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진 검. 대신하여 하늘을 붙잡아 검으로 삼았다. 남궁진천의 검이 제천혁을 겨누었다. 제천혁은 그를 보았다. 쓰러지기 일보직전이다. 그 뒤에는 기절한 남궁연이 있다. 엉망이 된 주변. 그녀 주변의 공간만이 멀쩡해 이질감이 든다. “고작 피붙이 하나 지키는 것이 그리 중요한가?” “가족이니 당연한 일이오….” “이해가 되지 않는군. 고작 피로 이어진 관계에 얽매일 사내로는 보이지 않는데.” “나는 그런 사람이 못 되오…. 여전히 검을 놓지 못한 우자일 뿐…. 겁 많은 범인에 지나지 않소….” 남궁진천의 검이 휘둘러졌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임에도 그의 검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예리했다. 쉬익-! 몸을 젖혀 피한 제천혁이 앞발을 크게 앞으로 밀었다. 동시에 그의 주먹이 희게 타올랐다. 파천(破天). 기실 제천혁의 영역은 대단한 공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상대를 조금 더 자세히 볼 수 있을 뿐. 세간에서 말하는 존재의 소멸이니 하는 것들은 그저 제천혁의 주먹에 깃든 하나의 힘에 불과했다. 대신 그의 영역은 상대를 면밀히 꿰뚫는다. 그 움직임, 상태, 이어질 동작까지도. ‘분명 죽기 직전이다.’ 제천혁은 자신의 영역 속 남궁진천을 보았다. 생명은 꺼지기 직전이요, 움직임에는 이전과 같은 힘이 없다. ‘헌데 도대체 이 느낌은….’ 제천혁은 알 수 없는 위기감에 황급히 몸을 피했다. 쩌억- 눈앞의 공간이 검게 벌어진다. 위험을 직감한 제천혁이 크게 물러나 허공을 두드렸다. 투투퉁-! 허공을 격한 권격에 남궁진천의 몸이 흔들린다. 가슴에 뻥 뚫린 구멍에서는 끝도 없이 피가 새어나왔다. 제천혁의 주먹에 담긴 공능이 그의 존재 자체를 갉아먹고 있었다. 남궁진천은 여전히 옅게 웃었다. “나는 더 이상 누군가를 잃어 후회하고 싶지 않소…. 상실이라는 그 고통이 두려워 도무지 견딜 수가 없소….” * 남궁진천은 시골 소녀에게 가장 먼저 입맛을 사로잡혔다. 어떤 음식을 먹어도 그때 그 맛을 도무지 잊을 수 없었다. 결국 여인이 사는 마을을 벗어났다가도 며칠이 지나면 다시금 발걸음이 그곳을 향했다. 그렇게 일 년, 이 년, 삼 년. 시간이 흘렀다. 딱히 극적인 순간은 없었다. 그저 스며들듯 여인의 존재가 가슴에 담겼다. 그러다 어느 한 순간, 남궁진천은 깨달았다. 이제는 이 여인이 곁에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여인은 그의 청혼에 크게 기뻐했고, 가족과 함께 남궁세가에 들어와 신혼 생활을 이어갔다. 문제가 터진 것은 첫째, 수아를 낳고 난 뒤였다. 한 아이의 어미가 된 여인은 전보다 조금 어른스러운 투로 말했다. ‘괜찮아요. 원래부터 조금 몸이 약했어요.’ ‘부인의 몸보다 중요한 건 없소. 다른 일은 전부 제쳐두고 보신에 신경 쓰시오.’ 하지만 여인은 몸이 조금 나아지자마자 바쁘게 움직였다. 아무리 남궁세가라 한들 근본도 없는 시골 여인이 안주인이 된 것에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감히 여인에게 직접 불만을 토하는 이는 없었으나, 타고나길 눈치가 좋았던 여인이 그런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할 리는 없었다. 여인은 지아비를 위해, 태어난 아이를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안주인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남궁진천은 그녀를 말리지 못했다. 그녀의 활기찬 모습이 마냥 좋았다. 우둔했다.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남궁진천은 여전히 그 시절의 자신을 미치도록 혐오했다. 