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보세가의 여식과 남궁세가주의 혼인.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더 큰 이득을 보는 건 황보세가다. 물론 황보혜지와 남궁명이 정략혼을 하려는 건 아니다. 가문의 이득은 차치하고 그냥 둘이서 눈이 맞은 거다. 그 둘이 지금 연애 중인지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둘 사이에 분홍빛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것. 그런데 황보세가주 그 미친놈이 둘 사이에 뭔가 초 치는 말을 한 모양이다. ‘황보세가주가 그 혼인을 내켜하지 않을 이유야 뻔하지.’ 남궁진천의 죽음. 그로 인해 남궁세가의 위치가 애매해진 것. 멸사천군이 있다고는 하나 그의 행보는 상당히 과격하다. 당장 마기를 사용한다는 소문까지 있는 상황 아닌가? 어쩌면 역풍이 불지도 모른다. 남궁세가가 어찌 될지는 아직 그 누구도 예측하기 힘든 영역에 있었다. 황보세가주로서는 남궁세가가 안정된 뒤에 혼인을 성사시키거나, 아예 안정적인 다른 가문에 황보혜지를 시집 보내고자 할 터. “건방진 놈.” 서준이 쯧쯧 혀를 차며 걸음을 옮겼다. 춘봉이 그의 팔을 툭툭 두드렸다. “야야, 진짜 한 판 하게?” “당연하지. 확 정수리를 오목하게 만들어버릴라.” 감히 대남궁세가의 가주가 연애 결혼 좀 하겠다는데 퇴짜를 놔? 자기가 뭔데? 건방지기 짝이 없다. “아니, 애초에 지금 한가한가? 뭔 가주라는 놈이 안휘까지 기어들어와?” 뒤따라오던 남궁수아가 쓰게 웃었다. “황보세가와 남궁세가가 멀진 않으니까. 주변에 다른 문파들도 많고.” 무엇보다 현재 사흑련은 섣불리 움직일 수 없다. 황보세가주가 잠시 자리를 비우더라도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됐다. “그래?” 서준이 턱을 긁적였다. “아무튼 먼저 들어가서 자고 있어. 난 얘기 좀 하게.” “너 진짜 사고 치면 안 된다?” 춘봉이 서준의 귀를 붙잡고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속삭였다. “칠 거면 몰래 치든가.” 역시 우리 춘봉이. 오빠를 너무 잘 안다. “당연하지.” 남궁수아가 쿡쿡 웃으며 서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혹시 도울 게 있으면 말해줘.” 올곧은 눈동자. 그녀의 눈을 보고 있으면 정말 무엇을 말해도 전부 이루어줄 것만 같다. ‘잘 해야지.’ 남궁세가 사람들이 대체로 사랑에 맹목적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상, 자신이 잘 해야 한다. 괜히 사이좋게 손 잡고 이상한 길로 빠지지 않게끔. 수아 누나는 자신이 천마로 전직한다 해도 쿡쿡 웃으며 ‘그럼 나는 천마 부인이네?’ 같은 소리를 해도 이상하지 않다. “알았어. 조금 늦을 테니까 먼저 자.” 서준은 손을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곧바로 황보세가주가 머무는 건물로 향하진 않았다. 그 전에 들를 곳이 하나 있다. “어이, 영감. 벌써 자요?” 발로 문짝을 두드리니 패진광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나왔다. “뭐냐.” “요새 통 보이질 않길래.” 서준은 패진광을 지나쳐 멋대로 건물에 들어섰다. “어우, 술 냄새 봐.” 방구석에 술병이 가득하다.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술이라도 퍼마신 모양이다. “요새 운동 안 해요?” “하고 있지.” “술도 마시고?” “하루 종일 퍼마시는 건 아니다.” 빈 술병을 구석에 내던지고 새 병을 찾아 밀봉을 풀었다. 서준이 술병을 든 채 손을 까딱이자 패진광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 나이 차이가 얼만데.” 말과 달리 그 역시 새 술병을 찾아 밀봉을 풀었다. 딱히 잔은 필요 없다. 병끼리 부딪히자 쨍 하는 소리가 울렸다. 꿀꺽, 서준이 술을 크게 한 모금 들이킨 뒤 물었다. “들었어요? 황보세가주 왔다는데.” “그러냐?” “예. 뭐, 전에 사이 별로 안 좋다 하지 않았나?” 황보세가주가 패진광의 별호인 권왕을 탐낸 까닭이다. 잘은 몰라도 들은 기억이 있다. “그쪽이 싫어하는 거지, 난 별 생각 없다.” “흠….” 입술을 삐죽이던 서준이 술병을 젖혔다. 독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하씨, 뭐지?” 서준이 머리를 벅벅 긁어대자 패진광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가 뭐냐.” “이 영감이 이런 사람이 아닌데. 혹시 어디서 누구한테 맞았어요?” “맞았지.” “진짜요?” 패진광을 팰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함천경이라는, 화경에 비견되는 괴상한 경지에 오른 이 영감을? “주먹으로 맞아봐야 아프기밖에 더 하냐.” “그게 문제 아닌가?” “목이 잘려도 멀쩡한 놈이 할 말은 아니지.” “그래도 아픈 건 아픈데요.” “마음이 아픈 것보다는 낫지.” 