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릉-! 검광으로부터 걸려온 통신을 눈앞에 두고, 서준은 차분히 숨을 가다듬었다. ‘어지간하면 성공할 수 있다.’ 검광. 검에 미친놈. 놈이 그 이름값을 한다면, 이것이 함정임을 알아차린다 해도 당장 달려올 수밖에 없다. 화경쯤 되면 다들 집착하는 게 하나씩은 있다고 했던가? 그중에서도 이 검광이라는 놈의 증세는 심각한 편이라 하니, 만약 이놈의 검을 생각하는 마음이 서준이 춘봉을 생각하는 마음의 십 분의 일 정도만 된다고 하더라도 이 작전은 성공이 보장되어 있다. 입장 바꿔 생각해서 금춘봉 납치범 A 씨가 ‘금춘봉을 데리고 있다. 당장 달려오지 않으면 금춘봉의 목숨은 없다.’ 따위의 협박을 한다 치자. 그 A 씨가 설령 현경의 무인이라 한들, 서준은 당장 그 A 씨발놈의 머리통을 뽑아버리고 금춘봉을 구출하기 위해 미친듯이 경공을 펼칠 것이다. 역으로 기다리는 놈을 함정에 빠뜨리려 한다? 그런 짓은 불가능에 가깝다. 언제 납치범이 춘봉을, 그러니까 검광의 입장에서는 황운신검을 들고 날라버릴지 모른다. 간절한 데다, 본래부터 일신의 무력에 자신이 있는 무인이라면 괜히 시간을 끌었다 일을 그르치는 것을 원하지 않을 터. 그러니 이 작전은 사실상 반드시 성공할 수밖에 없는 작전이다. 즉, 연기가 서툴러도 된다. 어차피 검광이라는 놈도 백윤을 아주 잘 아는 건 아니라 하니, 조금 어색하다 해도 놈은 이곳까지 올 수밖에 없다. “크흠!” 목을 한 번 가다듬은 서준이 통화 연결 버튼을 눌렀다. 띠링- 경쾌한 소리와 함께 수정구에서 디스플레이 하나가 허공에 떠오른다. 서준의 눈이 그 디스플레이 너머, 검광이 가지고 있을 수정구 주변의 풍경을 살폈다. 보아하니 검광이 있는 곳 역시 산속 어딘가. 주변으로 베여 쓰러진 나무 따위가 얼핏 보이고, 검광의 전신은 땀으로 젖어있다. 수련이 한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 그래서 연락이 늦어졌겠지. 서준은 검광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덥수룩한 머리, 그 사이로 희번뜩하니 빛나는 안광, 체격은 그리 크지 않으나 몸이 탄탄하고, 수정구 너머로 보고 있음에도 날카로운 기세가 피부를 간질인다. 서준이 묘한 긴장감에 그를 살필 때, 검광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왜 이렇게 연락을 안 받는 거냐! 황운신검을 찾았다고!? 그 말이 거짓이라면 네놈의 목을 뽑아버리겠다!] 미친 새끼.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상대방이 대신 해준다는, 신개념의 대화법을 마주한 서준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 긴장은 무슨 놈의 긴장. 하는 꼴 보니까 그냥 이서준의 모습으로 말했어도 당장 튀어올 것 같다. 그래도 기왕 하기로 한 것, 서준은 이미 한 번 목이 뽑혀본 백윤의 심정을 헤아리며 메소드 연기를 펼쳤다. “황운신검은 확실히 구했소.” 그는 백윤의 무뚝뚝한 낯을 한 채 손을 뻗어 허공에 선 하나를 그렸다. 무지한 자에게는 그저 하나의 손짓에 불과할 동작. 허나 화경의 무인이자 검에 미친 검광은 그 선에 담긴 오묘한 이치를 단번에 꿰뚫었다. [오, 오오…! 정말이었군! 거기서 기다려라!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말고 딱 그 자리에 있어!] 뚝- 통화가 끊겼다. 순식간에 사라진 검광의 모습에 서준이 당황했다. 분명 백윤은 검광이 자신이 머무는 장소를 모를 것이라 했었는데? 저러는 걸 보면 백윤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문자라도 보내둘까, 서준이 수정구를 조작하려 손을 움직이는 순간─ 따르릉-! 다시 한 번 검광에게서 통화가 걸려왔다. “…뭐요.” [네놈! 지금 위치가 어디냐! 어서 장소를 불어라!] 서준은 한숨을 꾹 눌러참으며 은신처의 위치를 설명했다. 뚝- 그리고 곧장 통신이 끊겼다. 나름 사고방식이 열려있다 생각하는 서준으로서도 참 쉽지 않은 인간상이었다. ‘일단 마주치면 죽탱이부터 날리고 시작할까.’ 다짐한 서준은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 일대의 공간을 관조했다. 며칠 정도 게임을 하며 보내긴 했으나, 미쳤다고 정말로 게임만 하면서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았다. 현재 백윤의 은신처 주변으로는 무수한 함정들이 자리하고 있다. 빙설천라진이며 백팔나한진 같은 기존의 진법들은 물론이요, 혼원일월공을 이용해 만들어낸 지뢰 따위도 수천 개가 묻혀 있다. 마법사는 곧 준비하는 자. 딱히 마법사는 아니었지만, 서준은 마법사가 된 기분으로 기를 이용해 검광을 맞이할 온갖 준비를 갖췄다. 그러니까 대충 백윤 정도 되는 놈이면 발을 들이자마자 고기 파편이 될 정도로 열심히 준비했다. 검광이 어느 정도로 강할지는 알 수 없는 일. 백윤이 말하길 이미 600년 전부터 화경이었다 하니, 100년에 한 걸음 씩만 나아갔다 하더라도 그 경지가 결코 만만치 않을 터다. 그러니 설령 쓸데없는 짓이 된다 한들 준비가 과해서 나쁠 건 없다. 서준은 그렇게 방망이 깎는 노인의 심정으로 수십 개의 진법을 겹겹이 쌓아올리며 검광을 기다렸다. 