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계의 아주 깊은 곳. 남궁진천이 눈을 떴다. [죄인 남궁진천은 들으라…!] 검게 물들었던 시야에 색이 돌아왔다. 남궁진천은 고개를 들었다. 주변이 온통 붉다. 아스라이 들려오는 인간의 신음. 뼈와 살이 뭉개지는 소리. 거대한 법대(法臺) 앞에 선, 그만큼이나 거대한 존재가 남궁진천을 내려다보았다. [망자의 혼과 기억을 붙잡아 명계의 질서를 어지럽힌 죄!] 몸이 무겁다. 기억도 희미한 옛적. 무공을 익히지 않았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다. [그 하나만으로도 네 죄가 태산보다 무겁다!] 눈앞의 거인. 남궁진천은 본능적으로 그 이름을 깨달았다. 염라(閻羅). 생전 지은 죄를 심판한다는, 명계의 신. [죄인 연소희를 데려오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연소희. 단 한 시도 잊은 적이 없는 이름. [부인…?] 한 여인이 옥졸(獄卒)의 손에 끌려나왔다. 내팽개쳐진 여인은 남궁진천과 눈이 마주치자 눈물을 뚝뚝 흘렸다. [상공…. 죄송합니다…. 제 탓에 상공마저 이렇게….] 그녀의 목소리. 그 작은 파편 하나하나가 가슴에 스민다. 사과하는 이유는 알지 못했다.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녀는 무엇 하나 잘못한 것이 없다. 설령 대죄를 범했다 한들 괜찮다. 이 두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음에 심장이 뛰었다. 쿵- 쿵- 죽어 사라졌을 것이 분명한 심장의 고동이 남궁진천의 낯을 생기로 물들였다. 염라가 외쳤다. [죄인 연소희는 하계에 혼과 기억의 일부를 남겨 윤회의 흐름을 어그러뜨렸다! 인정하는가?] 연소희가 이를 악물었다.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설령 그것이 잘못이라 한들 어찌 제 잘못을 상공께 묻는단 말입니까…!] [무엄하다…!] 망자의 온전한 혼이 명계에 머물지 않는다면 윤회의 시련을 거칠 수 없다. 죄인 연소희는 죄인 남궁진천의 검에 그 혼 일부를 깃들여 윤회에 차질을 빚었으니 그 죄질이 아주 무겁다. 물론 그녀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다. 그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허나 기적이라 한들 죄는 죄. 죄인 연소희는 혼의 일부가 마저 명계로 돌아온 지금까지 명계의 감옥에 갇혀있었으며, 그 혼이 완전해진 지금, 죄인 남궁진천과 함께 그 죄를 심판받아 마땅하다. 염라가 선언했다. [죄인 남궁진천과 죄인 연소희는 그 혼을…!] [부인.] 염라의 말이 끊겼다. 남궁진천이 환하게 웃었다. 이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었던 그 어떤 미소보다도 환하게 웃었다. 화아아악───────── 동시에 바람이 불었다. 지옥에 어울리지 않는 달콤한 바람이 연소희의 머릿결을 흩뜨렸다. 연소희의 눈이 남궁진천을 보았다. 그 환한 미소에는 그녀를 향한 그 어떠한 책망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천하제일의 사내는 생의 끝을 넘어 비로소 잃어버린 조각을 되찾았다. [너무 늦어 미안하오.] [상공…?] [내 이제 다시는 그대를 놓치지 않겠소.] 연소희는 멍하니 남궁진천의 미소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제게….] [어째서라니. 나는 그대의 남편이오. 그대는 나의 하나뿐인 부인이고.] […저는 상공께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누가 그것이 죄라 하였소.] [예…?] 남궁진천은 연소희에게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그대 덕에 지금까지 버텨낼 수 있었소. 