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이 황제와 멸사천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만찬장이 한순간에 부서지고, 일대가 초토화되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 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화경 간의 전투에서 으레 발생하는 공간의 일렁임 역시 일어나지 않았다. 둘 모두 진심과는 거리가 먼, 가볍게 손속을 섞는 것에서 그친 전투였던 까닭이다. “우선 뒤로 물러나라!” “기절한 장로는 내가 챙기지!” 만찬장의 무인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는 대신 거리를 벌린 채 황제와 멸사천군의 전투를 지켜보았다. 위험 따위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무려 지고의 무인들이 손속을 나누는 현장이다. 설령 그 대가로 목숨을 잃을 수 있다 한들 무인으로서 놓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춘봉 역시 눈을 부릅 뜬 채 전투를 지켜보았다. 핏-! 서준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허리를 젖혀 피해낸 황제는 히죽 웃으며 만찬장의 기다란 식탁을 걷어찼다. 콰앙-! 그 위에 놓인 접시들이며 음식물, 식기 따위가 허공에 떠오른다. 황제의 손이 일순 흐릿해졌다. 슷-! 그의 손이 십수 개의 젓가락을 낚아채며 그것들을 암기처럼 흩뿌렸다. 쉬쉭-! 서준은 무심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우뚝, 젓가락들이 허공에 멈춰선다. 그는 접시들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 허공섭물로 그것들을 구석으로 옮겨놓더니, 가볍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쐐액-! 젓가락들이 이기어검의 묘리를 통해 쏘아졌다. 황제가 웃었다. “아끼는 접시라도 있는 모양이야?” 툭, 가볍게 의자를 걷어차자 날아든 젓가락들이 의자에 틀어박힌다. 콰가각-! 의자가 박살나는 것과 동시에 황제가 땅을 밀어냈다. 슷, 서준에게 접근한 황제가 손을 뻗었다. 맹금류의 발을 형상화한 듯한 손모양. 금나수다. 아니, 맹금류보다는 용의 발톱이라 해야 할까? 쉬익-! 서준은 허리를 젖혀 피해내며 발을 앞으로 밀었다. 황제가 즉시 반응해 무릎을 밀어넣었다. 투웅! 서준은 허리의 탄력을 이용해 몸을 띄웠다. 허리가 뒤로 젖혀진 상태. 그대로 황제의 무릎을 박차며 발을 휘둘렀다. “오호.” 황제가 웃으며 손으로 막았다. 탁! 동시에 굽혀진 손가락들이 서준의 발목을 잡았다. 그대로 손을 당기니 서준의 신형이 가까워진다. 황제가 반대손을 뻗었다. 서준은 허공의 자연지기를 부려 몸을 빠르게 회전시켰다. 파라락-! 장포가 휘날리며 황제의 손목을 감는다. “이야, 다른 놈들이 이걸 봐야 쓰는디. 기공은 이렇게 쓰는 거지.” 황제가 재빨리 서준의 발목을 잡은 손을 놓았다. 동시에 손목을 휘감은 장포를 움켜쥐고, 그대로 서준의 몸을 휘둘러 바닥에 내리꽂았다. 허나 서준의 몸이 땅에 처박히는 일은 없었다. 타악-! 기로 이루어진 푸른 손이 바닥을 밀어냈다. 몸을 회전시키며 착지한 서준이 미간을 찌푸린 채 황제를 보았다. ‘몸싸움으로는 안 되나.’ 체술로는 이쪽이 밀린다. 애초에 화경의 무인을 체술로 이겨먹으려는 생각도 없었다. 화아악-! 서준의 등 뒤로 세 쌍의 푸른 팔이 돋아났다. 황제는 그 푸른 팔을 보았다. “음, 남궁하면 하늘이지.” 저 손에 잡히면 몸이 흩어지거나, 짓눌려 죽는다. 보통은 그렇다는 소리다. 황제가 환하게 웃으며 발로 땅을 내리찍었다. 쿠웅-! 그 충격에 온갖 잡동사니들이 허공에 떠오른다. 황제는 손을 뻗어 의자의 다리를 손에 쥐었다. 그것을 내던지는 동시에 찻잔을 발로 후려차고, 기다란 돼지 뼈 하나를 둔기처럼 잡았다. 