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야, 너 언니한테 뭐 잘못한 거 있냐? 조금 화난 것 같은데?” 춘봉의 말에 서준이 아닌 남궁수아가 흠칫 몸을 떨었다. “아, 아니야! 잘못한 거라니. 서준이한테는 폐만 끼쳤는데….” 유별난 반응이다. 춘봉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야. 진짜 뭐 했어? 너 설마….” 무언가를 상상하던 춘봉의 말랑 볼따구가 화악 달아올랐다. 파렴치하다! 기겁한 춘봉이 입을 틀어막았다. “너 이 변태 새끼…! 아직 혼인도 안 했는데…!” “그, 그런 거 아니래도?” 남궁수아가 당황해 손을 내저었다. “흐음…. 그래?”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오해는 금세 풀렸다. 애초에 춘봉은 딱히 오해한 적도 없었다. 남궁수아의 반응이 좋길래 놀려먹었을 뿐. 원래 저럴 때는 한 번씩 기분을 환기해주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 안 그러면 끝도 없이 침울해져서 정말로 큰일이 날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완전히 무너지진 않았나 보네.’ 다행이다. 춘봉이 납작한 가슴을 쓸었다. 언니가 무너지기라도 하면 자신도 자신이지만 오빠가 폭주할 수도 있다. 그때의 이서준은 자신도 제어할 자신이 없었다. 비기를 쓴다면 가능할지도 모르나, 어찌 됐건 그런 일이 일어나서 좋을 건 없다. 이미 남궁수아는 춘봉에게 있어 반쯤 친언니 같은 사람이 되었다. ‘흠.’ 그렇게 생각하면 이서준 이 새끼, 자매 둘을 동시에 취한 셈이다. “…이런 미친 색마 새끼.” “뭣.” 서준은 억울했다. 하지만 어찌 됐건 자매는 아니어도 두 여인을 동시에 취한 건 사실이다. 딱히 할 말이 없는 관계로 서준은 능숙하게 사고를 전환했다. 그의 시선이 남궁수아의 손에 들린 장검을 향했다. ‘확실히 평범한 검은 아니야.’ 당연한 일이다. 신에 가까운 사내가 쓰던 검이 신검(神劍)이 아니면 뭐가 신검일까. 남궁수아에게 장인어른의 검을 써보라 했던 것은 그 검 하나만 써보라 했던 것이나, 막상 두 검을 동시에 쓰는 모습을 보니 저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미 숙련된 대검과, 장인어른께서 남기신 신검. 쌍검을 쓴다고 두 배로 강해지는 것은 아니라지만…. “누나, 혹시 그 검 있잖아.” “…응, 맞아.” 용케도 알아들은 남궁수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들어. 전부터 이 검을 썼던 것처럼.” 어쩌면 남궁진천의 기억이나 심상이 남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릴 때를 제외하고서는 항상 대검을 써온 남궁수아지만, 이 검은 당장이라도 능숙하게 다룰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준은 생각했다. ‘마침 잘 됐다.’ 누나에게 몰두할 거리가 생긴 것은 환영할 일이다. 그녀의 무공을 두 자루의 검에 맞게 고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다만 한 가지. 다른 건 몰라도 쌍검술의 형(形)은 서준이 뚝딱 만들어줄 수 없었다. ‘이건 천무각주께 부탁드리면 되겠지.’ 남궁세가의 무공들을 관리하는 천무각의 우두머리. 남궁백이라면 두 자루의 검을 다루는 무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 아니나 다를까, 남궁백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쌍검술이라면 여럿 있소. 전부 내어드리리다.” 남궁수아는 무공서들을 잔뜩 받았다. 일이 늘어난 셈이었으나, 그녀의 표정은 오히려 전보다 밝았다. 서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남궁세가를 떠났다. 그렇게 도착한 전장. 서준은 개중 가장 강대한 기척이 느껴지는 막사에 기별도 없이 들이닥쳤다. “아, 그대는….” 한 사내가 포권했다. “제갈 군사에게 미리 얘기는 들었소. 팽가의 팽소호요.” 서준은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세가에 있을 때면 마음이 조금은 차분해지지만, 다른 무인들을 만나면 이유 모를 분노가 차오른다. 