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수아는 연무장에 선 채 숨을 골랐다. 용봉지회. 32강. 긴장되는 속을 달래며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는다. ‘괜찮아.’ 지금껏 세가 밖에 얼굴을 내비친 적이 거의 없었지만, 그렇다 하여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는 법은 없다. 단지 조금 긴장이 될 뿐이다. 수많은 사람 앞에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것. 왠지 조금 뻣뻣해진 듯한 입가를 풀며, 남궁수아가 검을 뽑아들었다. 스릉- 기다란 검이 뽑혀나오자 청송이 씩 웃으며 허리춤의 검에 손을 올렸다. “잘 부탁드리겠소.” “…후후, 네. 저도요. 명이의 친구라고 봐주지는 않을 거예요?” “당연한 말씀을.” 양측이 준비를 마치자 심판이 손을 치켜들었다. - 시작하시오…! 심판의 신호와 함께 남궁수아가 달려들었다. 카가각-! 기다란 검이 땅에 끌린다. 몸을 앞세워 달려들던 남궁수아는, 그대로 몸을 비틀며 대검을 크게 휘둘렀다. 파츳-! 허공에서 튀는 희미한 전류에 청송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과연!” 달칵, 엄지가 검집의 검을 밀어낸다. 동시에 발검. 챠아앙-! 세차게 뽑혀나온 검이 남궁수아의 대검을 크게 올려쳤다. 콰아앙-! 폭음과 함께 남궁수아의 몸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대검과 함께 나풀나풀 허공을 유영하는 모습에 청송이 감탄을 토했다. “남궁의 꽃이라더니, 나비를 보는 것 같구려.” 그는 크게 웃으며 땅을 박찼다. 파바박-! 허공에 발길질을 하며 높이 치솟은 청송이 검을 크게 뒤로 끌어당겼다. “흡…!” 이내 청풍검법(靑風劍法)이 펼쳐진다. 푸른 바람을 그려내듯 쾌속하면서도 끊어짐 없는 검이 남궁수아를 몰아친다. 남궁수아는 그 검의 폭풍을 바라보며 차분히 대검을 양손으로 잡았다. 두 사람 모두 허공에 떠있는 상태. 남궁수아의 눈이 살며시 벌어지며, 그 푸른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파지직-! 섬광(閃光). 푸른 벼락이 대기를 찢어낸다. 우르릉────────!!! 우레와 함께 청송의 신형이 튕겨져 날아갔다. 콰앙-! 그의 몸이 바닥에 처박히며 흙먼지가 인다. 남궁수아는 허공에서 수차례 몸을 뒤집어 바닥에 착지했다. ‘닿을 수 있어.’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저 먼 곳을 보았다. 어두운 하늘. 구름으로 감싸인 성. 그 속에 깃든 푸른 전류의 다발들을. 여전히 남들 앞에 당당히 서는 것은 그리 내키지 않는다. 자세한 이유 따위 생각해본 적 없다. 그저 천성적으로 그러리라 여길 뿐. 허나 그럼에도, 이미 발을 들였다면 끝은 봐야하지 않겠는가. “허참….” 흙먼지를 걷어내며 청송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여전히 미소를 띤 채 옷에 묻은 먼지 따위를 털어냈다. “남궁의 피에 도대체 뭐가 있는 것인지 궁금하구려. 명이도 그렇더니, 남궁 소저까지.” 화악-! 풀어헤친 기세에 바람이 인다. 푸른 바람이 청송의 몸을 휘감는가 싶더니, 이내 그의 검에서 붉은 기운이 치솟기 시작했다. 청풍적하검법(靑風赤霞劍法). 청풍검법의 상위 검법이다. 청송조차 익힌 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허나 모자란 숙련도로도 그 위력은 청풍검법과 궤를 달리한다. 청송은 청풍적하검법의 기수식을 취하며 이를 드러냈다. “가겠소.” “언제든지요.” 파악-! 청송이 달려든다. 그 앞에 선 남궁수아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내 심상의 지향점.’ 저 멀리에 있는 어딘가. 끝내 다다를 목표. 상상하고, 담아내면서, 그녀는 검에 벼락을 깃들였다. 파지지직-! 푸른 전류를 휘감은 대검이 크게 휘둘러진다. 청송은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쳤다. 콰아앙-! 충돌과 동시에 청송이 움직였다. 충격을 허공에 흘려내고, 은은히 스미는 노을처럼 끈질기게 그녀의 곁을 맴돈다. 남궁수아는 대검을 마치 또 하나의 몸처럼 움직였다. 어떨 때는 남궁수아가 대검을 휘두르고, 어떨 때는 대검이 남궁수아를 휘두른다. 대검을 지지대 삼아 높이 뛰어오른 그녀가 몸을 회전시키며 대검을 치켜들었다. 섬전창뢰심공(閃電蒼雷心功). 서준이 창시한 기본공. 그 안에 깃든 벼락을 엿본다. ‘그 무엇보다도 빠르고, 강렬하게.’ 화악-! 기다란 대검 위로 짙푸른 검기가 피어오른다. 이어서 섬전십삼검뢰(閃電十三劍雷). 츠츠츳-! 피어오른 검기가 뇌기(雷氣)로 화한다. 