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에 걸쳐 치러진 용봉지회의 64강이 무사히 끝났다. 뭐, 첫날에 약간 사고가 있긴 했지만…. 죽은 사람은 없으니 이 정도면 무사하다 봐도 된다. 그렇게 확정된 32명의 진출자들. “와, 서른두 명 중에 세 명이 우리 편이네.” 춘봉, 남궁수아, 남궁명. 셋 모두 무사히 32강에 진출했다. 아니, 정확히는 너무 싱겁게 진출했다. 남궁수아와 남궁명의 상대는 예선에서 올라온 무인들이었는데, 보는 사람이 다 안타까울 정도로 격차가 심했다. 십육명문과 그렇지 않은 문파 사이에는 그만한 벽이 존재했다. 물론 눈에 띄는 이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양소홍이라 했던가? 그 사람 창 잘 쓰더라.” 서준의 말에 남궁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눈에 띄더군요. 십육명문의 자제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습니다.” “어디 유명한 문파 출신인가?” “아뇨, 호남의 중소문파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 “오. 인간 자체가 강한 느낌인가 보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아예 허황된 것은 아닌가 보다. 그 용이 어디까지 날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서준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드물게도 공식적인 일정이 있었다. 전에 말했던 그거다. 십육명문이 모여서 한다는 회의. 현재 일행으로는 남궁명, 패진광, 남궁혁이 있었다. 패진광은 십육명문이 아니지만, 원래 권왕쯤 되면 십육명문이고 뭐고 이런 자리에도 끼워준다. 존재 자체로 대문파와 같은 취급을 받는 것이다. 춘봉이도 바라면 올 수 있었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라며 그녀가 사양했다. 뭘 하더라도 신검금가의 위상을 어느 정도 복구한 뒤에 하겠다는 모양이다. 회의 장소는 전과 같이 소림. 일행과 함께 도착한 소림사의 정문은 꽤나 낯설었다. “이야, 그러고 보니까 정문으로 들어가는 건 또 처음이네.” 저번에는 소림사 한복판에 꼬라박아서 정문으로 들어가보지는 못했다. 나와는 봤지만. “자랑이다.” “어허, 영감님 쉿.” 패진광과 투닥대며 안에 기별을 넣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승려 하나가 마중을 나왔다. 반가운 얼굴, 혜운이다. “반갑습니다, 시주.” “오, 혜운스님.” 합장하는 그를 향해 서준이 씩 웃었다. “대련 봤어요. 많이 늘었던데요?” “이 시주 덕분입니다. 저번의 대련이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저번 대련으로 혜운의 경지는 절정의 끄트머리에 다다랐다. 딱 한 발자국만 더 내디딘 뒤, 생사현관을 뚫고 정기신의 균형을 무사히 유지하면 초절정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어려워서 문제지만. 서준은 혜운의 뒤를 따르며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았다. 주로 저번에 황실을 상대로 한 번 뒤집어 엎은 이야기였다. 혜운의 말에 따르자면 다른 문파들의 반응은 그리 나쁘지 않다는 모양이다. 명분 자체가 서준에게 있기도 했고, 주양일의 목을 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가문과 스승이 모욕당했음에도 사흑련과의 전쟁이라는 대의를 위해 분루를 삼킨 인격자 정도 된다나? “음, 그거 보면서 솔직히 좀 조마조마했지.” 패진광이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또 그냥 눈깔 돌아가서 황실 놈들 모가지를 죄다 돌려놓는 줄 알았지 뭐냐.” “에이, 과장은.” “허허, 네놈 하는 짓 보면 대마두가 따로 없는데 과장은 무슨.” “뭐, 싸우자고?” “소림 또 부수려고? 난 모르는 일이다.” “아오…!” 툴툴대다보니 어느새 회의장에 도착했다. “곧 다시 뵙겠습니다, 시주.” 혜운이 떠나가고, 눈앞의 건물을 보며 서준이 머리를 긁적였다. “먼저 들어가시죠?” 남궁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마.” 사실 배분상 이게 맞다. 남궁혁이 선두에 서서 건물 안에 들어서자 일순 회의장이 조용해졌다. “…창천대해가 남궁으로 돌아왔다는 말이 정말이었군.” 남궁혁은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신경 쓰지 않고 자리를 찾아 앉았다. 서준 역시 자리에 앉아 회의장에 모인 면면들을 살폈다. ‘많네.’ 모인 문파만 열다섯.(곤륜파는 마교를 견제하느라 오지 못했다.) 각 문파에서 한 명씩만 온 것도 아니라 사람이 바글바글하다. 