크게 숨을 내쉰 뒤 물었다. “전황은?” “아주 유리하오.” 멸사천군 이서준이 전장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이다. 이미 적들은 큰 피해를 입었고, 서둘러 전선을 뒤로 물리는 중이었다. “허나 제갈 군사라 말하길, 어쩌면 이 또한 사마현의 계략일 수 있다는군. 주변부터 차근차근 압박해 적을 말려 죽이는 쪽이….” “아니, 그건 너무 늦어.” 서준의 눈이 지도를 훑었다. 검종문의 위치와 주변의 전선. 대략 견적을 짠 뒤 팽소호를 뒤로했다. “뒤처리는 맡기지.” “잠시…!” 팽소호가 붙잡기도 전에 서준의 신형이 사라졌다. 공간을 찢어내 이동한 서준은 발아래 펼쳐진 드넓은 사막을 보았다. 아마 고비 사막일 터다. 상당한 거리를 두고 무림맹의 군세와 사흑련의 군세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서준이 가볍게 영역을 펼쳤다. “이상향(理想鄕).” 본래 제아무리 화경의 무인이라 한들 영역을 펼치는 것은 어느 정도 힘의 소모가 있다. 특히 비대해진 신과 주변 공간을 잇는 기(氣)의 부담이 큰 편이었다. ‘원래라면 그렇지만….’ 기에 있어 천고의 재능을 지닌 서준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화아아악────────!! 드넓은 영역이 펼쳐지며 사막을 덧씌운다. 그 형태가 평소와는 달랐다. 국소전개(局所展開), 제왕검형(帝王劍形). 경지에 익숙해지며 영역을 다루는 것이 능숙해졌다. 그로 인해 심상의 일부만을 꺼내 영역을 펼치는 것 역시 가능해졌으니─ 화악-! 오롯이 푸른 하늘이 사막을 물들인다. 서준이 앞으로 뻗은 손을 움켜쥐었다. 콰악-! 동시에 하늘의 무게가 사막을 짓누른다. 쿠우웅-! 한데 모여있던 사흑련의 병력들이 압착되어 죽었다. 사소한 반항조차 없었다. 애초에 대단한 전력이 있지도 않았다. 모든 살아있던 것들이 사막의 모래에 스며들었다. 서준은 영역을 거뒀다. 사막의 일부가 붉게 물들었다. 인간의 잔해로 물든 사막이 태양 아래 달아오르며 역한 냄새를 냈다. 서준은 만족하지 않고 더욱 앞으로 나아갔다. ‘슬슬 검종문의 영역이다.’ 놈들이 전선을 뒤로 물린 탓에 전선 자체가 검종문과 가까워졌다. 얼마 이동하지도 않았는데 사흑련 깊숙이 파고든 꼴이 됐다. ‘오히려 좋아.’ 자칫 위험할 수도 있으나, 같은 화경이라 한들 서준의 속도를 따라올 수 있는 이는 드물다. 만약의 일이 생긴다 한들 물러나면 그만. 우우웅-! 자연의 기가 서준의 손아귀 사이로 끝도 없이 몰려들었다. ‘인사 정도는 할까.’ 자연지기가 음기와 양기로 화하며 역태극을 이루고, 이내 사일의 심상을 품어 고요히 진동한다. 관천(貫天). 쩌어어억────────── 뻗어나간 기운이 저 멀리 있는 검종문을 향해 나아간다. 일순 서준의 눈썹이 들썩였다. ‘저건.’ 막을 것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간단히 막혔다. 파아앙-! 도중에 흩어진 관천이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그 사이로 무언가 번쩍였다. ‘검?’ 서준이 눈가를 좁힐 때, 한 인영이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눈밑이 퀭하게 들어간 사내가 서준을 보았다. “물러가라. 붙잡지 않으마.” 피곤한 기색의 목소리가 낮게 울려퍼진다. 서준은 대답 없이 사내를 살폈다. 치리링- 묘한 금속음. 관천을 막아낸 것으로 보이는 얇은 칼날들이 허공을 떠돈다. 이내 그 얇은 칼날들이 사내의 등 뒤에 메인 거대한 검에 달라붙었다. 본래부터 하나인 듯 칼날이 붙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특이한 형태의 대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분명 장인어른께 들은 적이 있다. “네가 검종문의 전대 문주냐?” 사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준의 눈동자가 붉게 달아올랐다. “그럼 죽어라.” 피피피핑-! 허공에 생겨난 무수한 점들이 사내를 향해 쏘아졌다. 역천일월공이다. “…영문을 모르겠군.” 치리링-, 사내의 등 뒤에 메인 대검에서 얇은 칼날들이 떨어져나왔다. 