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말이지만 서준이 냅다 모든 걸 훌훌 털어내고 서역으로 떠나버리진 않았다. 아직 심마는 해결조차 못 한 데다, 사흑련이니 뭐니 정세도 복잡하고,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다. 서역에 대한 궁금증의 우선 순위를 따져보자면 저 밑바닥 언저리 어딘가. 나중에 중원의 정세가 조금 안정되면 두 번째나 세 번째 신혼여행쯤 해서 가보면 되지 않을까, 싶은 정도였다. 그런 까닭에 남궁세가로 복귀한 서준을 맞이한 것은…, 성난 금춘봉의 포효였다. “아니…!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니까!? 응? 그냥 휘두르라고! 직선으로! 쫙! 슉! 어? 이게 안 돼!?” * 인간을 이루는 모든 것들은, 아이가 채 어미의 뱃속에서 나오기도 전부터 이미 결정되어 있다. 육신과 정신, 환경, 재력, 재능…, 뭐 그런 것들. 태어난 이후 타고난 것들을 갈고닦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미 그들의 출발선은 처음부터 정해져있는 셈이다. 비연의 말을 빌리자면, 태어날 때부터 너무 많은 것들이 정해져버렸다. 비연의 재능이 부족하다 못해 미천하다고밖에는 표현하는 게 불가능한 수준인 것도 비연의 탓은 아니다. 그냥 비연이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노력이야 둘째치고 제 재능을 비연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기에. 그래서 춘봉은 심경이 복잡했다. 스스로 오롯하기 위한 재능조차 없는 뒷골목 고아 새끼, 앞으로 나아갈 기회조차 박탈당한 꼬마 아이에게 그녀는 기회를 주고자 했다. 근데 진짜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니! 그, 아니! 어? 그…, 아니이…!” 춘봉이 방방 뛰며 제 손에 쥔 목검을 휙휙 휘둘렀다. “이렇게 말이야. 곧게 휘두르라고. 응? 봐봐.” 춘봉이 눈앞에 놓인 짚더미를 향해 목검을 휘둘렀다. 쉭. 목검이 한 치의 걸림 없이 짚더미를 베고 지나갔다. 그리고는 짚더미의 윗부분을 밀었다. 깔끔하게 베인 짚더미가 툭 하고 넘어간다. 춘봉이 그 단면을 가리켰다. “봐봐. 평평하지?” “네, 네….” “넌 지금 이렇게 휘두르고 있다니까?” 춘봉이 다시 한 번 목검을 휘둘렀다. 콰악-! 이번에는 목검이 짚더미에 틀어박혔다. 터져나가듯 화악 흩어지는 지푸라기들. 비연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검로가 곧지 않다는 말이잖아요….” “맞아! 그거야!” 일단 춘봉이 휘두른 검이기에 짚더미의 윗부분이 날아가긴 했다. 그 단면…,이라 해야 할지 잔인무도한 살해의 현장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을 짚더미의 (아무튼) 단면은 처참했다. 울퉁불퉁하고 몇몇 군데는 채 베이지도 않은 채 뜯겨나간 모습. ‘어쨌든 머리는 부쉈으니 좋았쓰!’가 아니다. 이래서야 검을 쓴다고도 말할 수가 없다. 그냥 둔기를 쓰고 말지. “자, 다시 한 번 해보자!” 춘봉이 애써 답답함을 누르며 비연에게 종베기를 시켰다. 조금 있어 보이게 말하자면 삼재검법의 태산압정. 간단히 말해 세로 베기다. 부- 웅~ 비연의 검이 비틀비틀 위에서 아래로 내려왔다. “뭣….” 춘봉의 입이 쩍 벌어졌다. 도대체 왜? 그냥 아래로 베는 게 안 되나? 그냥 허공에 검을 놓고 툭 떨구는 게 저것보다는 곧게 떨어질 것 같았다. “갸아악….” 혹시 비연이 상처라도 받을까, 마음껏 비명을 내지르지도 못 한 춘봉이 답답함에 덜덜 몸을 떨었다. 낄낄 웃어대는 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우리 춘부이, 선생님 놀이 하는 거야?” “넌 이게 놀이로 보이냣…!” 