그리고 검광을 기다리는, 그 길지 않은 시간 속에서도 진법은 진화에 진화를 거듭했다. 서준은 생각했다. ‘진법이란 곧 세상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축으로 삼아 제 입맛대로 이치를 짜맞추는 수법이다.’ 간단하게는 오행진이나 구궁진 따위가 있으며, 깊이 파고들어갈수록 그 구성이 무궁무진하다. 진법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서준으로서는 아예 새로운 진법을 고안해낸다는 행위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어야 하지만…. ‘그냥 내 몸 바깥에서 무공을 펼치는 것과 비슷한 거 아닌가?’ 서준에게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현실로 옮겨낼 능력이 있었다. 오직 기를 이용해 인간의 복잡하기 짝이 없는 혈도를 그려내고, 그것을 주변 공간에 붙박아 놓았다. 그러면 끝이다. 본래 쓰던 무공을 체내 대신 혈도의 형상을 띠고 있는 진법으로 펼쳐내면 그만인 것이다. 무공을 펼치는 데 필요한 심상? 그건 어차피 서준이 진의 중심에 있기에 상관없다. 그가 진을 벗어나는 즉시 진법 역시 그 효력을 잃겠지만, 그건 달리 말해 위치를 벗어나지 않으면 작동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 우우웅- 진법이 제대로 발동하는 것을 확인한 서준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일단 북명신공이랑…, 제왕검형, 관천도 몇 개 만들어 두고, 혼원일월공, 역천일월공, 천일양제극화신공에 월광창…….’ 미친듯이 쌓여가는 진법들은 정상적인 무인이 본다면 깜짝 놀라 주화입마와 시원하게 하이파이브 한 번 갈길 법한 모습이 되었다. 하지만 서준은 만족하지 않았다. 무공을 진법의 형태로 새기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무공도 진법을 응용해서 새길 수 있는데, 영역은 못 새길 이유가 있나?’ 개소리다. 설령 그 남궁진천이라 해도 이딴 소리를 들었다면 ‘사위, 혹시 요즘 많이 힘든가…?’ 하며 진지하게 제 사위의 정신 건강을 걱정했을 것이다. 영역이라 함은 곧 비대해진 신의 공능으로 주변 공간을 기와 정으로 삼는 것. 화경쯤 되는 위인의 신을 무슨 수로 진법에 새겨넣는단 말인가? 서준은 간단하게 해결했다. 제 영역인 이상향의 온갖 구성요소, 그것들을 하나하나 떼어냈다. 하늘과, 땅과, 벼락과, 태양과, 달과, 산과, 바다와, 강과, 매화와, 설원과……. 세상 만물이 별개의 개념으로 화한다. 서준은 그것들을 조심스레 꺼내어 기로써 형태를 부여했다. 화악-! 각각의 색을 지닌 빛덩어리가 허공을 둥둥 떠다닌다. 서준은 반개한 눈으로 그것들을 보았다. 저것들이야말로 이서준이라는 인간의 심상을 이루는 구성요소다. 그렇다면 저 모든 것을 비워낸 내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 무심코 스스로의 가장 깊은 곳을 들여다 본 서준은 묵묵히 고개를 들었다. 텅 빈 눈. 그리고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작업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서준은 일전 남궁의 창천검을 만들었던 것처럼, 그리고 스스로의 분신을 만들었던 것처럼, 기로써 투명한 유리 구슬과 같은 형태를 빚어내었다. 이미 어느 정도의 형태를 갖춘 심상 속 요소들이 구슬 속에 스며들어 조용히 공간 사이에 스민다. 이것으로 됐다. 이런 방식이라면 여러 영역을 동시에 펼치는 것 역시 가능하다. 당장은 셋, 어쩌면 넷 정도가 한계일 테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미 상식을 크게 벗어난 일이다. “후우….” 짝짝-! 제 뺨을 두드린 서준이 자리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리고는 수정구를 손에 쥐고 게임을 실행했다. ‘올 때 되면 오겠지….’ 일단은 조금 쉬고 싶었다. * 무림의 화법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대략 열다섯 살 즈음의 순수하고도 적나라한 속마음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서준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예를 들어 ‘멍청한 새끼’라는 말은 ‘네놈의 우둔함에 한탄을 금치 못하겠구나!’ 정도로 번역하면 되고, 조금 응용해서 ‘멍청한 새끼, 그럼 죽어’라는 말은 ‘네 무지에 대한 대가를 치러라’나 ‘네 그 우둔함을 영원에 걸쳐 후회해라’ 정도로 번역하면 되는 것이다. 이게 다 서준이 무림에서 근 3년 정도를 생활하며 깨달은 지식이다. 연락을 취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머리칼을 휘날리며 달려온 검광에게 서준은 일단 정상적인 대화를 시도했다. “무엇을….” “황운신검…!!” 시도는 시도로 그쳤다. 하아, 크게 한숨을 내쉰 서준이 선언했다. “네 그 우둔함을 영원에 걸쳐 후회해라.” ‘멍청한 새끼, 그럼 죽어’라는 뜻이다. 콰아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