그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는 우선 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서준이 상상하던 벼락은 애초부터 남궁수아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 그가 가지를 뻗어 그려낸 벼락이 이번에는 남궁수아의 검에 담겼다. “흐읍…!” 전신의 힘을 쥐어짜낸 그녀가 대검을 휘둘렀다. 제왕검형의 검로를 따라 펼쳐진 검법이 청송의 머리로 떨어져내린다. 꽈르릉-! 무수한 벼락이 일대에 내리친다. 제왕검형 특유의 공간을 짓누르는 압력이 벼락으로 화한 것이다. 그 몰아치는 푸름에 맞서, 청송은 크게 웃으며 검에 새빨간 노을을 깃들였다. “지지 않소…!” 두 검이 맞닿는 순간, 남궁수아는 보았다. 바늘 틈 같은 좁은 틈새. 그 사이의 푸른 벼락. 시선을 빼앗긴 순간 혼을 빼앗기듯 시야가 희게 물들고, 번쩍─────────!!! 어느덧 그녀는 벽 너머에 있었다. 등 뒤로 벽이 무너져내린다. 그녀는 부러진 청송의 검과, 자신의 대검을 가로막고 있는 또 하나의 검을 바라보며 희게 웃었다. “어땠어?” “죽여주네.” 어느새 자리에서 튀어나와 남궁수아의 검을 가로막은 서준이 씩 웃었다. “축하해. 이제 가능하겠네.” 이제는 사용할 수 있으리라. 생사타통공(生死打通功). 임독맥을 뚫어내는 절세의 무공을. 남궁수아는 비로소 초절정으로 향하는 길목에 섰다. * 남궁수아의 대련이 끝남과 동시에 용봉지회의 32강이 끝났다. 16강을 시작하기 전 나흘 간의 휴식 시간이 주어지는 바, 서준과 일행은 뭘 하고 쉴지 고민하며 대련장을 나섰다. “오늘 대련은 정말 인상 깊었소.” 일행을 뒤따라 온 청송이 씩 웃으며 포권했다. “운이 좋았어요. 사실 저도 실마리를 완전히 쥔 게 아니었던지라….” 남궁수아의 말에 청송이 고개를 저었다. “이 청송, 운으로 이길 수 있을 만큼 수련을 헛으로 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하오. 축하드리오.” “후후, 고마워요.” 남궁수아와 짧은 대화를 나눈 청송은 이내 그와 함께 온 사내 하나를 소개했다. “명이 자네도 이쪽은 처음 보지?” 사내가 슬쩍 포권했다. “뭐…, 점창의 은위룡입니다.” 의욕 없이 축 처지는 목소리다. 용봉지회에 썩 관심이 없어 보였는데, 다른 의미가 아니라 그냥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은 듯보였다. 생각대로인지, 은위룡은 짧게 서로의 소개를 마치자 적당히 인사한 뒤 자리를 떠났다. 청송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예전에는 그리 의욕이 넘치던 친구였는데 말이야.” 남궁명이 물었다. “혹시 점창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겐가?” “아니, 그런 건 아닐세. 그냥…. 조금 방황하는 것이겠지.” 드문 일은 아니다. 어릴 적부터 십육명문에서 자란 이들은 자연스럽게 무공에 발을 들이게 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목적을 잃고 헤매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이대로 무(武)의 길을 계속 걸어나가도 되는 것인지. 의외로 많은 이들이 고민하는 문제였다. 얘기를 들은 서준은 생각했다. ‘그러니까 결국 진로 고민이라는 건가?’ 무의 길을 대충 현대에 비유하자면 아마 의대쯤 될 거다. 중원에서 그보다 인정받는 가치는 없기에. 결국 꿈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청소년들이라는 것 아닌가. 어쩌면 아직 꿈을 찾지도 못했을 수도 있고. “귀엽네.” 완전 꼬맹이들이잖아? 서준이 허허 웃었다. “좋을 때지. 암. 그렇고 말고.” 그런 그를 보던 춘봉이 한숨을 내쉬었다. ‘또 머저리 같은 생각 하나 보네.’ 이제는 안 봐도 뻔했다. * 지긋지긋한 회의가 시작되었다. 그래도 평소와는 다르다. 오늘의 안건은 무려 따끈따끈한 새것! 겁도 없이 감히 하남까지 기어들어와 황실의 대장군을 암살한 극악무도, 후안무치한 북해빙궁의 작태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이 일은 결코 가볍게 넘겨서는 아니되오. 사흑련 놈들이 하남까지 기어들어와 암살에 성공했다는 것은 정파의 망신이외다.” 회의가 시작된 지 한 식경(약 30분~60분) 정도 된 시점. 여전히 회의는 지지부진했다. 심각한 일이라는 건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일이었지만, 막상 흉수가 어떤 수법을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는 까닭이다. 도대체 그만한 무인이 무슨 수로 하남까지 잠입할 수 있었으며, 그 짧은 시간에 대장군을 암살했고, 수많은 무인들을 속인 채 흔적도 없이 하남을 빠져나갈 수 있었는가.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나는 용봉지회를 계속해야 하는지조차 의문이로군. 