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사 년에서 오 년을 주기로 냉기를 보충하는데, 그 기한이 조금 지나버린 탓에 서둘러야 한다.” “기한이 지났다고?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그래.”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의욕이 나질 않더군.” “저런….” 그것 참 대단한 이유가 아닐 수 없다. 서준은 혀를 차며 허리 높이쯤 오는 단 위에 둥둥 떠있는 빙정을 유심히 관찰했다. 과연 빙궁의 신물이라 해야 할지. 백설향의 말대로라면 평시보다 출력이 떨어진 상태일 텐데, 당장 빙정이 내뿜고 있는 냉기는 평범을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이 냉기를 이용해 빙백신공의 성취를 이룬다는 건가.’ 서준은 즉시 그 원리를 이해했다. 내공을 특정한 색으로 물들인다는 행위는 말처럼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자연의 기를 자신의 심상으로 물들이는 일이 이제 막 무의 길에 접어든 삼류의 무인에게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심법은 그런 미숙한 무인들을 보조한다. 심법에 담긴 구결과 심상이 무인의 길을 이끌고, 무인은 점차 그에 익숙해져 스스로의 심상을 구축해나간다. 그 결과, 당연하게도 무인의 심상은 심법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허나 극한의 냉기를 다루는 빙백신공의 경우 심법만으로는 빙백신기를 연마하는 데 한계가 있을 터. 그것을 빙정을 통해 보충하는 것이다. 빙정의 냉기를 접하며 심상을 보다 시리게 가다듬고, 그로도 모자란 부분은 빙정의 냉기를 직접 내공에 흘려넣어 보충한다. 간단히 말해 빙백신공은 빙백신기 그 자체를 연마하는 무공인 셈. 내공 그 자체가 신공이니, 빙궁의 무인은 단순히 내공을 쏟아내는 것만으로 어지간한 무공을 상회하는 위력을 자랑한다. ‘그게 전부는 아닌가.’ 서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예민한 감각이 빙정의 정체를 낱낱이 꿰뚫었다. 빙정 자체에 깃들어 있는 공능. 짐작컨대, 저것은 현경의 무인이 직접 만들어낸 무언가다. 설령 저만한 냉기를 품은 다른 물건이 있다 한들 그것으로 빙백신공을 연마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터. 만약 빙정 없이 빙백신공을 대성하려 한다면, 화경에 이른 무인이 스스로 쌓아올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처음부터 빙백신공을 익혀나가야 하겠지. 그래, 개소리다. 화경에 이를 정도라면 스스로 익힌 무공이 무엇이든 이미 신공의 반열에 이르렀을 터. 미쳤다고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빙백신공을 익힐 이유가 없다. 그 말인즉 저 빙정이야말로 빙궁의 모든 것이라는 뜻인데…, 그러면 당연히 이걸 아무에게나 간단히 보여줘서는 안 된다. 그런데 백설향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에게 빙정을 보여줬다. 보편타당한 논리에 따라 서준은 그냥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걸 내게 보여줘도 되는 건가? 내 뭘 믿고?” “그러니까 말하지 않았느냐. 나는 궁주다.” “아니, 빙궁에서 그대의 뜻이 모든 법률의 위에 선다는 것은 잘 알겠소. 나는 그대가 그리 판단한 근거를 묻는 거요.” “고지식한 사내로다.” 백설향이 쯧쯧 혀를 찼다. “그냥 입을 닫고 있어도 알아서 다 해주겠다는데, 굳이 이유를 물었다가 내가 일을 도로 물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는 게냐?” “걱정이 돼서 하는 말이오. 이렇게 아무에게나 궁의 신물을 보여줬다가는 나중에 크게 경을 칠 일이 생길 테니.”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사람이 조금 찐따 같은 것도 참 걱정인데, 전대 궁주를 떠나보내고 혼자 외로웠는지 사람을 너무 잘 믿는다. 보통 이런 사람은 나쁜놈한테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준 뒤 혼자 쓸쓸히 생을 마감하는 게 정석적인 전개가 아니던가. 북해빙궁에 억하심정이 있던 서준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요즘 들어 서준은 저 여자만 보면 그냥 안타까워서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 험한 세상을 어찌 살아가려고.’ 