심지어 그 인원들이 대부분 한 가닥씩 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그들이 의식하지 않고 흘리는 기세로 회의장이 요동칠 지경이었다. 만약 범인이 멋도 모르고 들어온다면 당장 눈을 까뒤집고 쓰러지지 않을까? ‘저놈 이름이 황보…, 뭐더라. 황보준이었나?’ 아는 얼굴들을 찾으며 시간을 때우길 잠시. 회의를 주관할 소림의 방장을 제외한 모든 인원이 모였다. 그 많은 이들 중 단연 가장 많은 시선을 받는 이가 하나 있었으니. 굳이 말할 것도 없이 서준이었다. 특히 가장 강렬한 시선을 보내는 건 황실. 주양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아마 황태자가 아니라 오지 못한 듯싶다), 특이하게도 갑주를 입은 중년인 하나가 서준을 빤히 노려보았다. “저놈 누군지 알아요?” 패진광에게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의 대장군이지.” “세요?” “약하진 않을 텐데…, 글쎄다. 싸워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군.” “흠. 계속 쳐다보는 걸 보면 함 뜨자는 거 아닐까요?” “너는 지랄 좀 하지 마라.” “아니….” 춘봉이가 없으니까 이 영감이 잔소리네. 서준은 툴툴대며 대장군의 시선을 무시했다. 그렇게 적당히 시간을 때우고 있으니 곧 소림의 방장이 도착했다. “늦어서 미안하오.” 그는 변명 없이 사과 한 마디만 툭 던지고 곧바로 본론을 꺼내들었다. “천마가 움직였소.” 회의장의 웅성거림이 멎었다. * 깨달았다. 회의는 영 적성에 맞지 않는다. 서준이 보아하니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어 보였다. 그야 여기 있는 치들 대부분이 먹물 먹은 사람들도 아니고, 그냥 칼 휘두르는 무인들인데 회의가 적성에 맞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뭐…, 물론 무인이라는 놈들은 대부분 이상한 족속들이라 열심히 회의에 참여하는 인원들도 꽤 많긴 했다. [이거 언제까지 해요?] 패진광에게 전음을 보내자 그가 쩌억 하품을 했다. [나도 모른다.] [슬슬 집 가고 싶은데.] [가면 되지 뭐가 문제냐.] [당연히 문제 아닌가…?] [남궁혁이도 있으니 상관 없을 것 같은데?] [흠. 일리 있는데?] 서준은 납득하며 뚱하니 회의장을 둘러봤다. 지원을 얼마나 보낼 것이며, 이권은 어떻고, 마교와 사흑련의 관계가 어쩌고, 세력이 저쩌고…. 열심히 떠들어대는 이들 사이로 지루한 듯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멍이나 때려대는 사람들이 있다. 그중 아는 얼굴이 둘. 청성의 월망과 황보세가의 황보준이다. 특히 황보준. 저놈 꽤 오랜만이다. 심심함을 참지 못한 서준이 슬쩍 전음을 보냈다. [인사 안 하지.] […뭐라고?] [어허, 이 건방진 새끼. 눈이 마주쳤으면 인사를 해야 될 거 아니야.] 인성질을 해대니 황보준이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인다. 왜 저렇게 고분고분하지? 아쉬움에 혀를 찬 서준이 조금 더 황보준을 갈궜다. 발끈해서 반박해주길 원했는데, 아쉽게도 황보준은 대단한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원래 저런 친구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무척 아쉽다. 그러다 문득 전에 만났던 아이들 생각이 났다. 서휼과 희린이었나? 납치당한 여동생을 구해준 뒤 무공 하나를 건네줬었는데, 잘 익히고 있으려나 모르겠다. 청풍대의 자청이 교관 역으로 따라갔으니 어련히 잘 하고 있을 것 같긴 한데…. [소식 들은 거 없냐? 니네 구역이잖아.] […잘 지내는 모양이다.] [확실해? 아무 말이나 하는 거 아니지?] [직접 들은 내용이니 확실할 거다. …아마도.] [아마도 이러고 있네.] 서준이 혀를 차는데, 전음 하나가 끼어들었다. [둘이서 놀지 말고 이 늙은이도 좀 끼워주는 게 어떤가?] 전음이 날아온 방향을 돌아보니 늙은 거지 하나가 히죽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누구세요?] [어허, 딱 보면 모르나? 거지잖은가.] [아니, 거지 누군데요.] [취구개라는 이름 기억하나?] 취구개? 이름은 들어봤다. 기련문주와 만났던 전장. 서준이 그곳에 도착하기 전 죽음을 맞이한 개방의 초절정 고수 아니던가. [그놈 동기지. 그놈이 그렇게 쉽게 갈 줄은 몰랐어. 초절정 씩이나 돼서 말이야.] [어…,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삼고빔은 무슨.] […아니, 어르신. 그딴 줄임말은 어디서 배웠어요?] [요즘 젊은 놈들은 이런다던데? 틀렸나?] [틀렸는데요.] [그거 아쉽군.] 노인이 끌끌 혀를 차더니 대뜸 이름을 밝혔다. [나는 홍안개(紅顔丐)라 하네. 이름은 기억도 잘 안 나니 그냥 홍안개라 부르게.] [홍안이요? 