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준은 황궁에서 남궁세가로 복귀한 뒤 남궁일맥의 마무리 작업에 힘썼다. 북해빙궁으로 떠나기 전까지는 남궁일맥을 완성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며칠, 완성을 하고 보니 당초의 계획과는 달리 구성이 꽤나 간소해졌다. ‘10성이나 12성 대성이 깔끔하긴 한데.’ 최초의 계획은 그러했지만, 끝나고 보니 오히려 며칠 전보다도 단계의 수가 줄어 총 5개의 비급만이 남았다. 그 첫 번째 비급, 즉 1성의 경지는 섬전창뢰심공이다. 기본공인 섬전심공에 덧붙여 익히는 보조 무공으로, 축기 속도를 전보다 높여 빠른 발전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2성의 경지에는 비급이 없다. 각 대에서 배우게 될 무공으로 두 번째 비급을 대체했다. 대의 특성에 따라 다양한 검법, 보법, 심법 등을 배울 테고, 그것들이 어느 정도 경지에 다다르면 다음으로 넘어간다. 그렇게 하여 3성, 섬전십삼검뢰다. 이 단계에서는 그냥 하라는 대로 하면 된다. 섬전십삼검뢰를 익히며 검기의 감각과 뇌기에 익숙해지는 과정이다. 이후 스스로 검기의 발현에 성공하게 되면 4성의 경지로 넘어가게 된다. 그리하여 4성, 곧 천뢰소기(天雷小氣)의 경지다. 새로 만든 무공 이름이 천뢰소기라 그냥 천뢰소기의 경지라 이름 붙였다. 이름에서 대충 느껴지듯 훗날 익히게 될 천뢰멸마공의 발판이 되는 무공으로서, 검기를 다루는 법과 내공을 다루는 몇몇 기법들이 포함되어 있다. ‘아마 4성이 고비겠지.’ 5성의 경지라 할 수 있는 생사타통공을 펼치려면 만반의 준비가 필요하다. 4성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 테고, 혹여 조바심에 무턱대고 생사타통공을 펼쳤다가는 대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 물론 남궁이기에 그런 일은 없을 터. 애초에 준비가 되지 않은 자에게는 생사타통공의 지식조차 허락할 생각이 없었다. 아무튼 여차저차 열심히 해서 드디어 6성, 천뢰멸마공이다. 기공을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한들, 어찌 됐건 기공 자체는 보조적으로도 상당히 쓸 만하다. 이전, 천뢰소기를 익히며 약간이나마 천뢰멸마공에 익숙해졌을 테니 익히는 것에 큰 무리는 없을 터. 여기까지 따라오는 데 성공했다면…. “졸업 축하~.” 서준이 짝짝 박수쳤다. “이게 완성인 거야?” 춘봉의 물음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원래는 좀 더 이것저것 더하려 했거든? 근데 생각해보니까 이쯤 오면 갈래가 너무 많더라고.” 원래 초절정쯤 되면 스승이라 해도 해줄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이미 인간으로서의 절정을 한 번 넘어선 경지. 그것이 초절정이다. 그때부터는 스스로의 길을 찾아 나아가야 한다. “남궁세가에 무공은 이것저것 많으니까. 그 중에서 잘 맞는다 싶은 거 골라서 익히면 되겠지.” 곧 본격적인 기공 하나를 천무각에 추가할 예정이기도 했다. 어쩌면 훗날 기공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무력대가 생기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건 상당히 기대가 됐다. * “허어…. 허어어…!” 남궁일맥의 비급을 넘겨받은 천무각주 남궁백은 입술을 질근질근 씹었다. 팔락-, 팔락-! 비급을 넘기는 손이 점차 빨라진다. 끝내는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발을 동동 구르더니, 탁! 비급을 덮고 입가에 상쾌한 미소를 머금었다. 백팔번뇌를 모조리 벗어던진 듯 새하얀 미소였다. “허허….” 현자 같은 웃음을 흘리던 남궁백은 빠르게 다섯 권의 비급을 필사했다. 새로 생긴 천뢰소기의 경우 지급 신공으로 분류하였고, 섬전창뢰심공과 섬전십삼검뢰, 천뢰멸마공의 경우 추가된 분량을 더해 넣었다. 천뢰멸마공의 경우 이전에 지급 신공으로 분류한 바가 있으니, 남궁일맥을 6성까지 익히면 총 지급 신공 3개와 인급 신공 2개를 익힌 셈이 된다. ‘하지만 남궁일맥은 단순히 신공을 여럿 욱여넣은 무공이 아니다.’ 그 모든 무공이 하나의 길을 따른다. 그 말은 곧 남궁일맥은 다섯 개의 신공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신공이라는 뜻. 1성부터 6성까지의 흐름을 다시 한 번 살핀 남궁백은 척추를 내달리는 전율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윽…!” 