콰직-! 서준이 휘두른 손에 의자 다리와 찻잔이 박살난다. 그 틈, 황제가 달려들었다. 부우웅-! 그의 손에 들린 돼지 뼈가 흉악한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갈랐다. 한 발 물러나 피한 서준이 여섯 개의 기로 이루어진 팔을 뻗었다. “어디.” 황제가 실실 웃었다. “조금 제대로 해볼까?” 그의 손에 잡힌 돼지 뼈가 기이한 궤적을 그렸다. 투웅-! 후려친 푸른 팔이 튕겨나간다. 몇 번 휘두르니 돼지 뼈가 부서졌다. 황제는 손에 남은 잔해들을 암기처럼 흩뿌린 뒤, 부서진 식탁의 널따란 판을 잡아챘다. ‘대검?’ 부웅-! 서준이 몸을 웅크려 휘둘러진 식탁을 피했다. 허나 대검의 흐름은 끊기지 않는다. 황제가 한 바퀴 회전하며 식탁을 내리찍었다. 탁-! 서준은 즉시 땅을 박차 물러나며 여섯 손을 앞으로 뻗었다. 콰앙-! 바닥을 내리찍은 식탁이 터져나간다. 허나 완전히 산산조각난 것은 아니다. 황제의 손에 기다란 나무 봉이 남았다. 원하는 부위만을 내공으로 보호해 임시로 창을 만든 것이다. “헛차!” 다가오는 여섯 손. 황제의 창이 원을 그렸다. 창술의 기본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란나찰, 그중 란이다. 화악-! 서준의 여섯 손이 바깥으로 튕겨나가며 서준과 황제 사이로 길이 열렸다. 황제가 입꼬리를 찢어올렸다. “막아보래이?” 황제의 허리가 비틀린다. 땅을 굳게 디딘 발. 그 끝에서부터 전달된 회전이 창을 앞으로 쏘아낸다. 란나찰 중 찰이다. 서준은 검지를 편 채 앞으로 내밀었다. 그 손가락 끝에 탁한 구체가 생겨났다. 쐐액-! 내찔러진 황제의 창과, 서준의 역천일월공이 맞부딪혔다. 콰자자작-! 황제의 창이 끝에서부터 여러 갈래로 갈라진다. 서준의 역천일월공은 창을 아주 꿰뚫지 못하고 도중에 스러졌다. 마주 보고 선 두 화경이 각각 묘한 표정을 지었다. 황제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좀 분이 풀렸나?” “한 대는 쥐어박아야 풀릴 것 같은데.” “에헤이. 머리통 부서질 일 있나.” 황제가 실실 웃으며 서준을 묘한 눈으로 보았다. ‘전력을 내면 어느 정도려나.’ 이 짧은 대련으로 알 수 있는 건 적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기공의 비중이 크다는 것. 주원장 자신과는 영 무공의 성향이 달라 판단하기 힘들다. 무엇보다도 저런 무인들은 영역을 펼쳤을 때 그 진가가 드러나기 마련이니…. ‘용케 지금까지 발톱을 숨겼구만.’ 어찌 됐건 화경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실력은 아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멸사천군의 행보에 의하면 화산의 비무 대회에서는 절정, 용봉지회에서 초절정, 기련문을 멸문시킬 때 화경에 올랐다 했던가? 애초에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이도 드물었지만, 이로써 확실해졌다. 화산 비무 대회 당시에도 놈은 화경이었다. ‘재밌네.’ 어디서 저런 고수가 뚝 하고 떨어졌을까. 사람의 눈이나 분위기 따위를 보면 대충 나이를 알 수 있다지만, 과연 저 모습이 진짜일까? 아주 젊은 나이는 아닐 것 같은데. 혼자 실실 웃는 황제에게 서준이 말했다. “네 유희에 남궁을 끼워넣지 마라. 다음에 또 그러면 죽는다.” “오메, 이거 무서워서 살겠나?” 황제가 빙글 몸을 돌렸다. “거, 좀 지나가갑시데이.” 문 앞에 서있던 이들이 황급히 길을 비켰다. 만찬장을 나선 황제가 열린 문 앞에 서 하늘을 가리켰다. “내가 말했던가?” 그의 옅은 황금빛 눈이 오묘한 빛을 머금었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이 황제의 부름에 일순 찬란한 빛을 내렸다. “나는 하늘의 인정을 받아 천고의 자리에 오를기다. 그래, 천자(天子)라고 하면 되겠구만.” “난 인정 안 해줄 건데.” “으응?” 