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준이 백윤의 목을 놓았다. 털썩, 걸레짝이 된 몸뚱이가 바닥을 구른다. 놈의 입을 열게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북명신공을 통해 놈의 진기를 빨아들여 범인과 다름 없게 만든 뒤, 강제로 마기를 쑤셔넣어 만마종주로서 명령하면 끝. 간단하기 짝이 없다. 물론 놈 역시 경지에 이른 무인이다. 그 정신력으로 어느 정도 버텨내기는 했으나, 한 번 꺾인 마음이 오래 가지는 못했다. 결국 마기에 물든 인형 꼴이 된 백윤은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허나…. ‘화경쯤 되는 무인이 금제는 주렁주렁 달고 말이야.’ 백윤이 제 의지(타의)로 멸신회에 대한 정보를 털어놓으려 해도, 그가 입을 여는 순간 금제가 발현했다. 뭐라 말을 하고는 있으나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만 튀어나오는 것이다. 보통 이런 금제는 강제로 해제하려 들면 금제의 대상이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심문하기가 까다롭다. 물론 뉴 이서준에게 있어서 딱히 큰 문제는 아니었다. 금제라 한들 결국 기를 이용한 수단. 딱히 고독을 이용한 것도 아니었기에 서준은 손수 금제를 풀어헤친 뒤 백윤에게서 자백을 받아낼 수 있었다. 즉, 이제 백윤은 쓸모를 다했다. 까드득-! 까드득-! 바닥에 널브러진 백윤의 몸뚱이를 무수한 아가리들이 갉아먹는다. - 아아아악…!! 백윤의 혼이 심상의 깊은 곳에서 비명을 토해낸다. 서준은 능월의 머리마저 밟아 부쉈다. 콰직-! 그렇게 멸신회의 두 화경이 세상에서 영영 사라졌다. ‘시혈만천까지 벌써 화경이 셋…. 보아하니 아직 남은 화경도 몇 있는 것 같은데.’ 그만한 전력을 가지고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백윤은 북해빙궁으로부터 숨는 것으로 만족해 별다른 생각이 없었던 것 같지만, 서준은 그것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현경이라는 존재가 두려운 것인가? 혹은 어찌 되었든 혈교의 진전을 이었기에 몸을 사리는 것인가. 고민하던 서준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당장 고민해봐야 답이 나올 문제는 아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금가의 멸문에 대한 진상. ‘백윤 이놈은 그 자리에 있었고, 능월은 없었다.’ 백윤과 함께 금가의 멸문에 일조한 것은 능월이 아닌 다른 놈이다. 백윤의 자백을 통해 놈의 위치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었지만…, 정확한 위치까지는 파악하지 못했다. ‘귀찮은 놈들 같으니.’ 멸신회는 철저한 점조직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멸신회의 일원끼리도 그 위치를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 백윤과 능월 역시 수정구라는 연락 수단을 통해 은거지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만나 북해까지 이동했다는 모양이니…. “쯧.” 서준은 혀를 차며 영역을 거뒀다. 화악-! 아득히 넓은 반경을 물들이던 영역이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그렇게 드러난 본래의 설원에는 전투의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기껏해야 몇 곳이 조금 파인 정도. 서준은 허공에 유유히 떠있는 빙정에 다시금 북해의 냉기를 쏟아부으며 생각을 이어갔다. ‘그나저나 신인(神人)이라….’ 어처구니가 없는 작명 솜씨지만, 얘기를 들어보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서준은 황제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600년 전, 혈교를 멸하기 위해 나섰던 화경의 무인 중 일부가 신의 힘의 편린을 목도해 마음이 꺾였다. 그들 중 꽤 많은 이들이 은거를 택했고, 그 과정에서 혈교의 무공이며 술법 따위를 빼돌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연구를 거듭하던 무인들 중 하나가 신에 맞설 가능성을 찾아냈으니. 그는 당시에 함께 은거했던 몇몇 이들을 찾아갔다. 여기까지가 황제의 추측이다. 나름 황제쯤 되는 놈이라 혜안이 있었던 걸까? 