후우…. 크게 숨을 내쉰 남궁백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남궁일맥의 원본을 소중히 품에 안은 채 익숙하지 않은 길을 걸었다. 천무각주에게 익숙하지 않은 천무각 내부의 공간이라니? 언뜻 듣기에도 이상한 말이다. 천무각이 아무리 넓다 한들 남궁백에게 있어 천무각은 제 집 안방과도 같다. 남궁백은 천무각 내의 모든 기물들의 위치까지 꿰뚫고 있는 사람이다. 그가 모르는 공간이 있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허나 그런 남궁백조차 이 길을 공적인 일로 걸어본 적은 없었다. 장담할 수 있다. 전대 천무각주도, 그 전대 천무각주도, 남궁의 역사를 통틀어 천무각의 각주로 있던 모든 이들이 그저 이곳을 바라만 보았을 것이다. 허나 이제는 아니다. “후우….” 묘한 떨림에 숨이 거칠어진다. 남궁백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그는 끝내 뛰다시피 하며 천무각의 가장 깊은 곳에 도착했다. “천급 신공….” 그는 떨리는 눈으로 텅 빈 책장을 보았다. ‘이 자리를 채우는 날이 올 줄이야.’ 오롯이 천급 신공만을 위한 자리. 남궁백은 조심스레 남궁일맥의 원본을 빈 자리에 채워넣었다. “아아, 드디어…!” 이로써 남궁일맥은 제왕검형과 함께 남궁세가의 유이한 천급 신공이 되었다. 허나 제왕검형은 천무각에 존재하지 않는다. 대대로 가주와 소가주만이 익혀온 무공이기에, 그 비급은 가주가 소유하고 있다. 그렇기에 천무각에 배치된 천급 신공은 남궁일맥이 최초. “으흐흐….” 남궁백은 남궁일맥을 배치해놓은 책장 앞에 쭈그려앉았다. 그의 입가에 싱글벙글 헤픈 미소가 어렸다. 보기만 해도 그냥 웃음이 나온다. 도대체 도련님…, 아니, 태사께서는 어떤 세상을 보고 계시기에 이런 신공들을 척척 만들어내시는 건지. 끝내 천급 신공까지 창시해내실 줄은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 눈이 담고 있을 세상의 모습은 어떠할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가 없구나.’ 허나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남궁의 태사, 그 단 한 사람으로 인해 남궁의 무공 체계가 바뀌어가는 이 역사적인 순간. 남궁백 자신이 천무각의 각주를 맡고 있다는 사실이 이토록 황홀할 수가 없었다. “아이고, 어찌 이리 예쁠꼬….” 남궁백은 확신했다. 이대로 세월이 흘러 남궁일맥을 익힌 무인들이 전성기에 다다랐을 때, 남궁세가는 명실상부한 천하제일세가가 된다. 세가에 가득한 초절정 무인들을 상상하던 남궁백은 남궁일맥의 비급 앞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으흐흐….” 꿈속의 남궁백은 수십 개의 천급 신공을 관리하는 행복한 천무각주가 되었다. * “북해빙궁에 간다고?” 남궁수아가 차를 우려내며 물었다. 서준은 허공섭물과 강기를 이용해 먹고 남은 음식물을 없애고, 새것처럼 깨끗해진 접시들을 한곳에 차곡차곡 쌓으며 답했다. “응. 뭐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춘봉과 남궁수아에게는 이미 황제에게 들은 이야기를 공유했다. 사정을 아는 남궁수아는 서준을 말릴 수 없었다. 멸신회라는 집단이 금가를 멸한 이상, 자칫 잘못했다가는 금 매와의 관계가 크게 상할 수도 있었다. 그런 까닭에 남궁수아는 조심스럽게 춘봉의 반응을 살폈다. 진지한 표정을 한 춘봉이 서준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너.” “응?” “허공섭물 왜 이렇게 쉽게 쓰냐? 그거 내공 효율 엄청 별로라던데.” 그래서 전혀 예상치도 못한 얘기가 나오자 남궁수아의 눈이 데굴 굴러갔다. 서준이 픽 웃었다. “그거 그냥 다른 사람들이 잘 못 써서 그래. 엄청 편한데 이거.” 화경에 오른 뒤로 서준은 대부분의 일을 허공섭물로 해결했다. 이거 진짜 편하다. 이미 상시로 옅은 영역을 유지 중이겠다, 그냥 눈 감고도 손으로 하는 것보다 훨씬 쉽게 이런저런 일들을 하는 게 가능하다. “부럽네….” 춘봉이 진지하게 턱을 쓰다듬었다. 그런 춘봉을 보며 옅게 웃은 서준이 그녀를 번쩍 안아들었다. “왜 또 괜히 딴청이야.” “…뭐, 뭐가.” “부담 가질 거 없어. 금가 일이 내 일이지, 뭐.” 춘봉이 입을 꾹 다물었다. 무어라 말을 하고 싶은 듯 몇 번 입술을 움찔대던 그녀가 끝내 말을 이었다. “…그런 거 아니거든. 그냥 위험할까 봐 그러지.” “별로 안 위험할걸?” 