자연스럽게 소리친 춘봉이 번쩍 눈을 떴다. “이서준!” “그래, 오빠 왔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우다다 달린 춘봉이 서준의 옆구리를 향해 능숙한 드롭킥을 구사했다. 뻐억-! 그 수려한 발차기에 얻어맞고 날아간 서준이 웨엑! 입에서 피를 토했다. “어…?” 춘봉의 낯이 희게 질렸다. “범인은…, 금춘봉….” 토해낸 피로 다잉 메시지를 남긴 멸사천군 이서준은 그렇게 눈을 감았다. “오, 오빠아아…!!” * “이 씨발새끼야! 장난을 칠 게 따로 있지!” 얼굴이 시뻘게진 금춘봉이 제자리에서 쾅쾅 뛰었다. 얻어맞진 않았다. 심마 덕분이다. “아니, 피 토한 건 장난 아니었는데.” “그, 그건….” 춘봉이 순식간에 쭈그러들어 우물쭈물 사과했다. “미, 미….” “미?” “미친 새끼야! 니가 잘 피했어야 될 거 아니야!” 정정한다. 딱히 사과는 아니었다. 무슨 인성 터진 개차반 같은 말을 토해낸 금춘봉이었지만, 저 쬐깐한 얼굴에 ‘미안해 죽겠음’이라는 글자가 떡 하니 쓰여 있다. 그래서 서준은 그냥 낄낄 웃으며 손아귀 위로 혼원을 그러모았다. 그 칠흑, 만물의 온상, 말로써 형용할 수 없는 고차원적인 무언가에 춘봉의 입이 딱 벌어졌다. “이게 혼원이라는 건데 말이야. 내가 별 생각 없이 심상세계를 걷어내고 그 안을 깊숙이 들여다봤거든. 근데 거기에…, 우욱…!” 후두둑! 서준의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춘봉의 낯이 창백해졌다. “야, 야야, 잠깐만.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퉤! 피 섞인 침을 뱉어낸 서준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가만히 있으면 멀쩡해.” 피를 토한 건 혼원을 쓰며 심상 속을 깊숙이 들여다봐서 그렇다─라고, 서준이 손 위에서 혼원을 굴리며 말했다. 눈을 부릅 뜬 춘봉이 빼액 소리쳤다. “그러면 좀! 그걸! 으끼야아아악…!” 포효와 함께 답답한 속을 뚫어낸 금춘봉이 씩씩대며 말했다. “쓰지 말라고! 그거! 혼원인지 뭔지! 왜 피 토하는 거 알면서 그걸 계속 쓰고 있는 건데!” “아니, 꼴받잖아. 지가 뭔데 내가 내 무공 쓰겠다는 걸 간섭해.” 심마와 기싸움을 해대는 제 오라비를 보며, 춘봉은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해탈한 석가모니가 지었을 법한 미소였다. 그리고는 옆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비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미안해. 너 정도면 사실 말을 엄청 잘 알아듣는 친구였구나?” “어, 음….” 비연이 데굴 눈을 굴리다 고개를 푹 숙였다. 서준도 그제서야 비연에게 관심을 가졌다. “근데 얘는 뭐야?” * “아, 뒷골목에서 납치해왔다고?” 춘봉에게 설명을 들은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얘기로 들었을 때는 조금 많이 아주 약간 정도는 금춘봉을 떠올리게 하는 꼬마라 할 수 있었다. 이야기 속 나름 건방지게 굴던 뒷골목 꼬마가 고분고분해진 이유? 그런 건 굳이 듣지 않아도 뻔하다. 원래 웬만한 사람들은 남궁세가에 들어오면 다 겁먹는다. 서준에게는 그냥 집이지만, 다른 사람들 입장에서는 왕궁에 들어온 셈이니까. 춘봉은 그런 서준을 보며 물었다. “응.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될 것 같아?” 이서준이 그렇게 안 보여도 나름 자수성가의 전설쯤 되는 놈이다. 뒷골목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 춘봉의 도움 약간과 제 미쳐날뛰는 재능만으로 이 자리까지 올라온, 그야말로 자수성가의 화신! 