놀랍게도 그 추측이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백윤과 능월에게 들은 것은 거기서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였다. 누군가가 찾아냈다는 가능성. 그 가능성이란 과연 무엇인가. 의문에 대한 답은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바로 혈교의 대법이다. 아직 기련문주와 룸메이트가 되기 전의 백윤이 말하길. “…정확히는 혈교의 대법을 그 자가 멸신회의 목적에 맞게 고쳐 쓴 것이다.” “그 자가 누군데?” “그건 나도 아는 바가 없다.” 마기에 물들어 서준의 지배하에 있는 상태로 토해낸 대답이다. 이상한 기색이 느껴진 것도 아니었으니 정말로 아는 바가 없는 것일 터. “그 대법은 성신인대법(成神人大法)이라 한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 부모에게 시행하여 아이의 체질을 의도적으로 조절하는 종류의 대법이지.” 멸신회라는 조직을 만든 누군가는 긴 시간을 들여 대법의 준비를 마쳤고, 결국 300년 전 즈음에 성공을 거뒀다는 모양이다. ‘이걸 대단하다고 해야 되나, 병신 같다고 해야 되나.’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신이 두려워 제 손으로 신을 만들겠다니. 실현 가능성은 둘째 치더라도 발상 자체가 어처구니가 없다. “멸신회에서는 몇 쌍의 남녀를 준비해 그들에게 대법을 시행하고, 그들을 교배시켜 아이를 낳게 했다.” 그렇게 태어난 두 번째 세대. 그들에게서 가능성을 찾아낸 멸신회는 계획을 이어갔다. “두 번째 세대의 아이들이 충분히 자란 뒤 다시금 대법을 시행하여 교배시키고, 그 과정을 반복했다. 이후 시간이 흐르며 점점 대법의 효력이 나타나기 시작했지.” 그렇게 대법의 힘을 응축시킨 마지막 세대에는 인간으로서 신을 뛰어넘을 인중신(人中神)이 탄생했으니. “멸신회는 그 존재에게 신인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명색상 그것이 회주의 역할을 맡고 있기도 하고.” 어쨌건 그 신인이라는 놈이 태어난 것이 300년 전. 어릴 적부터 세뇌와 금제를 쑤셔넣어 말 잘 듣는 인중신이 되었다는 모양인데…. 솔직히 서준은 그 말을 아주 믿지는 않았다. 세뇌니 금제 따위에 걸린 놈이 인간으로서 신의 경지에 다다른다? 턱도 없는 소리다. 애초에 놈이 진정 신의 경지에 다다랐다면 이미 멸신회가 중원을 통일했든, 정사마에 이은 네 번째 세력으로 부상하든 했겠지. ‘아마 기껏해야 화경의 극.’ 최소한 아직은 그럴 터다. 이미 현경에 다다랐다면 놈들이 숨어있을 필요도 없을 테니. ‘그래도 장인어른만큼 세지는 않겠지?’ 아무리 지금의 자신이라 해도 아직 장인어른은 이길 자신이 없었다. 장인어른을 화경이라 하는 게 맞는 건지도 모르겠고. 현경을 본 적이 없어서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 장인어른께서는 이미 현경에 어느 정도 발을 걸친 상태가 아니셨을까? 그게 아니고서야 그 강함은 말이 되지 않는다. 서준은 끌끌 혀를 차며 열심히 냉기를 흡수 중인 빙정을 보았다. 빙궁의 신물쯤 되는 물건이라 그런지, 야무지게 냉기를 퍼먹는 모습을 보니 마음 한편이 뿌듯하다. ‘뭐, 당장은 이 정도만 알아도 충분하겠지.’ 어찌 되었든 금가의 멸문에 관여한 멸신회의 주요 인물은 둘. 그 하나가 기련문주와 룸메이트가 된 백윤이고, 이제는 남은 하나만 잡아 족치면 된다. 그리고 그 한 놈을 불러낼 방법도 방금 막 생각이 난 참이다. ‘어렵진 않을 것 같네.’ 쩌억-! 허공에 얼어붙은 반투명한 얼음 판 하나. 서준은 그곳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이서준과는 다른 백서준의 모습이 선명하게 비친다. “조만간 친구 하나 더 만들어주마.” 서준이 제 가슴을 툭툭 두드리며 웃었다. * 북해빙궁주 백설향은 제 커다란 의자에 드러누워 빙설천라진의 비급을 몇 번이고 다시 정독했다. 처음 이 비급을 받았을 때는 진법이 완성된 속도에 놀라 미처 파악하지 못했으나,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이 진법에는 오묘한 면이 있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호오, 과연.” 본래의 빙설천라진은 축이 되는 여덟 명의 무인이 빙백신기를 발출하여 그 안에 갇힌 적의 행동을 제한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허나 새로운 빙설천라진은 다르다. 이건 기존의 빙설천라진이 가지고 있던 묘리는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나, 그 묘리를 일개 방안 따위로 전락시켜버렸다. 