현재 사흑련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사흑련에 속했다고는 하나 북해빙궁은 한참 북서쪽에 떨어져있는 곳. 현재 세력도로 봤을 때 북해빙궁은 차라리 사흑련보다 마교와 더 가까웠다. “그나마 기련문이 가까웠는데, 이제 그거 없잖아.” 자신이 슥삭 하고 지워버렸다. 심지어 저번 신녀와의 일로 빙궁주가 주화입마에 든 상황. 북해빙궁은 철저하게 고립되었다. 아마 빙궁의 인원들은 정파나 마교가 어떻게 나올지 살피며 전전긍긍하고 있지 않을까? “그럴 때 딱 소궁주가 귀환하는 거지. 화경에 오른 소궁주가 북해빙궁을 위기에서 구원한다.” 소설로 써도 나름 그럴 듯한 기승전결이 갖춰진 얘기가 아닌가? “어떻게 잘만 하면 알아서 협조해줄 것 같은데.” 물론 서준도 안다. 그럴 가능성은 적다. 아마 빙궁주는 백서준의 얼굴만 봐도 주화입마가 다시 도질 거다. 허나 이 자리에서 북해빙궁과 한 판 붙을 수도 있다는 얘기를 굳이 꺼낼 필요는 없었다. “아무튼 입만 잘 놀려도 치고받고 싸울 일은 없을 거야.” “…네가 퍽이나 그러겠다.” 춘봉이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 그녀는 이서준을 아주 잘 안다. 얘가 머리가 나쁜 건 아닌데, 일단 머리를 쓸 생각 자체를 잘 안 한다. 잘은 몰라도 북해빙궁에서 뭐가 막히면 ‘일단 때려보면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 따위의 사고방식으로 일을 진행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이서준 행동학 박사 학위의 금춘봉이 보장한다. “에이, 뉴 이서준은 다르다니까? 너 그거 이론 다시 세워야 돼.” “그러면….” 무어라 말하려던 춘봉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왓?” 사람을 열받게 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말을 하다 마는 것이고…. “너 이 자식…!” 분노한 서준이 악랄하게도 금춘봉의 볼에 무자비한 뽀뽀 세례를 감행했으나, 춘봉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스스로의 생각에 환멸을 느끼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이라도 만들고 가라니….’ 그러면 책임감이 생겨 몸을 좀 사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으나, 아이에게도, 오빠에게도 못 할 짓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건 아이를 수단으로 삼는 짓이 아닌가. 괜히 그런 말을 했다가 그 말이 화가 되어 일이 이상하게 될지도 모르고.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도 너, 오는 봄에 혼례 올리는 건 까먹으면 안 된다?” “그걸 까먹으면 내가 진짜 금춘봉 동생 해야지.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야.” 게다가 어차피 이번 일이 그렇게 길어지지도 않을 거다. “금방 갔다 올 테니까 혼자서도 잘 놀아야 된다?” 서준이 양손으로 춘봉의 볼을 꾹꾹 누르며 허공섭물로 품 속에서 서책 하나를 꺼내들었다. 남궁수아가 눈앞으로 날아온 서책을 받아들었다. 그 표지에는 묘한 제목이 적혀있었다. ‘남궁 판별기’ 남궁수아의 눈에 의문이 어렸다. “이건 뭐야?” “저번에 드리는 걸 깜빡했는데, 그거 천무각주께 대신 좀 전해줘.” 별건 아니다. 어떻게 보자면 남궁일맥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남궁의 무인들이 걸어나갈 길의 틀을 잡았으니, 그에 적합한 재능을 가진 이들을 선별하는 일도 훨씬 수월해지지 않겠는가? 일단 그 시작은 안휘부터. 이 무공이 남궁에 걸맞는 인재들을 긁어 모으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 그날, 천무각주 남궁백은 잠시 등선의 길을 보았다. “허어억…!” 어쩐지 전대 가주님의 얼굴을 뵌 것 같았다. * 서준은 미적대지 않았다. 어차피 북해빙궁까지 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다. 그는 남궁명에게도 간단히 사정을 설명한 뒤 곧장 세가를 나섰다. 그리하여 북해. 새하얀 동토에 적법한 후계자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문을 열어라. 나, 소궁주 백서준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