어쨌든 자신이 아는 무인들 중 가장 대단한(춘봉은 남궁진천이 살아있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다) 사람에게 묻는다면 무언가 답이 나오지 않을까, 춘봉은 생각했다. 그런 동생의 믿음에 오라비가 답했다. “그건 말이지.” “응.” “다른 길을 찾아야 되는 게…?” 춘봉의 빤한 시선이 서준의 낯짝에 틀어박혔다. 얼굴이 따가웠지만, 서준은 나름 진지하게 한 대답이었다. “어떤 분야에 재능이 없으면 다른 길을 찾아야지. 무(武)라는 게 너무 좋아서 굶어 죽어도 상관이 없으면 또 몰라. 어찌 됐든 성공하는 게 목표인 이상 자기한테 맞는 길을 찾는 게 맞지 않나?” “네가 무림에서 스스로 오롯할 수 있는 방법은 무밖에 없다며.” “그건 내 생각이잖아. 접시 닦기 장인 같은 사람도 스스로의 일에서 오롯함을 찾으면 그걸로 된 거지. 세상이라는 건 결국 나라는 관측자 입장에서 정의되는 거잖아?” 서준은 그리 말하며 슬쩍 비연이라는 꼬마를 살폈다. 주눅든 채 푹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그 눈의 깊은 곳, 뜨겁게 타오르는 감정은 여전했다. 사실 저 비연이라는 아이가 어찌 되든 서준의 알 바는 아니다. 서준은 제 주변 사람만 잘 살면 그걸로 만족했다. 세상 모든 사람을 챙기고자 하는 대단한 마음가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뭔가….” 비연을 흘끔대며 입술을 삐죽이는 자신의 동생, 이제는 약혼자, 심상 속 마귀를 때려잡아준 거대 춘봉을 위해서라면 그러지 못할 이유는 또 없다. “뭐, 그래. 고민 좀 하는 게 어려운 건 아니니까.” 춘봉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서준이 씩 웃었다. “일단 계속 가르쳐 봐. 아니지, 지금은 뭐 가르치고 있는 건데?” “얘네 문파에서 배우던 검법이 있대. 근데 일단 그 전에 기초부터 닦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삼재검법 알려주는 중.” “오, 삼재검법.” 추억에 젖은 서준이 고개를 주억였다. “그때 먹었던 고기 만두가 진짜 맛있었는데.” “난 먹고 왔는데.” “뭣.” 믿고 있던 금춘봉에게 배신당한 서준이 입을 떡 벌렸을 때였다. “서준아!” 어디선가 남궁수아가 급하게 달려왔다. 당황한 듯 낯이 희게 물든 그녀가 허겁지겁 서준의 몸을 살폈다. “괜찮아!? 피 토했다면서!” “아, 그거. 우리 춘부이 발차기에 얻어맞는 바람에….” “뭐?” 남궁수아의 푸른 눈이 환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시린 눈이 춘봉을 향했다. “금 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피를 토할 정도로 때리면 안 되는 거잖아.” 조금 낯설 정도로 뾰족한 말투였다. 놀란 서준이 눈을 크게 떴다. 평소 나긋나긋하고 온화하던 남궁수아가 춘봉에게 화를 내다니? 장난 삼아 한 말이었는데 상상 이상으로 격한 반응이 돌아왔다. 물론 그 분노를 받아내는 당사자, 춘봉은 그냥 너무 억울했다. “아니, 그…. 맞긴 한데!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그게…! 그래도…!” 몸을 덜덜 떨던 금춘봉이 결국 제 자그마한 머리통을 콱 붙잡았다. “으, 으끼야아아악…!!” 금춘봉, 득음하다! * 서준이 아무 생각 없이 제 심마도 미뤄둔 채 비연이라는 낯선 꼬마의 무공을 봐주겠다 말한 것은 아니었다. 외부 부착형 심마 억제기 금춘봉과, 마음의 평안을 형상화한 남궁수아가 곁에 있으니 당장 심마가 악화될 일은 없을 뿐더러, 비연의 고민이 서준 자신의 심득과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재능. 타고난 것. 그 형태 없는 목줄에 대해 고민하다 보면 심마 역시 해결… ‘…할 수 있나?’ 그건 잘 모르겠다. 서준이 머리를 긁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