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서의 최북단에 도착했을 때, 서준은 아주 희미한 흔적을 발견했다. 기에 대해 어느 정도 민감하지 않으면 결코 발견할 수 없는 미세한 흔적이었다. 달리 말해, 중원의 무인 중 대부분이 알아차리지 못할 흔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허나 남궁진천이라면 이 흔적을 발견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터. 묘한 불길함을 느낀 서준은 혼원보를 펼쳐 빠르게 흔적을 쫓았다. 그러다 일순, 먼 곳에서 거대한 기의 파동이 터져나왔다. 서준조차 일순 섬뜩함을 느낄 정도의 위력이었다. ‘화경끼리의 충돌이다.’ 조급함이 차오른다. 서준은 혼원보에 한층 속도를 더했다. 콰아아아앙────────!! 그렇게 도착한 사막. 그곳에 남은 것은 여러 시체와, 죽기 직전의 남궁진천, 그리고 기절한 남궁연. 서준의 눈동자가 갈 길을 잃고 헤맸다. “사위….” “이게, 아니…! 어떻게…!” “약혼식을 보지 못하게 되어 아쉽군….” 믿기 힘들었다. 그 장인어른이? 도대체 누가? 이 중원에 이런 짓이 가능한 놈이 있다고? 세상의 그 누가 천하제일인을 이런 꼴로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서준은 우선 자연지기를 끌어모아 남궁진천의 회복력을 끌어올리려 시도했다. 허나 남궁진천의 부상은 단순한 육신의 부상이 아니었다. 내상과 더불어 그 존재 자체에 타격을 입었다. 치료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그럼에도 손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떻게든 그의 숨을 붙여놓고자 했다. 허나, 남궁진천은 그조차 거부했다. “그러지 말게…. 이제는 나도 앞으로 나아가야지….” “앞으로 나아가려면 일단 몸부터…!” “아니…. 내 길은 이곳에 있지 않네….” 그리 말하는 남궁진천의 표정은 평온했다. 일견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저리도 죽음을 반긴다는 말인가. 너무 갑작스럽다. 준비하지 못한 이별은 한 번이면 충분했다. 서준의 뇌리에 과거의 기억이 스쳤다. 칼에 찔려 죽어가는 아빠의 모습이 남궁진천의 위에 겹쳤다. “사위….” “…예.” “조심하게…. 아직 끝을 내지 못했으니….” 왜, 죽어가는 순간마저 자신을 걱정하는가. “물론, 자네라면 잘 해낼 것이라 믿네….” 왜, 이렇게까지 자신을 믿어주는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생면부지의 타인이다. 연결고리라고는 딸의 예비 남편이라는 사실 하나뿐이다. 그럼에도 왜, 자신의 가슴은 이렇게 찢어질 듯 아픈가. 불신. 이내 남궁진천의 숨이 끊어지고, 상실. 지독한 현실감이 숨통을 틀어쥐고, 애써 눈을 돌려왔던 감정이 다시 한 번 눈앞에 들이밀어진다. “또 보는구나. 저기 기절한 남궁의 핏줄을 데리고 돌아가라. 순순히 물러나면 붙잡지 않으마.” 낯설지 않다. 아는 감정이다. 눈앞에서 아빠가 칼에 찔려 죽었을 때, 이미 충분히 느꼈다. 속이 옥죄는 듯한 이 상실감. 다시는 잃을 일이 없다고, 더 이상 시간조차 자신에게서 무언가를 앗아갈 수 없으리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외면하던 이의 눈앞에 들이밀어진 현실은 손댈 여지 없이 잔혹했다. “아….” 눈 돌리던 감정을 직시하자 신(神)이 기어코 경계를 넘는다. 본래라면 시간을 들여 천천히 받아들였어야 할 모든 것들이 뇌리에 쑤셔 박혔다. 비대해진 신은 주변 공간을 정과 기로 삼아 균형을 이루고, 한결 오롯한 존재로 거듭난 오성이 현실을 받아들인다. 남궁진천은 죽었다. 영영 다시 볼 수 없다. 그는 그토록 기대하던 딸의 약혼식도, 훗날 치를 혼례도, 재롱을 부리는 손자도, 그 무엇도 볼 수 없다. 아니, 볼 수 없게 되었다. “건방진 놈.” 기련문주는 혀를 차며 수인을 맺었다. 이미 힘의 소모가 컸으나, 아직 저 어린 놈이 넘볼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요천도지. 땅과 하늘이 뒤바뀐다. 놈이 화경이라는 경지에 적응하기 전에 빠르게 처리한다. 쐐애애액────────!! 일렁이는 공간이 길게 늘어져 서준을 덮친다. 