활기찬 모습이 좋았다면 그 모습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면 안 됐다. 세가 내의 모든 이들의 입을 틀어막아서라도 부인이 안심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평생을 검만 붙잡고 살아온 사내는 그토록이나 미숙하고, 멍청했다. 끔찍할만치 생각이 없었다. 꿈속에서 그 시절의 자신을 몇 번이나 목 졸라 죽여도 지나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강렬한 감정에 눈이 먼 머저리. 그 머릿속에 들어찬 꽃밭에는 불행한 미래가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은 괜찮다며 웃는 부인의 말에 실없이 웃으며 사랑을 나눴다. 결국 둘째, 명이를 낳고 파국이 찾아왔다. ‘상공께서는 정이 너무 많아요. 제가 없으면 어찌 하시려고….’ 괜찮아진 듯 싶었던 부인의 몸은 아이를 낳으며 급격하게 쇠하기 시작했다. 본래 앓던 지병이 악화됐고, 떨어진 체력은 병을 이겨내지 못했다. 몸져누운 부인은 그럼에도 스스로의 안위보다 제 미숙한 지아비를 걱정했다. ‘훗날 제가 없을 때, 너무 외로워지신다면 제 검을 저처럼 여겨주세요. 검에 깃들어서라도 상공의 곁에 있을게요.’ ‘…그런 소리 마시오, 부인. 그대가 잘못될 일은 없소.’ 부정했다. 허나 무에 통달한 그의 이성은 끊임없이 외쳤다. 이미 늦었다고. 돌이킬 수 없노라고. 가장 지키고 싶었던 이를 지키지 못한 검은 그저 사람을 죽이는 검일 뿐이요, 그런 피 묻은 검으로는 사랑하는 이 하나 살릴 수 없었다. 뒤늦게 활검에 몰두해 보기도 했으나, 미천한 재능으로는 때를 맞추지 못했다. ‘상공, 저는 괜찮아요.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금방 나을 거예요. 수아…, 그리고 명이랑 소풍을 가기로 했잖아요.’ 부인은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남궁진천을 위로했다. ‘상공…. 상공…, 저, 숨이….’ 마지막 순간에는 눈앞에 닥친 죽음이 두려워 눈물을 쏟았다. 떨리는 손으로 남궁진천의 손을 붙잡고 애원했다. 살고 싶다고. 조금 더, 당신과 함께하고 싶다고. 남궁진천은 그녀를 위해 무엇 하나 할 수 없었다. 그저 지독하게 깨달았다. 자신의 과오가 부인을 죽였다. 자신이 부인을 죽였다. 가증스러운 살인자는 자신이 죽인 반쪽 앞에서 염치도 없이 울었다. “후회하고, 또 후회하오….” 자신의 반쪽을 잃었다. 가슴에 남은 빈자리는 여전히 채워질 줄을 몰랐다. 지워내지 못한 미련에 다시 검을 잡았으나,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이제 아이들마저 스스로의 길을 찾았으니, 애써 이 질긴 명줄을 붙잡을 필요가 어디 있겠소….” 파스스…… 붙잡은 하늘이 흩어진다. 더는 영역을 유지할 힘조차 없었다. 반으로 부러진 부인의 검은 사막의 모래에 파묻혔다. 남궁진천은 흐린 눈으로 제천혁을 보았다. 콰아아아앙────────!! 희미하게 들려오는 폭발음. 남궁진천의 입가에 기꺼운 미소가 맺혔다. ‘사위인가….’ 부인을 너무도 닮은 딸이 방황 끝에 찾아낸 그녀의 반쪽. 딸에게는 같은 아픔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제천혁은 마음이 급해졌다. 정파의 지원이 오기 전에 남궁진천을 죽여야 한다. ‘어떻게 지원이 벌써….’ 싸움의 여파가 극심했다 한들 정파의 영역과는 거리가 있을 텐데? 고민할 시간조차 아까웠다. 제천혁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남궁진천은 떨리는 손을 들어올렸다. 빈손. 허나 검을 쥔 듯 허공을 움켜쥐었다. ‘내 마지막 검이네, 사위….’ 마지막 순간까지 제 의미를 찾지 못한 검일지언정, 사위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이 후회를 놓아주고, 환상인지, 혹은 여태껏 자신을 기다려주었는지 알 수 없는 부인의 형상이 저 멀리서 손을 뻗는다. 