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가 배역에 몰입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연기란, 종합적인 것이다. 외견과 내면의 균형을 맞추고, 배우가 가진 기술이 들어가야 좋은 연기가 나온다. 사실 예술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 어느 하나만으론 올바르게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배역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치명적인 단점이었으나. "오늘 첫 촬영이죠? 다들 긴장하지 말고 착착 진행합시다!" 김일수 감독은 편하게 말했으나, 내심 불편했다. 그 역시 드라마국의 개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으니까. '여기서 밀리면, 그림이 영 좋지 않겠어.' 에 어떠한 악재가 될 수도 있고, 혹은 김일수 자신의 커리어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그러니 심기일전. 최대한 드라마를 완성도 있게 뽑아야만 했다. 뭐 방송국이라는 게 KMB만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오늘 장면은, '하늘 정원'에 찾아온 이유주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즉, 젊은 배우들이 힘 좀 써야 해요." 처음 시작은 어른들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이유주라는 인물에 대한 설명. 그리고, 그녀에게 얻어내야 할 것. 그런 그녀를 노리는 어른들의 뒷 사정과, 그에 휘말린 아이들의 모습이 나와야 했다. "주인공은 이유주이지만, 나머지 아이들도 제 역할을 해줘야 합니다." 어찌 보면 때와 같다. 배역 하나하나가 주연급 존재감을 가졌다는 점에선. 물론 처럼 완전히 주연급은 아니다. 그럼 자칫 산만해질 수 있기에, 포커싱이 맞춰지는 건 크게 셋. 학생은 이유주, 이혁수 가(家)의 첫째인 이민혁. 그리고 어른은 이혁수 가의 안주인인 길수진 크게 이 셋을 중심으로 작중 흐름이 이어진다. 오늘 찍을 것은 1화. 당연히 이 셋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셋에게 몰입할 수 있는 흐름이 되어야 했다. '좋아. 괜찮아.' 이혁수가의 첫째, 이민혁의 역을 맡은 김현석은 긴장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는 자신의 연기에 자신이 있었으나, 그와 별개로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크게 호흡하며 다른 배우들을 살핀다. 오늘을 유독 젊은 배우들이 많았다. 당연한 일이다. 이유주가 첫 등장하는 장소는 학교. 당연히 학생 역을 맡은 배우들이 다수 등장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긴장을 잘 하지 않는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김현석은 힐끗거리며 서연을 보았다. 평소와 묘하게 분위기가 다른 녀석. 긴장한 다른 젊은 배우들과 달리, 유독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것이 또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차마 뭐라 할 수는 없었다. 여전히 김현석의 호주머니에 있는 동전. 그것의 존재감이 또렷하게 느껴졌기 때문. "자, 그럼. 우선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카메라가 사방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저마다 오케이 사인을 맞추며, 촬영이 시작되기 전 현장이 고조되는 느낌. 그것을 바라보며, 민세희는 양손을 간절히 모았다. 그 모습은 얼핏, 기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그만큼 민세희는 절실한 마음이었다. '제발 내가 생각한 느낌처럼 나와야 할 텐데.' 대본과 실제 드라마의 느낌이 다른 경우가 있었다. 