서준은 붉은 눈으로 그 모든 것을 보았다. 서억- 허공에 생겨난 역천일월강기가 공간을 베었다. 기련문주의 주술이 흩어진다. “쯧.” 예의 그 성가신 기술인가. 기련문주가 혀를 찼다. 동시에 서준의 기검들이 날아든다. 기련문주의 손가락이 기묘한 문양을 그렸다. 우웅-! 공간이 휘어지며 기검들이 도리어 제 주인을 노린다. 서준의 코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서준이 기검에 꿰뚫리는 일은 없었다. 화악-! 기검이 자연스레 흩어지며 서준의 몸 주변을 맴돈다. 서준은 붉은 눈으로 기련문주를 바라보다 문득 깨달았다. 일전 북해빙궁에서 마주쳤던 사내. 제천혁의 시체 주위에 화사한 꽃들이 피었다. 꽃이 핀 흔적을 따라 고개를 들어올리면 화창한 하늘이 그곳에 있었다. ‘결국 완성하셨구나.’ 활검(活劍). 달리 심검(心劍). 장모님의 지병을 치료하려 개척해낸 길이지만, 너무 늦어 의미를 잃었던 그 검. ‘그런 거였구나.’ 그토록 그리워하던 장모님을 만나러 떠나신 것이었구나. 쐐애액-! 기련문주의 주술이 끝없이 날아든다. 서준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온갖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의식을 잃은 남궁연. 숨이 끊어진 남궁진천의 시신. 그의 곁에 놓인 부러진 검. ‘하다못해 지키려 하셨던 것만은….’ 이 내가 그 뜻을 이어 지켜낸다. 서준의 눈에 붉은 기운이 어렸다. 동시에 손을 뻗었다. 이내 움켜쥐었다. 영역 내의 모든 기가 일시에 정지한다. 기련문주의 눈이 부릅 뜨였다. 서준은 쥐었던 손을 펼쳤다. 화악-! 영역이 끝없이 퍼져나간다. “무슨 놈의 영역이 이렇게….” 기련문주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서준은 말없이 그를 보았다. 신과 정을 잇는 기가 다른 누구보다도 월등하니, 영역 역시 다른 누구보다도 드넓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구나.” 쏴아아-! 기련문주의 손짓 아래 사막의 모래가 솟구친다. 모래의 해일은 기련문주의 손바닥 사이에서 압축되고, 이내 기다란 창의 형태를 갖췄다. 영역이 넓어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다. 중요한 것은 영역의 견고함과 그 활용도. 기련문주가 손을 뻗는 것과 동시에 모래창이 공간을 뛰어넘었다. 공간 자체를 무로 되돌리는 남궁진천에게는 통하지 않았지만, 다른 놈에게는 아니다. 이어붙은 공간이 열리고, 모래창이 서준의 코앞에서 쏘아졌다. 의미는 없었다. 푸화악-! 모래창이 흩어지며 서준의 주위를 맴돈다. 기련문주의 눈가가 떨렸다. ‘…주술이.’ 통하지 않는다. 남궁진천과는 다르다. 모든 기(氣)가 저놈의 통제를 따른다. 자신이 다루던 모래가 저 어린 놈의 주변을 맴돌며 그를 호위한다. 기련문주의 표정이 일그러진 순간, 서준은 스스로의 마음을 보았다. 혼란스럽게 마구 뒤엉킨 심상이 어지럽다. ‘진아(眞我).’ 천산에서 만났던 머저리를 기억한다. 인간은 타인을 오롯이 이해할 수 없다 했던가? 옳다. 당연한 일이다. 상대에 대해 전지하다면 그것은 인형 놀이와 다를 바가 없다. 전지하지 않기에 인간은 서로를 가까이 두고 살아간다. 스스로를 오롯이 이해할 필요도 없다. 그저 있는 대로 살아가면 그만이다. 필요한 것은 다만 지켜낼 힘. 오직 그뿐. ‘채워낸다.’ 아직 자신의 영역은 비어있다. 주변 공간을 통제하에 넣었으나, 그것은 반쪽짜리 영역에 지나지 않는다. 강기 위로 떠오르는 별과 같이, 영역 안에는 그에 걸맞는 심상이 필요하다.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저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이미 마음 속에 자리한 심상을 영역 내부에 투영시킨다. ‘내가 바라는 것은….’ 울타리 안의 평안. 소중한 것들을 높이 쌓은 담벼락 안에 가두고, 외부의 적들을 모조리 찢어발길 힘. 영역에 심상이 담긴다. 서준은 그렇게 완성된 스스로의 영역을 입에 담았다. “이상향(理想鄕).” 화아아아악───────── 바람이 불었다. 기련문주는 멍하니 주변을 보았다. 푸른 하늘, 굳건한 대지, 낮과 밤을 이루는 해와 달, 흐르는 강, 강이 흘러 모인 바다, 초원 위에는 매화가 피었고, 흰 구름 사이로 뇌전이 번쩍인다. 완전한 하나의 세계. ‘어떻게?’ 