남궁진천 역시 웃으며 마주 손을 뻗었다. 한 발, 한 발,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모습이 선명해진다. ‘그대가 없는 무림에는 꽃이 피지 않더이다….’ 제천혁의 눈이 부릅 뜨였다. 심장이 옥죄여온다. 그는 즉시 주먹을 내질렀다. 퍼억-! 남궁진천의 하나 남은 팔마저 박살났다. 그럼에도 서늘한 감각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의 영역이 끊임없이 죽음을 예고한다. “뭐냐, 이건…!” 제천혁이 다시 주먹을 내질렀다. 아예 남궁진천의 몸뚱이를 산산조각낼 심산이었다. 허나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이미 베였다.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화아아악─────────!! 활검(活劍). 천하제일인이 펼쳐낸 마지막 검. 살리고자 하는 검이었으나, 그의 검은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을 죽이는 법밖에 알지 못했다. “허….” 제천혁은 하늘을 보았다. 화경 간의 전투에 엉망이 되었던 공간이 수복되어 간다. 자연의 이치가 아닌, 한 사람이 이루어낸 기적. “창천, 검존….” 한 마디를 끝으로 제천혁의 몸이 사막에 파묻혔다. 화악-! 그의 시체 주변으로 꽃이 피었다. 비를 쏟아내던 하늘은 푸르게 개었고, 적막하던 사막은 온갖 꽃들이 수놓았다. “장인어른…!” 앞이 보이지 않는다. 남궁진천은 희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사위….” “이게, 아니…! 어떻게…!” “약혼식을 보지 못하게 되어 아쉽군….” 대꾸 대신 돌아오는 것은 쏟아지는 자연의 기(氣). 사위의 노력에 남궁진천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말게…. 이제는 나도 앞으로 나아가야지….” “앞으로 나아가려면 일단 몸부터…!” “아니…. 내 길은 이곳에 있지 않네….” 어두운 시야. 그보다 더욱 어두컴컴한 길이 아주 깊숙한 곳까지 이어진다. “사위….” “…예.” “조심하게…. 아직 끝을 내지 못했으니….” 남궁진천은 작게 웃으며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바람이 불고, 검이 울었다. “물론, 자네라면 잘 해낼 것이라 믿네….” 그 말을 끝으로 남궁진천의 의식이 심연으로 떨어졌다. 끝없이 깊은 통로의 저편에서 작게 손을 흔드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너무 늦어 미안하오.’ 남궁진천은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육신을 떠난 신(神)이 명계로 향했다. 정파의 가장 큰 별이 졌다. * [죄인 남궁진천은 들으라…!] * “장인어른….” 서준은 사막에 핀 꽃을 보았다. 의식 없는 남궁연을 보았고, 굳게 선 채 죽은 남궁진천을 보았다. 상실. 이미 알고 있었으나, 눈을 돌리고 있던 것. 칼에 찔려 죽어가는 아빠의 뒷모습과, 굳게 선 채 움직이지 않는 장인어른의 뒷모습이 겹친다. 가슴에 파문이 일었다. 애써 무시해오던 감정이 자비 없이 눈앞에 들이닥쳤다. 외면하던 감정을 마주한 순간 서준의 신(神)이 경계를 넘어섰다. “끄응….” 기련문주의 시체. 그 품 속에서 짚인형 하나가 기어나왔다. “어찌 살아남았군.” 남궁진천이 혼의 이동을 눈치챘을 때는 영락없이 죽는 줄 알았으나, 자신은 끝내 살아남았다. “운이 좋아.” 짚인형이 형태를 뒤바꾸며 사람의 형상을 취했다. 기련문주 혁문약이 남궁진천의 시신을 보며 눈을 빛냈다. “또 보는구나.” 그가 서준에게 말했다. “저기 기절한 남궁의 핏줄을 데리고 돌아가라. 순순히 물러나면 붙잡지 않으마.” “…….” 서준이 붉은 눈으로 그를 보았다. 말없이 펼쳐진 영역이 일대를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