그건 배우들이 잘못한 게 아닌, 오롯이 작가의 문제. 글로 쓸 때와 장면으로 표현되었을 때 느낌을 고려하지 못한 자신의 탓이다. 모두가 대본으로 볼 때는 재밌다고 극찬했다. 감독인 김일수도 대본대로 잘 살려보겠다고 자신했지만 '여전히 불안해.'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한다. 박정우가 자주, 민세희에게 했던 말이었다. 당장 대본이 끝까지 완성된 게 아니었음에도, 첫 화부터 흔들리는 자신이 있었다. 드라마가 4화까지 촬영된 시점부터 방영이 시작되니까. "자, 그럼. 액션!!" 감독의 외침과 함께 슬레이트를 치며, 본격적으로 촬영이 시작되었다. *** 상류층이 모여 사는 '하늘 정원'.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멋진 면면들과, 여유롭고 화목한 가족. 그들은 정기적으로 만나, 여러 가지 정보를 교환하며 친목을 다졌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일 뿐. 그들은 누구보다 서로를 살피며, 경쟁심을 품은 것도 사실. 서로서로 화기애애한 모습들을 보여주며, '하늘 정원'의 주요 인물들이 소개된다. 이혁수가의 안주인, 길수진의 시점으로. 이윽고, 그 화기애애한 장면이 멈췄을 때. 적막한 공간에서, 길수진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번에 들은 정보가 있어요」 그 말에, 남편인 이혁수의 시선이 움직인다. 말없이 그저 고요한 눈. 「이유주.」 「그게 누군데?」 「전년도 백연 의대 수석, 그 여동생.」 「당신 무섭네,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 「그 아비가, 입시 코디네이터에요. 잘난 듯이 떠벌렸죠.」 입시 코디네이터.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이혁수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도 떠오른 게 있었으니까. 「아, 그 양반. 기억나네, 당신이 최근 갔던 행사였나?」 「맞아요. 한물갔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깜짝 쇼를 준비했더군요.」 백연 의대 수석. 한물간 지 오래된 입시 코디네이터의 아들이 그곳에 간 것이다. 이보다 확실한 홍보 수단이 있을까. 심지어 벌이도 변변치 않아, 제대로 된 백업을 해주지도 못했을 텐데. 「그 자리에 있던 부모들이 죄다 그 남자를 노렸죠. 어떤 방법을 썼는지. 알고 싶었으니까요. 그러니 신나서 자식 자랑만 떠들더군요.」 이번에 태양 고등학교에 자신의 딸이 입학한다. 그 딸에게 모든 방식을 일러주었다고. 이번에도 오빠와 같은 길을 걷게 될 거라는 확신이 그 말에 담겨있었다. 「백연 의대 수석의 포트폴리오, 그걸 완벽히 숙지한 아이라는 거죠.」 「그게 돼?」 「실제로 그 오빠는 했잖아요? 그것도 아주 완벽하게.」 그림으로 그린 듯한 우등생이었다고 한다. 내신이면 내신, 가산점은 놓치는 게 없었고. 봉사활동부터, 학생회장까지. 그 결과는 백연 의대 수석으로 보여줬다. 「민서에게 말했어요. 여자애니까 최대한 친해지라고.」 두 쌍둥이. 조금 부족한 딸에게는 반드시 필요했다. 「딸이 부족하면, 부모가 대신 설계해 주지 않으면 안 되잖아요?」 어떻게든, 그 아이를 잡아야 했다. 부족한 집안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는 자신의 자식들이 가장 소중했으니까. 그렇게. 장면이 전환되며, 학교. 「이유주, 인가.」 그런 말을 중얼거리는 남학생이 있었다. 이혁수 가의 첫째이자, 이민서의 오빠인 이민혁. 그는 여동생과 함께 오늘 입학식에 참여하는 이들을 훑어보았다. 이중 누가, 이유주일까. 「사진도 없는데 어떻게 찾으라는 거람.」 쌍둥이 동생인 민서가 툴툴거렸다. 그녀는 민혁과 달리 친해지라는 말을 들은 당사자였다. 하지만, 얼굴도 모르는데 어떻게 친해지란 말인가. 심지어 반이 다르면? 직접 찾아가야 하나? 「한눈에 알아볼 거라고 했어.」 「그게 말이 돼? 애초에 그런 애를 왜 신경 써야 하는데? 부모도 망한 입시 코디네이터에 불과하다며?」 「이제 망한 건 아니지. 그 아들이 백연 의대 수석에 갔으니까.」 「그건, 그렇지만. 흥, 난 의대 별로 관심 없는…… 아, 알았어.」 차가운 민혁의 시선에 민서는 몸을 움찔했다. 