이제 막 화경에 오른 놈이 이런 굳건한 영역을 구축할 수 있다고? 아니, 그 전에. 한 인간의 심상이 이토록 다채로울 수 있단 말인가? 기련문주의 표정이 굳었다. 동시에 서준이 손을 뻗었다. 스스로의 영역이다. 다루는 법은 영역을 펼친 순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서준의 손짓에 이끌려 하늘이 떨어져내린다. 제왕검형(帝王劍形). “큽…!” 기련문주가 재빨리 몸을 피하며 수인을 맺었다. 공간이 휘어지며 그의 몸을 감쌌다. 쿠우우우웅────────!! 기련문주의 몸이 땅에 처박혔다. 서준이 손가락을 위로 그었다. 땅이 솟구친다. 패력괴신무(覇力怪神武). 꽈아아앙────────!! 대지가 뭉친 주먹이 기련문주를 후려쳤다. 기련문주가 가까스로 바다 위에 착지했다. 촤아악-! 발이 끌린 궤적을 따라 흰 포말이 인다. “건방지게…!” 기련문주가 즉시 수인을 맺었다. 서준이 보다 빨랐다. 수인을 완성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손을 움켜쥐었다. 콰르륵-! 바다가 부드럽게 흐르며 기련문주를 끌어당긴다. 백하귀양(百河歸洋). “크읍…!” 기련문주가 공간을 휘어 빠져나왔다. 살랑-, 옅게 부는 바람에 매화가 흩날린다. 서준의 손가락이 부드러운 선을 그렸다. 매화검법(梅花劍法). 주변을 에워싼 무수한 매화에 기련문주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이런 미친….” 기련문주가 힘차게 양손을 휘둘렀다. 올올이 풀려나온 공간의 파동이 매화를 밀어낸다. 파아앙-! 동시에 지배한 공간을 쏘아내고자 했다. 허나 공간이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않는다. ‘이건 또 뭔….’ 공간을 다루기 위해서는 매개가 필요하다. 그 매개가 바로 기(氣)다. 헌데 그 기가 기련문주의 통제를 벗어났다. 아무리 남궁진천과의 전투로 힘이 바닥났다고 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기련문주가 서준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서준 역시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붉은 눈. 기련문주의 몸이 흠칫 떨린 순간, 하늘과 땅을 가리킨 서준의 손이 하나로 합쳐졌다. 혼원일월공(混元日月功). 하나의 세계가 점으로 수렴한다. 하늘과 땅이 뒤섞이고, 바다와, 바람과, 강과, 구름과, 태양과, 달과, 세상만물이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기련문주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자신을 둘러싼 만물이 태극을 그리며 한 점에 모여든다. 이게 뭔지 알 것 같았다. 퍼져나가려는 태극을 한 점에 가두면 어떻게 되는가. 답은 간단했다. 콰아아아아앙─────────!!! 폭발이 세상을 집어삼켰다. * 서준은 기련문주가 있던 장소를 바라보았다. 텅 빈 그곳에는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열심히 도망쳐봐라.’ 그는 여전히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다. 화악-! 서준의 전신에서 마기가 피어오르며 세 송이 꽃이 피었다. 까드득-! 까드득-! 세 송이 꽃은 이내 꽃잎으로 화하고, 무수한 꽃잎들은 주변에 널린 시체들을 씹어 삼켰다. 이미 죽은 세 화경의 시신이다. ‘아쉽게 됐어.’ 서준은 육신을 떠난 혼을 붙잡는 법을 알지 못했다. 허나 죽기 전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장인어른께서는 어쩌면….’ 만약의 가능성을 생각하던 서준은 이내 머리를 털어냈다. 당장 생각해봐야 의미 없는 가정이다. 대신 보아야 할 것을 보았다. 황급히 도망치는 기련문주. 영역 내의 움직임이 손에 잡힐 듯 훤하다. 서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화경에 적응하며 무언가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화경과 극마. 두 경지가 서서히 합일을 이루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