패진광의 말에 서준의 표정이 묘해졌다. “안 어울리는 말을 하네.” “원래 오래 살면 다 이렇게 된다.” “이야, 늙기 싫다 진짜.” “싸가지 없는 놈.” 패진광이 픽 웃었다. 그는 술병을 젖혀 남은 술을 털어버리더니, 빈 병을 구석에 내던졌다. “남궁진천이 그놈. 나는 그놈이 그렇게 갈 줄은 몰랐다.” “…….” “대단한 경지에 오른 것치고는 너무 급하게 갔어.” 패진광은 술병의 밀봉을 풀기도 귀찮아졌는지 아예 병의 목을 쳤다. 병목이 깔끔하게 날아갔다. 그대로 술을 입에 들이부은 패진광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요새 보니까 아예 헛된 죽음은 아니더구나. 남긴 게 있어. 뭐라고 해야 되나. 이어지는 게 있다는 거지.” “남기는. 죽으면 끝이지.” 서준이 턱을 괸 채 패진광을 보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 영감이 노망이 들었나 싶기도 했다. “그래서, 영감도 뭘 남기고 싶어지셨나?” “이제 와선 너무 늦었지.” “맞지. 늦었지.” “이럴 때는 아직 안 늦었다고 해야 되는 거 아니냐?” 패진광이 헛웃음을 흘리며 다 비운 술병을 방구석에 내던졌다. 우웅- 서준의 허공섭물이 술병을 잡아챘다. 그대로 가져와 손으로 잡아채니 깔끔하게 날아간 단면이 눈에 띈다. 그 모습을 보던 패진광이 말했다. “아무튼 간에, 그러니까 그거다. 그놈은 그래도 뭐라도 남기고 갔지. 나는 뭐가 되나 싶더구나.” “지랄. 가긴 자꾸 어딜 가요?” 서준은 방구석을 뒹굴던 병의 목을 허공섭물로 가져왔다. 병의 몸통과 목을 이은 채 손가락으로 문지르자 단면이 깔끔하게 붙었다. 마치 새 병처럼. “안 죽으면 되잖아요.” “그게 뜻대로 되나.” “당연하지. 안 그럴 거였으면 경지는 왜 올려?” 무인은 경지가 높아질수록 스스로의 의지를 세상에 뚜렷이 새길 수 있다. 수명 역시 비약적으로 늘어난다. 서준이 픽 웃었다. “죽기 싫으면 안 죽으면 되는 거지.” “말이야 쉽지.” “쫄?” “시끄럽다.” “빼기는.” 서준이 술병을 던졌다. 패진광이 잡아챘다. 목이 부러졌던 흔적이 깔끔하게 사라졌다. “별 희한한 재주를 다 부리는구먼.” “됐고. 따라오쇼.” 서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패진광이 뒤이어 일어났다. “어디 가는데?” “황보세가주 보러.” “그놈은 왜.” “쥐어 패줘야지.” “미친놈. 갑자기?” “건방지잖아요.” 서준이 몸을 풀자 문득 패진광이 말했다. “화경이라는 놈들은 대개 극단적이다.” “뭐요?” “원래 그렇지. 남 눈치 볼 필요도 없고, 애초에 제정신으로 오를 만한 경지도 아니고.” 키우는 개 앞에서 내숭을 부리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화경 역시 비슷했다. “그런 주제에 뭔가 하나 정도는 집착하는 게 있기 마련이야.” “갑자기 뭔 소리래.” “알아두라는 거다. 화경 놈들이 죄다 남궁진천이 그놈 같지는 않으니까.” 패진광의 말에 서준이 픽 웃었다. “거, 영감. 요즘 방에만 틀어박혀 있어서 소문을 못 들었나 보네.” 자신이 누군가. 멸사천군 이서준이다. 최근에 본 화경만 해도 한둘이 아니었다. “보니까 다 거기서 거기더만. 결국 남 눈치 잘 안 보는 놈들이라는 거 아니야.” “무식하게 세서 문제지.” “머리 터지면 다 죽던데?” “뭔 당연한 소리를 하는 거냐.” 서준이 걸음을 옮겼다. 황보세가주가 머무는 건물을 향해서였다. “황보세가주도 머리 터지면 죽는다고.” 패진광이 기겁했다. “야, 이 미친놈아! 거기 안 서!” “영감 같으면 서겠냐요?” 서준이 낄낄 웃으며 달렸다. 그 뒤를 패진광이 쫓았다. 그리고, 콰아아아앙────────!! 지붕을 뚫고 난입한 서준이 한 사내와 눈을 마주쳤다. “그래, 그쪽이 황보세가주?” 공간과 일체화된 듯한 묘한 기세. 화경임은 확실하다. “뭐 하는 놈이냐.” 그런데 어째 생각과는 조금 다르다. 황보세가주라면 당연히 근육빵빵한 마초 아재일 줄 알았더니, 의외로 꽤 마른 체형의 사내가 그곳에 있었다. “아이고, 이 정신 나간 놈…!” 뒤따라온 패진광이 서준의 뒤에 섰다. 늦어버렸다. 그가 이마를 탁 쳤다. 황보세가주의 눈이 가늘어졌다. “권왕?” “거 오랜만이구먼. 투왕.” “야밤에 이게 뭐 하는 짓이냐.” 황보세가주의 몸에서 거대한 투기가 솟았다. 자그마한 체구와 달리 그 기운은 태산을 짊어진 거인을 떠올리게 했다. 패진광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설명하자면 긴데….” “에헤이.” 서준이 패진광의 말을 끊었다. 화경의 무인들이 남 눈치를 잘 안 본다고? 자신은 삼류 시절부터 남 눈치를 본 적이 거의 없었다. 다른 화경들과는 그 근본부터 다르다는 의미다. “그래서, 그쪽이 황보세가주 맞지?” “맞다면?” “야이 싸가지 없는 새끼야.” 서준이 손을 치켜들었다. “네가 뭔데 대남궁세가주 말에 토를 달아? 얻어 쳐맞으려고 그냥.” “…미친놈.” 패진광이 가련한 소녀처럼 입을 틀어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