공부를 잘하는 민혁과 달리, 민서는 다소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길수진이 더욱 신경 쓰는 편. 「실패한 인생이 되고 싶어? 애야?」 「애지, 뭘.」 흥, 하고 투덜거리며 눈치를 살피며 민서가 툴툴거렸다. 그런 쌍둥이 동생이 민혁은 그저 철이 없어 보였다. 하고 싶은 일. 그런 건 생각도 해본 적 없다. 성공한 인생이 기다리고 있는데, 굳이 다른 길로 갈 필요가 있는가? 배부른 고민이다. 부모가 만들어준 길만 걸어가면 되는데 무엇이 힘들게 있나. 「너는 친해지기만 하면 돼. 그럼 없는 집 애니까,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을 거 아니야.」 「없는 집까지는 아니지 않나?」 「듣기로는 집도 내놓았다는 소문이 있어.」 「그, 그래? 그럼 태양고는 어떻게 온 거야?」 「성적으로.」 그렇게 둘이 대화하던 순간이었다. 입학식이 열리는 강당으로, 또 한 무리의 고등학생들이 들어왔다. 그렇게 빈 줄을 채우기 시작하는 학생들을 중, 작은 술렁임이 느껴졌다. 「뭐지?」 묘하게 사람들의 시선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그것을 따라 두 남매의 눈이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그들이 보는 것. 이 술렁임의 원인을. 「!!」 그곳에는 새까만 여학생이 있었다. 그래, 새까맣다. 단순히 외견적인 의견이 아니다. 존재감. 마치 빛을 삼키는 것처럼. 고요한 어둠을 머금은 인간이 그곳에 있었다. 한눈에 알 거라는 말은 들었다. 그 말대로, 한눈에 알 수밖에 없었다. 중산층, 아니. 그조차 못될지 모르는 평범치 못한 여학생. 그녀가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느껴지는 비범함이 있었다. '아.' 이민혁은. 아니, 이민혁 역의 배우. 김현석은 순간 말을 잊었다. 대사가 있었던 것 같은데, 쉽사리 흘러나오지 못했다. 그건, 자신의 곁에 있던 민서 역의 배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호들갑을 떨며 이야기해야 할 민서가,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했다. 주변의 술렁임. 단순한 연기가 아니었다. 많은 학생. 많은 배우의 틈에 끼어 있었음에도 발하는 존재감이 있었다. 이 장면을 본 시청자라면, 누구라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게, 주연이라고. 그때, 이유주와 시선이 마주쳤다. 고요했던 이유주의 표정이 변한 건 그때였다. 눈이 휘어지며,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머금어진다. 비웃음. 그 눈에 담긴 혐오가 화살처럼 날아와 김현석의 몸을 꿰뚫었다. "대사 안 해요?" "아." 빈정거리며 말하는 그녀의 말에, 김현석은 멍청하게 답했다. 대사, 말해야 하는데 전혀 기억나지 않았으니까. "컷컷컷! 다시 합시다. 다시!" 김일수 감독의 외침에 배우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저마다 참았던 숨을 토하는 게 느껴졌다. '정말, 고등학생이 맞아?' '그보다, 굉장히 성격이 좋다고 들었는데.' '역시 좀 노는 애 아냐?' 저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서연을 보았다. 굉장히 불만 어린, 비틀린 얼굴. 입가에 머금은 조소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살벌하게 휘어진 눈이, 그들에게 향할 때면 절로 눈을 깔게 된다. 이전에 대본 리딩 때와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뭐야, 왜 저래.' '메소드인지 뭔지 하는 그건가?' 저마다 툴툴거렸지만, 입 밖으로 내는 사람은 없었다. 장면에서 완전히 압도되어 버린 탓에, 조용히 찌그러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서연은 그런 배우들의 생각을 읽었다. 잠시 다른 생각이 들려고 했지만, 억지로 막았다. '지금은 계속 감정을 잡아야 해.' 이유주. 자신과는 다른 그 인물에 익숙하기 위해선. 서연은 함께 공부했던 반장. 길다현에게 들은 말을 떠올렸다. "이해가 어렵다면, 풀이 과정을 그대로 암기하면 돼." 