그대가 없었다면 무너진 채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겠지.] [하, 하지만….] 남궁진천의 손이 연소희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그는 멋쩍은 듯 작게 웃음을 흘리다, 그녀에게 허세 없는 솔직한 마음을 전했다. [열심히 힘낸 내게, 사과보다는 칭찬을 해주지 않겠소?] [노옴…!] 분노한 염라가 손을 내리쳤다. 명계에서 망자는 그 어떠한 힘도 행사할 수 없다. 그것은 하늘이 내린 법칙. 역천의 죄를 범한 죄인은 즉시 영멸의 형에 처한다. 염라의 기운이 남궁진천을 찍어눌렀다. 남궁진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는 조심스레 연소희에게 뻗었던 손을 거뒀다. [미안하오. 아주 잠시, 이번 한 번만 더 나를 기다려주시오.] [아, 안 됩니다 상공…! 염라는…!] [부인.] 남궁진천이 웃었다. 뒷짐을 진 그의 혼 위로 푸른 장포가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혼의 모습은 그 혼에 가장 깊숙이 새겨진 스스로의 형태. 남궁의 옷을 걸친 천하제일인의 어깨 위로 한 자루의 검이 생겨났다. [그대의 남편은 신에게도 지지 않소.] 콰아아아앙─────────!! 염라의 손이 남궁진천이 있던 곳을 내리찍었다. [상공……!!] 연소희가 절규했다. 가슴 속의 무언가가 찢어진 듯 울부짖었다. [괜찮소, 부인.] 흙먼지가 걷힌 곳. 남궁진천의 표정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내 금방 돌아가리다.] 투욱, 땅을 박찬 남궁진천의 신형이 공간을 뛰어넘었다. 자연스럽게 베여나간 공간이 길을 열었다. 염라의 눈이 부릅 뜨였다. [기어코…!] 새로운 신이 눈을 떴다. 남궁진천이 허공에 발을 딛자 그곳에서 파문이 일었다. 우웅- 퍼져나간 푸른 파문이 명계에 하늘을 그려낸다. [이곳에서 대역죄인을 단죄하겠다!] 염라가 허공을 쥐었다. 그의 의념이 형태를 갖춰 거대한 검이 되었다. 쿠구구구───────── 육신에 구애받지 않는 염라의 크기는 인간의 상식을 아득히 벗어난다. 그가 힘을 드러냈을 때, 손에 쥔 대검은 중원 대륙을 가로지르고도 남을 거대함을 자랑한다. 남궁진천은 고개를 젖혔다. 떨어져내리는 염라의 검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마치 신벌이 떨어져내리는 듯했다. 제아무리 천하제일인이라 한들 맞설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허나 남궁진천은 손을 뻗었다. 서늘한 눈이 명계의 신을 보았다. [방해하지 마라.] ──────────────!! 한 자루의 검이 푸른 궤적을 그리며 쏘아졌다. 보잘것없는 검이다. 염라의 검은 대륙과 비견되는 크기를 자랑한다. 그의 검 앞에서 남궁진천의 검은 한낱 티끌조차 되지 못한다. 꺾이는 것은 남궁진천이다. 그것이 상식이다. 허나 신에게 있어 상식은 그 어떠한 가치조차 지니지 못하니. 쩌저적────────!! 보잘것없는 검이 그려내는 궤적이 끝을 모르고 뻗어나간다. 검과 대검이 맞닿고, 대검이 산산이 부서져내린다. 떨어지는 파편 사이로 검은 계속해서 나아갔다. 퍼억-! 푸른 궤적이 끝내 염라의 가슴마저 꿰뚫었다. 염라의 입장에서는 간지럽지도 않을 작은 상처. 그럼에도 염라의 낯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이, 건…!] 남궁진천이 무심히 손을 들어올렸다. 빈손. 허나 검을 쥔 듯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의 손이 횡으로 휘둘러지는 것과 동시에 염라의 허리가 끊어졌다. 쩌어어억────────!!! 아득한 크기의 거신이 무너져내린다. 남궁진천은 쓰러지는 염라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연소희의 앞에 섰다. 그는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연소희의 눈을 바라보았다. 