후기지수들이 떼몰살이라도 당한다면 어쩔 생각들이시오?” 당가의 장로가 서늘한 눈을 한 채 물었다. 그 물음에 동창의 제독이 한 마디 덧붙였다. “또한 하남에서 대장군이 암살당한 것에 대해 소림은 어찌 책임을 지실 생각입니까?” 소림이 주최하는 용봉지회이며, 또 소림의 영역에서 벌어진 암살이다. 제독이 방장에게 따지듯 물었으나, 방장은 태연했다. “삼황자가 암살당했다면 소림이 물론 책임을 졌을 것이오.”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황실의 대장군까지 소림이 보호해야 하오? 그것은 오히려 대장군에게 모욕이 아닐까 싶소만.” “방장…! 무슨 말씀을 그렇게…!” 방장이 손을 들어 말을 끊었다. “또한 용봉지회는 계속하는 것이 옳다고 사료되오. 지금 용봉지회를 중단한다면 오히려 정파 무림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겠지. 사흑련에게 굴복한 것이 아니냐며 말이오.” 방장의 말에 당가의 장로가 불편한 표정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방장이 말을 이었다. “우선 지금으로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흉수가 북해빙궁 소속이라는 것 정도요. 또한 황실의 대장군을 그 짧은 시간에 암살할 정도의 실력자라는 것이지.” 방장이 당가의 장로에게 시선을 주었다. “당 장로, 암살에 관해서는 그대에게 묻는 것이 맞을 듯싶소만.” “후우….” 당가와 암살. 공공연한 비밀이라고는 하지만, 대놓고 이야기가 나오자 당가의 장로는 내키지 않는 듯 표정을 찌푸렸다. “암살은…. 그래, 방도야 여러 가지가 있소. 떠오르는 것도 하나 있고.” “그게 무엇이오?” “대장군을 그 짧은 시간 내에 암살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오. 그만한 실력자라면 정말로 빙궁주 정도는 되어야겠지.” 북해빙궁주. 칠사흑문에 속한 북해빙궁의 궁주이자, 화경의 무인이다. 당가의 장로는 자신에게 집중된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허나 빙궁주가 하남까지 기어들어오는 미친짓을 벌일 리는 없다고 생각되오.” 회의장의 대부분이 동의했다. “그렇다면 흉수는 태생부터 대장군을 암살하기 위해 키워진 누군가겠지.” 무인의 기감이라는 것은 완벽하지 못하다. 인간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이상 모든 정보를 항시 받아들일 수는 없으며, 그 까닭에 기감은 낯섦과 익숙함을 구별한다. 익숙한 기척이라면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놓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것을 이용한 암살법이 하나 있다. 아주 처음부터 암살 대상의 취향에 맞게 자라도록 한 살수를 키워내 잠입시키고, 살수가 암살 대상과 극히 친밀한 관계가 되었을 때 비로소 암살을 시도하는 것이다. 길게는 몇십 년까지도 투자해야 하는 암살법인데다, 살수가 암살 대상과 진심으로 교류를 나누는 등 실패하는 경우가 많아 그다지 잘 쓰이지 않는 방법이기도 했다. “허나 당 장로, 그렇다면 살수가 포위를 뚫고 벗어난 방법은 무엇이라 생각하오?” “그에 대해서는 나도 아는 바가 없소. 잠영술이 극에 달한 것 아니겠소?” “흐음….” 당 장로의 의견에 찬성하는 이는 거의 없는 듯했다. 그때 가만히 회의를 듣고 있던 서준이 나섰다. “이번 일로 봐서는 사흑련 쪽에 대단한 살수가 하나 있는 것 같은데, 이놈이 이전에도 뭔가 일을 벌이지 않았을까요? 거기서 단서를 찾는 건 어때요?” 최근 보여준 일들로 인해 발언권이 커진 진기재천의 말이다. 사람들은 그럴 듯하다 생각하며 홍안개를 보았다. 십육명문 내에서 정보로 가장 유명한 것이 개방인 까닭이다. “비슷한 사건이라….” 머리를 벅벅 긁던 홍안개가 화산의 장로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화산의 장로가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이미 알고 계신 분이 몇 계실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최근 종인 장로께서 실종되셨습니다.” “종인 장로라면, 그 만마참 종인을 말하는 거요?” “그렇습니다.” “설마 종인 장로가 사흑련의 살수에게 암살이라도 당했다는 말이오?” 계획대로다. 서준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화산의 장로가 침음을 흘렸다. “현장에 남아있는 무공의 흔적들은 대부분 지워졌으나…, 남아있는 검흔으로 판단하건대….” “왜 이리 뜸을 들이는 거요?” 머뭇대던 화산의 장로가 말을 이었다. “으음…. 화산에서는, 그것이 황운신검의 흔적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