팔랑이는 칼날에 강기가 깃들고, 그것이 일순 빳빳이 펴져 쏘아졌다. 콰아아아앙────────!! 무수한 역천일월공의 포격이 걷혀나간다. 수월하게 막아내는 듯 했으나, 이내 사내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이런.” 위력이 예상보다 강하다. 사내는 뒤로 밀려나는 칼날들을 끌어모으며 한데 모아 펼쳤다. 천검개화화(千劍開華花). 묘한 금속음과 함께 칼날들이 모여 꽃처럼 피었다. 카가가각-! 회전하는 금속의 꽃이 사내의 주위를 맴돌며 역천일월공을 막아낸다. 서준이 손을 뻗어 펼쳤다. “이상향(理想鄕).” 영역이 펼쳐진다. 순식간에 그려지는 하나의 세계에 사내의 눈이 잘게 흔들렸다. “이건….” 서준이 손을 내리그었다. 하늘이 떨어져내린다. 제왕검형. 그 상승의 검법을 알아본 사내의 눈이 부릅 뜨였다. “남궁!” 천검주 검현은 사건의 전말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왜 이렇게 죽기살기로 달려드는가 싶었더니, 결국 은원 탓이었다. “지긋지긋하군….” 도저히 풀어낼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얽힌 것이 강호의 은원이다. 그것이 성가셔 은거를 택하였건만, 결국 벗어나지 못했는가. 치리링- 검현의 눈이 오묘한 빛을 품었다. 동시에 일천 개의 칼날이 사방으로 퍼진다. “아검여일(我劍如一).” 우웅-, 묘한 검명과 함께 칼날들이 하늘로 쏘아졌다. 그의 영역은 여타 화경들의 영역과는 조금 다르다. 주변 공간 대신 그가 다루는 모든 검에 영역이 깃든다. 떨어져내리는 하늘. 그에 맞서 일천의 칼날들이 꽃처럼 피었다. 쐐애액-! 좁게 시작해 넓게 퍼져나간다. 칼날들이 그리는 궤적이 마치 꽃과 같았다. 쩌억- 하늘이 갈라지며 제왕검형의 압력이 흩어졌다. 서준이 미간을 구겼다. 동시에 손가락을 아래로 내리그었다. 천일양제극화신공(天日陽帝極火神功). 쿠구구-! 갈라진 하늘 너머, 드높이 걸려있던 태양이 대지를 향해 떨어진다. “무슨….” 검현의 미간이 구겨졌다. 황실의 무공이라고? 남궁세가의 사람이 아니었나? 쯧, 혀를 차며 잡생각을 털어냈다. 다른 생각을 하며 맞설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치리링-! 일천의 칼날이 검현의 몸을 감쌌다. 동시에 그가 검을 쥐었다. 대검이 아닌 장검이다. 이것이 천화검(千華劍)의 본모습이다. 일천의 칼날들이 떨어져나가며 본래의 형상이 드러났다. “흡…!” 검현은 떨어져내리는 태양을 무시하고 곧장 서준을 향해 날아들었다. 쐐액-! 일천의 칼날들이 호위하는 검수. 눈가를 찌푸린 서준이 하늘과 땅을 가리키던 손을 한데 모았다. 혼원일월공. 검현의 눈앞. 세상만물이 점으로 수렴한다. 검현이 급히 일천의 칼날로 막아섰다. 콰아아아앙────────!! 간신히 막아선 검현의 신형이 뒤로 튕겨 날아간다. 그는 자세를 바로잡으며 급히 하늘을 보았다. 거대한 태양이 코앞에 있었다. 세상이 붉게 끓어오른다. “허….” 검현은 탄식하며 손에 쥔 검을 크게 당겼다. 한 자루 검으로 태양을 베어낸다. 스스로의 검에 의심 한 점 없으니─ 예(銳). 오직 날카로움. 그 한 가지 묘리만을 검에 담았다. 극에 이른 기예는 결국 일만 갈래의 길을 포용한다. 만류귀종이라. 극에 이른 예기가 시공간을 베어내니 극쾌(極快)와 같고, 이지러진 공간 사이를 오가며 만변(萬變)을 담는다. 서억────────── 태양이 베였다. 단 한 번의 휘두름이었으나, 태양은 수천 조각으로 나뉘어 스러졌다. 허나 검현의 입가에는 떨떠름한 미소가 맺혔다. 태양 하나 베어냈다고 좋아할 때가 아니었다. “당황스럽군….” 화아악-! 무수한 매화가 공간을 수놓는다. 바다에서 일어난 해일이 용의 형상을 취해 이를 드러내고, 대지가 거대한 주먹이 되어 날아든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가…?” 가해지는 공세. 그 하나하나를 이루는 무공이 전부 다르다. 그 무공들을 어떻게 구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도저히 한 사람이 익힐 수 있는 양이 아니다. 경악하던 검현의 생각이 하나의 가능성에 닿았다. “그대는 혹, 위대한 존재의 화신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