눈썹을 들썩이던 황제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남궁이 하늘을 자처하는 건 알지만, 너도 알고는 있잖아. 진정한 하늘은 따로 있다는 걸.” 서준이 그를 비웃었다. “애시당초 하늘을 머리 위에 두겠다는 생각부터 글러먹었어.” “흐음. 그것도 그래. 확실히 그렇지.” 손으로 턱을 괸 채 작은 원을 그리며 걷던 황제가 씩 웃었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겠어.” 서준은 그런 황제를 가늘게 뜬 눈으로 보았다. ‘어디까지가 진심인 건지.’ 정신 나간 놈들과 대화를 나누면 이게 피곤하다. 헛소리와 진심 사이에 구분이 없다. “됐으니 빨리 꺼져줬으면 좋겠는데.” “섭섭하게 왜 그러나? 좋은 거 하나 알려주려 했는데.” “안 궁금하니까 가라.” “참말로?” 황제가 서준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거리가 꽤 있으나, 화경 수준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 오묘한 빛을 품은 황제의 눈동자에 서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황제가 말했다. “멸신회.” 주욱 찢어져올라간 입꼬리가 반듯한 호선을 그렸다. “정말 안 들어도 되겠어?” 서준이 미간을 구겼다. ‘멸신회?’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다. 하지만 이름이 워낙 노골적이다. 신을 멸한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서준이 황제를 빤히 바라보자 황제가 싱긋 웃었다. “너와 같이 다니는 저 계집. 금가 출신이잖아? 흥미가 있을 줄 알았는데.” 서준의 눈이 일순 붉게 번쩍였다. 눈을 부릅 뜬 황제가 급히 뒤로 물러섰다. “워메….” 황제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피부가 저릿하다. 이게 단순한 살기라고? ‘저런 걸 속에 품고 잘도 멀쩡한 낯으로 다니는구만.’ 보면 볼수록 재밌다. 황제가 희희낙락 웃으며 서준을 보았다. “어때. 듣고 싶제?” “원하는 게 뭐야?” “딱히. 말해준다고 뭐가 닳는 것도 아니고.” 황제가 빙글 미소 지었다. “아, 그래. 그게 좋겠군.” 핏-! 순식간에 황제의 신형이 사라졌다. 뒤늦게 공기를 진동시킨 음성이 서준에게 닿았다. “다음에 황궁에 한 번 들러라. 그때 말해주도록 하지.” 황제의 목소리가 아스라이 흩어진다. 그가 있던 곳에 작은 바람이 불었다. 서준을 제외한 모두가 그의 움직임을 눈으로조차 좇지 못했다. 서준의 눈썹이 까딱였다. 그가 말없이 있자 물러선 채 둘의 전투를 지켜보던 이들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어디 안 다쳤냐?” 가장 먼저 춘봉이 다가와 서준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서준이 그녀의 머리 위에 턱하니 손을 얹었다. “금춘봉.” “응?” “오빠 잠깐 갔다 올게.” “엉? 어디를?” 서준의 입술이 달싹였다. “이상향(理想鄕)” 일순 드넓은 영역이 모습을 드러냈다. 옅게 드러난 영역이 세상의 모습과 겹치며 오묘한 광경을 그려낸다. 춘봉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 “응? 아니, 그냥 황제 잡으러 갔다 온다고.” 서준의 입꼬리가 주욱 찢어져 올라갔다. ‘뒤질라고 이게.’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의 앞에서 도망을 쳐? 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가. 술래잡기라면 자신의 특기 분야다. 쩌억-! 서준 앞의 공간이 찢어졌다. “금방 갔다 올게.” 얼마 걸리지도 않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