다현은 그리 말하며 웃었다. "서연이는 암기력이 좋잖아. 공식을 완벽히 암기한다면,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되는 거야." 암기. 그래, 그 말대로였다. 실제로 서연은 한번 비슷하게 한 적이 있었다. 서연이 처음 복귀를 결정했을 때. 연극에 참여하여, 스토커 '홍정희'. 나름대로 감성을 이해하려 했지만, 온전히 이해할 수 없어 표지우를 모사하였고. 거기에 자신의 연기를 더해, 자신만의 홍정희로 만들었다. 말하자면 표지우가 문제를 풀었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이번도 그것과 같아.'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단지 그때보다 쉽게 되지 않았기에. 서연은 참조할 만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그것을 눈에 새겼다. 그리고, 감정을 그대로 잡은 채, 촬영장까지 온 것이다. 이유주라는 인물을 완벽히 암기하며. 날카로운 시선. 비틀린 입매. 주변을 혐오하는 분위기에, 주변의 배우들이 기가 죽는 게 느껴졌다. 그것을 보며 김현석은 이를 악물었다. 방금 장면이 어떠했을지는 불 보듯 뻔했으니까. '보이지도 않았을 거야.' 그나마 장면에 함께 잡히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할 지경이었다. 방금 서연과 한 장면에서 잡혔던 배우들. 아마 TV에서 본다면 그들의 얼굴을 기억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있는 줄도 모를 거다. 죄다 이유주라는 인물에 집중할 테니까. 그야말로 충격적인 첫 등장 씬이었다. '심지어 NG까지.' 김현석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자신은 주머니에 있는 동전과 같았다. 완벽히 접혀버린, 쓸모없는 동전. 서연의 시선은 마치 시선을 비웃는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비웃고 있었다. 마치, 입으로 그렇게 떠들었으면서, 그게 다야? 그런 느낌. 그 탓이었을까. 촬영이 마무리된 건 그로부터 몇 시간 후였다. 김현석이 몇 번이나 NG를 내었으니까. 그렇게. 그날 저녁. "……." 촬영을 마치고 돌아온 서연은 침대에 누워서 생각했다. '너무 오버했다.' 집에서부터 감정을 잡고 가는 건 부작용이 너무 심했다. 사방에 비웃음과 경멸을 흩뿌렸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 연기는 만족한 만큼 나왔지만. 이게 참 뭐라고 할까, 부끄러워졌다. 특히 김현석을 볼 때 그런 게 강했던 기분. 몇 번이나 NG를 내며 비참하게 몸을 떨던 김현석을 떠올리니, 서연은 괜히 몸이 움찔거렸다. 그때마다 조소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으니까. 이거, 너무, 좀. 서연은 이불을 뻥뻥 찼다. 그리고. "어머, 딸. 이불 어디 갔어?" "터, 터졌어요." "어머, 터졌니?" "네, 네." 서연은 터진 이불의 솜을 주섬주섬 쓸어 담았다. 부끄러움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 아무튼 의 1화를 한창 촬영하고. 의 다음 촬영까지 조금 남은 시기. 서연에겐 드물게 스케줄이 공백인 때였다. "인터뷰요?" 「응, 스케줄 괜찮아?」 차나희로부터 온 연락. 그건 와 관련된 일이었다. 「이번에 드림 퓨처가 일본으로 수출되거든. 그래서 인터뷰도 함께 진행하려는 모양이야」 그렇다고 딱히 일본 기자와 인터뷰하는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국내 인터뷰. 「팬들과 소통하는 느낌으로 진행된다고 해.」 "저는 괜찮아요." 「진짜? 아, 그리고 말인데.」 인터뷰 말고 또 뭔가 있나? 그런 생각을 하며 귀를 기울이자. 「내가 아는 피디님 중에, 서연이에게 관심이 있는 분이 있거든. 예능 피디님인데.」 예능! 서연은 큰 관심이 생겼다. 이러나저러나 서연은 예능 촬영도 좋아하는 것이다. 대부분 활동적인 일이 많고, 이것저것 배우는 게 많았으니까. 「혹시, 관찰 예능 같은 거 좋아해?」 그 말에, 서연은 딱딱하게 굳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