눈물로 흐릿해진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비친다. 그토록이나 바라왔던 광경. 긴장감에 손이 떨려온다. [부인….] 남궁진천은 오롯이 부인을 바라보며 떨리는 손을 천천히 내뻗었다. [다시 나와…. 함께해 주시겠소?] 연소희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눈에 남궁진천이 담겼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그녀의 남편. 죄송스러운 마음뿐이었다. 그녀의 과오로 인해 그마저 죄인이 되고 말았기에. 허나 상공께서 자신을 원한다 하였다.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다. 그런 남자가 이토록이나 분명한 말로 자신을 원해온다. 명계도, 염라도,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언제나 그녀만을 바라봐 주던 사내가 이곳에 있기에. 누구보다도 강한, 그녀만의 영웅이 이곳에 있기에. [예, 상공….] […고맙소, 부인.] 눈물이 흐른다. 기쁨의 눈물이었다. 남궁진천은 스스로가 완전해짐을 느끼며 스스로의 신명(神名)을 입에 담았다. [비익천(比翼天)] 명계 한가운데 푸른 하늘이 환하게 빛난다. 암수가 각각 하나의 눈과 날개를 가져 짝을 짓지 않으면 날지 못한다 전해지는 비익조(比翼鳥). 삶의 끝에서야 비로소 짝을 되찾은 비익조가 그 날개를 활짝 펼쳤다. [아아….] 동시에 남궁진천의 몸을 감싼 휘광이 하늘로 뻗었다. 완전해진 혼에 벼락 같은 충만함이 차오른다. 남궁진천은 허공에 뜬 채 읊조렸다. 완전해진 영역의 이름이었다. [만개화지천(滿開花之天).] 화아아아악──────────!! 화사한 꽃이 명계를 가득 채운다. 텅 비어 짙푸르던 하늘. 그 텅 빈 공간이 생기를 되찾아 세상을 따스하게 감쌌다. [노오옴…!!] 염라의 상반신이 손을 뻗었으나, 그것이 닿는 일은 없었다. 염라의 몸이 손끝부터 하늘에 흩어진다. 이제 막 신의 경지에 오른 이가 명계의 신을 철저히 압도했다. 남궁진천은 연소희의 손을 맞잡은 채 빛의 계단을 올랐다. 명계에 피어난 꽃들이 그들의 주위로 흩날린다. 연소희는 남궁진천을 따라 걸으며 명계를 내려다보았다. 푸른 하늘에 휘말린 염라와 그 수하들이 스러지고 있었다. 명계 일부를 물들인 저 하늘은 언제까지고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괜찮을까요, 상공…?] [괜찮소.] 저것은 어차피 염라의 수많은 분신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영구적인 힘의 소모가 있겠으나, 남궁진천이 거기까지 신경 써 줄 이유는 없다. [그보다, 그대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소.] 지금껏 검에 깃든 그녀의 기억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것은 남궁진천의 기억이었으며, 또 연소희의 일부였으나, 결코 연소희 본인은 아니었다. 기억 속의 그녀와 하염없이 대화를 주고받았을 뿐. 언젠가 다시 만날 그녀에게 전하기 위해 남궁진천은 그 모든 대화를 기억했다. [그거 아시오? 우리에게 사위가 생겼소.] 남궁진천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 한동안은 대화를 쉴 날이 없으리라. 비익천신 남궁진천과 그 부인 연소희가 선계에 올랐다. * 환한 빛과 함께 일변한 풍경. 손을 맞잡은 부부에게 한 사내가 천천히 다가왔다. “어서 오시게. 나는 금휘제라 하네.” 둘을 마중나온 검신이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기다리고 있었네.” * “꿈을 꿨어….” 남궁수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아니, 꿈이 아니야…!” 그녀의 만면에 환한 미소가 꽃처럼 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