서준이 끌끌 혀를 차자 백설향이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너는 나를 뭘로 보는 게냐? 나는 빙궁의 궁주요, 화경의 무인이다. 사람 보는 눈은 확실해.” “아닌 것 같은데….” “닥치거라. 어차피 빙정은 북해가 아니라면 쓸 수도 없어.” 백설향이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서준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빙정을 들고 날라도 별 의미가 없을 수는 있지만, 빙궁 입장에서는 그게 아닐 텐데? 당장 빙정이 사라지면 빙궁의 다음 세대는 빙백신공을 익힐 수 없다. 서준이 묘한 표정으로 백설향을 보았으나, 그녀는 성가시다는 듯 빙정을 손짓했다. “아무튼 네게 맡기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알겠지?” “빙정의 냉기를 보충해라, 이 말인가?” “그래. 북해에는 그 냉기가 자연적으로 밀집되는 장소가 있다. 위치를 일러줄 테니 가서 명상이라도 하고 오도록.” 백설향은 밀실의 구석에서 부스럭대며 무언가를 꺼내들더니, 그것을 서준에게 내밀었다. “지도다. 먼 거리도 아니니 이 정도로 충분할 터.” 서준이 지도를 받아들자 백설향이 이어 설명했다. “빙정은 그 자체로 거대한 기의 덩어리다. 허공섭물 따위로는 간섭할 수 없으니, 손으로 잘 들고 가서 일 주쯤 기다리다 보면…. 잠깐. 지금 무슨…?” 백설향이 멍청한 표정으로 서준을 보았다. 서준 역시 비슷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손 시려운 게 싫어서….” 백설향이 입을 쩍 벌렸다. 빙정이 허공에 둥둥 뜬 채 서준의 곁을 맴돌고 있다. 허공섭물로 간섭할 수 없다고 한 게 방금 전이다. 그런데 지금 저놈이 아무렇지도 않게 빙정을 허공섭물로 들어버렸다.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다. 백설향의 낯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이익…! 지, 지금 궁주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냐…! 빙백신공을 대성한 놈이 손이 시려워!?”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화를 내면서도 백설향의 내면은 혼란으로 물들었다. 그냥 별 생각 없이 평소처럼 허공섭물을 사용한 서준은 억울했다. “누가 봐도 만지면 손 시려울 것처럼 생기지 않았소.” “닥쳐라…!” “하아…. 됐으니 이만 가보지.” “가긴 어딜! 밤이 다 됐으니 내일 아침이 되면 떠나라!” “흠, 그것도 그렇군. 그러면 그리 하지.” 그렇게 됐다. 다음날 아침, 서준이 빙정과 함께 빙궁을 떠났다. * 서준은 빙정을 허공섭물로 둥둥 띄운 채 허공을 걸었다. ‘위치가….’ 가늘게 뜬 눈으로 지도를 살피길 한참. 마침내 가야 할 길을 깨달은 서준이 힘차게 허공을 박찼다. 투웅-! 그의 신형이 길게 늘어진다. 체감상 빙궁에서 마을까지의 다섯 배쯤 되는 거리를 이동했을까? 서준은 옷깃을 파고드는 냉기를 느낄 수 있었다. 허나 이미 한서불침 따위는 이룬 지 오래. 대수롭지 않게 냉기를 따라 이동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백설향이 말한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이야….” 꽤나 장관이다. 북해의 모든 냉기가 모여드는 이곳. 빙궁의 성지라고도 할 수 있는 설원은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얬다. 눈은 꽁꽁 얼어 답설무흔의 경지를 이루지 못한 이가 걸어도 발자국 하나 남지 않을 듯했으며, 드문드문 솟아난 얼음 기둥들은 나무처럼 그 가지를 길게 뻗었다. 서준은 그 중앙에 선 채 허공섭물로 들고 있던 빙정을 놓았다. 우웅- 스스로 떠오른 빙정이 주변의 냉기를 빨아들인다. 이 정도 속도라면 백설향의 말대로 일주일쯤 걸릴 터. 서준은 아예 주변의 냉기를 통제하에 넣은 채 빙정에 쑤셔박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 북해의 냉기가 빙정을 향해 쏟아져내린다. 한 문파의 신물에 행하기에는 약간 모욕적인 처사가 아닐 수 없으나, 어찌 됐건 그 효과는 확실했다. ‘이러면 두 시진쯤 걸리려나.’ 획기적인 시간 단축이다. 서준은 뿌듯하게 웃으며 열심히 냉기를 빨아들이고 있는 빙정을 보았다. “음?” 그러던 중, 서준은 기척을 느꼈다. 봉긋 솟아있는 눈 언덕이 둘. 쩌적-! 