그러니까─ 이전의 공능은 그대로 유지한 채 추가적으로 진 내부의 적에게 거대한 압력을 가하고, 내공의 행사를 방해하고, 강제적으로 신체 내부에 한기를 심고, 오감을 둔하게 하며, 그 흐름을 이용해 진을 이루는 여덟 무인들을 보호하는…. 간단히 평하길 진법 내부의 적을 조금 불쌍하다 싶을 정도로 압박하는─ 백서준의 못된 심보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진법이라 할 수 있겠다. ‘보아하니 주술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는 것 같은데.’ 믿기 힘든 일이다. 무공으로 화경의 경지에 오른 주제에 주술까지? 그 기련문주조차 무공은 그냥 봐줄 만한 수준에 불과했다. 그 정도 수준으로도 무공과 주술을 동시에 사용한다며 찬사를 들은 것. ‘그러면 이놈을 어떻게 잡는다….’ 백설향의 고민이 깊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백서준. 이 놈만 잡아도 향후 수백 년간은 빙궁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잡을 수 있다면 그렇다는 소리다. 여자에도 관심이 없어, 연회도 싫어해, 재물은 빙궁이 가난해서 안 되고, 무공으로는 이미 화경에 다다랐으니…. “흠.” 내가 그놈이었어도 굳이 빙궁에는 안 있을 것 같은데? 멍하니 납득하던 백설향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게 아니지.” 백설향이 입술을 앙 다물었다. 자신의 쾌적한 노후 생활을 위해서라도 놈은 반드시 붙잡아야 한다. 당장 궁주 자리를 맡아주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옆에서 자신의 일을 대신해주기만 해도 만족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 결국 백설향은 고민하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놈에게 빙정의 냉기를 보하게 시킨 것 역시 그 계획의 일환이었으니. 제아무리 화경의 무인이라 한들,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빙정만 멀뚱하니 쳐다보고 있으면 심심해서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세간에는 그 시간에 무공 수련을 하면 되는 게 아닌지? 따위의 인간성 박살난 소리를 지껄이는 무인들이 많지만, 백설향은 그따위 헛소리에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이미 수백 년간 해온 것이 무공 수련이다. 무의 길이라는 것은 그 끝이 없어 한 발 한 발 나아갈 때마다 지고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고는 하나… 그것도 한 발짝을 나아갔을 때나 할 수 있는 소리. 백설향의 경지쯤 되면 한 발짝 나아가는 것도 쉽지 않다. 수십 년을 수련해서 겨우 한 발짝 나아가면 대단하다는 소리를 듣는 게 화경이다. 매일 벽 보고 무공 수련만 해대는 데 한 발짝조차 나아가지 못하는 그 기분을 아는가? 정말이지 지루하기 짝이 없다. 그 말인즉, 백서준 그놈이 정신이상자가 아니라면 일 주 동안 무공 수련을 하는 게 아니라 멍하니 빙정 구경이나 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큭큭….” 백설향은 음흉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직접 싼 도시락을 준비했다. 그래, 도시락. 이것이야말로 북해빙궁의 사악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악랄한 계책이자, 백설향이 며칠간 끙끙대며 고민한 대계였다. 심심한 와중에 나타난 말상대라는 것은 그야말로 어둠 속의 빛이요, 절망 속의 희망이니. 입장 바꿔 생각해서 백설향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당장 자비로운 궁주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자진해서 잡일들을 떠맡았을 것이다. “이제 빙궁 청소는 나 대신 네가 해야 할 것이다, 백서준.” 그 뒤를 쫓아다니며 먼지가 남지는 않았나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검사해주마…! ─라고 생각한 게 방금 전이었다. “도, 돌아간다고…?” “그래. 일도 다 마쳤고, 이제 백윤 그 놈에 대한 정보도 필요가 없으니 돌아가야지.” 그 한마디에 백설향의 세상이 무너졌다. “아, 안 된다…! 가긴 어딜 가려고! 아직 빙궁 청소도 같이 못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