나 남궁수아는 섣불리 빈틈을 노릴 수 없었다. 패도적인 기세를 내뿜는 남궁명의 모습은 그 자체로 검과 같았다. 남궁세가의 소가주라는 말이 무엇보다도 어울리는 모습. 희게 미소 지은 남궁수아가 대검을 꽉 붙잡았다. “정말…. 훌륭한 동생을 뒀네.” 있는 듯 없는 듯, 별다른 쓸모도 없는 누나와 달리. 기어나오려는 잡념을 틀어막은 채, 그녀는 검에 벼락을 깃들였다. 우르릉────────!!! 남궁명이 점한 공간을 찢어발길 듯 사나운 벼락이 거세게 몰아친다. 우두커니 선 남궁명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고요한 눈으로 벼락을 바라보며, 무거운 한 걸음을 내디뎠다. 쿠웅-! 그를 중심으로 하늘이 움직인다. 공활하되 생기 넘치는 짙푸른 하늘이 그의 검에 담겨 땅을 물들인다. 제왕검형(帝王劍形). 하늘이 떨어지고, 벼락이 치솟았다. 쿠우웅────────!! 최초의 충돌은 백중세. 허나 곧 밀고 밀리기를 반복하던 두 힘의 균형이 깨어지고, 하늘이 벼락을 찢어발겼다. 흩어지는 벼락 사이로 하늘이 떨어졌다. - 아…! 어딘가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남궁수아의 패배를 안타까워하는 듯했으나, 당사자들의 표정은 조금 달랐다. “이런…!” 찢어발겨진 벼락. 의도한 남궁수아는 스스로 검을 놓았다. 대검이 빠르게 회전하며 하늘로 치솟는다. 양손이 자유로워진 남궁수아가 희게 웃었다. “아직은 누나가 체면 좀 세울게.” 곧장 달려들어 장법을 꽂아넣기에는 시간이 촉박하다. 둘 모두 알았지만, 이미 승패는 정해졌다. 남궁수아가 보고 배운 사람이 서준인 까닭이다. 남궁수아의 손끝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뇌전의 구가 빛살처럼 쏘아졌다. 뇌령(雷靈). 삐이잉────────!!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한 줄기 벼락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 승자…! 남궁세가의 남궁수아…! 승자가 결정됐다. * 대련을 지켜보던 서준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박수를 쳤다. “오…!” 방금 쏘아낸 지탄. 저건 아무리 봐도 자신이 예전에 쓰던 혼원일월지와 비슷했다. 저런 수를 숨겨두고 있었을 줄이야. 감탄하고 있으니 주변의 장로들 역시 웅성댔다. “끄응…, 다음 세대에는 남궁세가가 패권을 잡겠군.” “둘 모두 미래가 기대되는 재목들이오.” 훗날의 일에 대해 떠드는 이들도 있었지만, 순수하게 감탄하는 이들 역시 있었다. “별호는 고민할 필요도 없겠소. 뇌봉(雷鳳)이라는 말이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군.” “뇌봉은 너무 성의 없지 않소? 화뢰검봉(華雷劍鳳)은 어떻소.” 용봉지회의 8강에 진출한 후기지수들에게는 성별에 따라 용, 또는 봉의 별호가 내려진다. 사내라면 용, 여인이라면 봉. 보통은 검룡이니 신룡이니 두 글자 정도 되는 별호가 일반적이었다. ‘그럼 봉 쓰는 여자면 봉봉(棒鳳)인가?’ 서준이 딴생각을 하는 사이 남궁명이 정신을 차리고 사람들을 향해 포권했다. 가장 먼저 십육명문의 장로들이 모여있는 곳을 향해. 서준이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우리 아우 잘했다!” 이내 인사를 마치고 남궁수아와 남궁명이 연무장에서 내려갔다. 치열했던 대련을 방증하듯 사람들의 열기는 여전히 식을 줄을 몰랐다. 대련을 치른 당사자들이 아님에도 땀에 흠뻑 젖어 지쳐보이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서준이 흐뭇한 마음으로 다리를 꼬자 홍안개가 끌끌 웃었다. “아쉽지는 않은가?” “뭐가요?” “사실 소가주 역시 우승까지 노려볼 수 있는 실력 아닌가. 대진운만 잘 따라줬더라면 분명 그러했을 텐데.” “뭐…, 그렇긴 한데….” 남궁명이 8강에조차 진출하지 못하고 떨어지긴 했지만, 사실 실력만으로 본다면 그가 용봉으로 묶이지 못하는 것이 이상하긴 했다. “그래도 명이는 다음 기회도 있잖아요. 누나는 그…, 이번이 마지막이라.” 다음 용봉지회가 개최될 즈음이면 남궁수아의 나이는 이립(30세)을 넘는다. “어이쿠, 그 얘기는 당사자 앞에서 절대 하지 말게.” “제가 미쳤다고 그런 짓을….” “자네를 오래 본 건 아니지만 하고도 남을 것 같은데?” “저도 사람은 가리는데요….” 남궁수아가 닭장이라는 말을 듣고 펑펑 울기라도 한다면 서준은 그 죄책감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객관적인 눈으로 따져봐도 남궁수아가 닭장 소리 들을 사람은 아니기도 하고. 원래 예쁘면 나이 상관 없이 누나다. “흘흘, 그거 누가 참 좋아할 소리구만.” “누구요?” “모르나? 유명한 사람 하나 있는데. 무도(武道)에 모든 것을 바쳐 초절정에 올랐으나 남자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한….” “헉.” “여인의 몸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것이지. 겉보기에는 젊어보이는데 폐경이 와버릴 줄 누가 알았겠나?” “저런…. 그래서 그게 누군데요?” “모태솔로(慕泰率路), 보련신니라네.” 그거 참 안타까운 별호다. 서준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뭔 별호예요, 그거?” “큰 뜻, 대의를 따르면서도 그 소탈함이 변치 않았음을 칭송하는 별호지.” “확실해요? 놀리는 게 아니라?” “놀리다니? 놀릴 건덕지가 있나? 보련신니와 만나본 사람이라면 결코 그녀를 놀릴 생각 따위는 하지 않을 걸세.” 홍안개가 끌끌 혀를 찼다. “아무튼, 내가 알기로 그녀는 현재 화경에 오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들었네. 반로환동을 이루어 생식 기능을 되찾겠다는 거지.” “어…. 나중에 만나면 응원한다고 전해줘요.” “흘흘, 그러지.” 머리를 긁적이던 서준은 남궁수아가 농담처럼 흘린 한마디를 떠올렸다. ‘나도 얼마 안 있으면 이립이야. 사실 지금도 조금 늦은 거라구. 이대로라면 곧 할머니가 되고 말 거야.’ 농담처럼 했지만 사실 어느 정도 진담이 섞인 말이지 않았을까? ‘애를 낳을 거면 좀 서둘러야 되려나?’ 아직 스물여덟밖에 되지 않았다지만 이렇게 세월아 네월아 보내다보면 마흔, 쉰도 금방…. “흠.” 빠르게 생각을 그만둔 서준이 다음 대련을 기다렸다. 다음 대련이 분명 황보혜지와 은위룡. 은위룡 그 친구는 어떻게 심마는 잘 해결됐는지 모르겠다. 저번에 보니 해결이 된 것 같지는 않던데. ‘나는 누구를 응원해야 되지?’ 제수씨? 꿈을 찾는 청소년? 잘 모르겠지만, 점창의 사일검법은 제대로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혹시 아나? 잘 참고해서 써먹을 수 있을지. 나름 조언도 줬으니 깨달음 좀 같이 얻는다고 화내지 않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