얼어붙은 눈이 부서지며 그곳에서 사람의 신형이 튀어나왔다. “너는 누구냐. 이번 대의 궁주는 백설향일 텐데?” 새하얀 장포를 걸친 사내가 느긋한 걸음걸이로 다가온다. 그는 전신에 쌓인 채 얼어붙은 눈을 털어내며 시린 눈으로 서준을 보았다. “빙정은 궁주만 만질 수 있다면서. 그새 궁주가 바뀐 것 아닌가?” 그 맞은편에서는 이마부터 뺨까지 길게 흉터가 진 사내가 몸서리를 쳤다. 모습을 보아하니 최소한 며칠은 숨어있던 모양이다. 이곳에 올 만한 사람은 저들이 직접 말했다시피 백설향 정도. 즉, 그녀를 만나기 위해 눈에 파묻히는 수고까지 들여가며 꽤나 긴 시간을 인내했다는 것인데, 뭘 어떻게 봐도 저들이 선량한 의도로 찾아온 의인들은 아니다. 서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모든 기척을 차단하고 숨어있었나.’ 화경쯤 되면 신체의 모든 작용을 통제하는 것이 가능하다. 눈에 파묻힌 채 외부와 소통하는 모든 기를 차단하면 아무리 서준이라 해도 미리 감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서준이 가늘게 뜬 눈으로 두 사내를 보자 그들은 저들끼리 토론을 시작했다. “그럴 리는 없다. 사내가 빙백신공을 대성하려면 많은 조건이 필요할 터. 아직 그 정도로 시간이 흐르진 않았어.” “그러면 뭐냐. 이놈이 빙정을 훔쳐 나오기라도 했다고?” “설마. 북해를 나서면 빙정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저만한 기운의 덩어리를 숨기는 것도 힘든 일. 북해 바깥에서 빙정을 들고 다녔다가는 일대가 얼어붙을 테니 빙궁의 추격을 피할 수도 없겠지.” “그러면 우리 눈앞에 있는 건 뭐지? 빙백신공을 대성한 사내와 빙정이 둘 다 있는데?” “그건…,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흰 장포를 걸친 사내가 서준에게 말했다. “나는 백윤이다. 네 까마득한 선조뻘이 될 테니 속히 예를 갖춰라.” 서준은 백윤의 말을 무시한 채 그를 빤히 보았다. 서준의 코가 움찔거렸다. 짙은 피 냄새.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일단 백서준이긴 한데…, 그보다 하나 묻겠소.” 예를 갖추긴커녕 불손한 태도로 묻는 서준의 모습에 백윤이 눈썹을 까딱였다. “뭐냐.”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혹 여인이오?” “…뭐라?” “피 냄새가 아주 진동을 하는군. 괜찮으니 말해보시오. 그대가 스스로를 여인이라 주장한다면 나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소.” 백윤은 제 동료와 시선을 교환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능월.” “그래, 제정신이 아닌 것 같군.” 능월이라 불린 사내가 껄껄 웃으며 등에 멘 창을 끌러 손에 들었다. 동시에 백윤과 능월의 기세가 서준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서준은 가만히 그 기세를 흘려내며 백윤을 보았다. “그래, 계집이 아니란 말이지.” 서준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돌연 설원에 몰아치던 삭풍이 멎었다. 화아아악──────────!! 일대의 공간이 거무스름하게 물든다. 그 전부가 유형화된 살기다. 눈을 부릅 뜬 백윤이 서준을 보았다. 서준은 그 시선을 마주하며 입꼬리를 찢어올렸다. “그러면 네가 그놈이구나?” 춘봉의 몸에 남아있던 빙백신공의 흔적. 혈공을 빼돌린 멸신회. 눈앞의 사내에게서 느껴지는 피 냄새. 모든 정황이 말한다. 눈앞의 저 사내가 금가의 멸문에 일조했다. “운이 좋아.” 하나하나 단서를 찾아 추적하려 했더니, 목표가 제 발로 걸어들어왔다. 서준은 주먹 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잠시 멎었던 삭풍이 그를 중심으로 회전한다. 북해의 모든 냉기가 서준의 제어 아래 놓이고, 이내 서준의 낯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여태껏 자살하지 않은 용기는 칭찬해주지.” 심상치 않은 기세에 백윤과 능월이 서준을 경계했다. 서준은 신경 쓰지 않았다. 놈들이 뭘 하건, 이미 결과는 정해졌다. - 아아아아악……!! 심상 속 깊은 곳에서 여전히 비명을 지르는 기련문주. 그의 곁에 새로운 자리를 마련했다. “그러면 이제 죽어라.” 손을 펼쳤다. 일대의 공간이 얼어붙는다. 희게 물든 하늘 아래 서준이 읊조렸다. “팔한지옥(八寒地獄).” 쩌어어어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