젊어 보이는 얼굴은 아닌데.] [그야 젊었을 적 붙은 별호니 그렇지.] [아하.] [아무튼 자네 얘기는 많이 들었네.] 홍안개는 심심했는지 서준을 붙잡고 한참 동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서준과 같은 전장에 섰던 거지들이 칭찬을 그렇게 해댄다는 둥,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 죽는 걸 보니 자기도 갈 때가 된 것 같다는 둥. 비겁한 황보준이 슬쩍 빠졌기에 홍안개의 상대는 오롯이 서준이 맡게 되었다. ‘집 가고 싶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여기까지 왔는지. 그냥 집에서 춘봉이 볼따구나 주무르고 있을걸…. 짙은 후회가 들었다. * 비슷한 시각, 남궁세가. 당주로 총관이 있는 금주당은 근래 들어 분위기가 요상했다. 서준이 두 신공을 창안한 지 몇 달이 되어 슬슬 그 성과가 눈에 띄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허허….” 남궁세가의 총관, 진가위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왜 인력이 남지?” 물론 이유야 안다. 섬전창뢰심공과 섬전십삼검뢰 덕분이다. 섬전창뢰심공으로 인해 무인들의 성장이 빨라졌고, 섬전십삼검뢰로 인해 일류가 안 되는 이들이 검기(劍氣)와 유사한 기예를 부릴 수 있게 됐다. 지금 당장 큰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은 섬전십삼검뢰였다. 본디 일류 무인이 이류, 삼류 무인을 상대로 압도적인 격차를 보일 수 있는 것은 검기 탓이 크다. 이류 무인이라도 검기를 다룰 수 있다면 일류 무인과 겨뤄볼 만한 것이다.(애초에 검기를 다룰 수 있는 경지를 일류라 하긴 한다.) 그렇다 보니 섬전십삼검뢰로 검기의 감을 익혀 일류에 다다르는 속도가 빨라진다는 것은 둘째 치고, 당장 이류 무인들이 일류 무인이 할 수 있는 일을 대신할 수 있게 되다 보니 부족하던 일손이 순식간에 충당되었다. 덕분에 골머리를 앓던 총관 역시 할일이 대폭 줄어들었음은 말할 것도 없는 바. 하지만 노동자들의 귀감, 진 총관은 다른 이들과 사고방식이 약간 달랐다. 시간이 남는 김에 일을 만들어서 하기 시작한 것이다. ‘도련님께 해드릴 만한 것이 없나?’ 도련님께서 필요한 것이 없다며 미루고 미뤄둔 보상들을 도대체 무엇으로 챙겨드려야 하는가. 이게 정말 어려운 일이다. 무려 대남궁세가에서 도련님께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무공은 이미 제왕검형까지 익히셨고, 영약도 딱히 필요가 없다 하시고, 돈에도 욕심이 없으시고…. 보통 무인들에게 줄 만한 보상은 그 선에서 끝이 나는데, 도련님은 조금 상황이 달랐다. ‘그러면 뭐가 있을까….’ 무인으로서 필요한 게 없다면 남자로서? 그러면 여자? 당연히 기각. 아가씨나 가주님께 칼로 찔리고 싶진 않았다. 구하기 힘든 명주(名酒)? 도련님께서 그 정도로 술을 즐기시는 것 같진 않았다. ‘정말 해드릴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단 말인가?’ 멍하니 고민하는 총관을 바라보던 호위, 백결이 말을 꺼냈다. “총관님, 그러면 혹시 검은 어떻습니까?” “검? 도련님께서 검도 딱히 필요 없으시다 하셨는데.” “아마 도련님께서 정말 좋은 검을 써보신 적이 없어서 그러신 게 아니겠습니까?” “음…. 아가씨 말씀을 들어보니 그러신 것 같기는 했지.” 생각해보니 그나마 검이 가장 나아 보인다. 초절정 고수가 만족할 만한 명검은 구하기가 어렵다? 어지간한 대문파라면 그럴지 몰라도 이곳은 대남궁세가다. 명검 하나 구하는 건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평범한 명검 정도로는 안 되겠고.’ 도련님이 쌓으신 공적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그 정도로는 도련님의 성에 차지도 않을 터. 신병이기(神兵利器)쯤 되는 명검이어야 얼추 균형이 맞지 않겠는가. 날이 잘 드는 데서 그치지 않고, 무기 자체가 공능을 가지고 있는 신병이기라면 도련님께도 도움이 될 듯싶다. 아마 천인신단공(天人神丹功)을 창시한 공적 정도는 그것으로 보상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정리한 총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결, 혹시 신병이기 구할 만한 곳 아나?” “…그게 구한다고 구해지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뭐, 못 구할 것도 없지 않겠나?” 총관은 대수롭지 않게 서류를 작성하고 인장을 찍었다. “일단 가주님께 결재부터 받지.” 도련님께 어울리는 신병이기가 뭘까. 마검? 아니면 아예 검 말고 다른 종류? 총관의 머릿속에는 결재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