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서연은 매일 일과가 된 편의점 출석도 잊고 재빠르게 등교했다. 미리 가서 슬쩍 이지연에게 어제 자신이 본 것이 맞는지 물어볼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어, 지연이 오늘 아침 촬영 때문에 늦는다고…….” 그랬지. 서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생각해보면 지연도 바쁜 몸이었다. 드라마도 출연 중이었고, 인기도 점차 늘어나는 추세라 CF도 얻은 모양. ‘거기다 이후로 정민재 PD와도 친해진 모양이고.’ 이래저래 자신과 달리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뛰어난 이지연이다. 전생에 단시간에 인기 버튜버가 된 건 역시 능력이 있기 때문이겠지. “……응, 지연이가 오면 나중에 말해줘.” 서연은 그렇게 말하며 터덜터덜 몸을 돌려 걸어갔다. 덕분에 서연에게 불렸던 지연이 반의 여학생은 졸지에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왜, 뭐래?” “나 이렇게 가까이서 처음 보는데 얼굴 진짜 작다. 저게 연예인?” “이런 거 보면 지연이도 연예인이구나.” 학생들은 그런 말을 하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었다. 사실, 너무 친숙해서 잊은 친구들이었으나, 현재는 서연보다 지연 쪽이 연예계 활동도 더 오래했기에 아는 사람이 더 많았다. 단지 너무 가깝기에 모르는 것이 있는 법. 거기에 최근 촬영했던 의 충격이 워낙 컸던 탓이다. “나도 말 붙여 보고는 싶은데…….” “조금 무섭지.” 너무 예쁘면 무섭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이 딱 어울리는 게 서연이었다. 거기다 좀 웃고 다니면 모르겠지만 서연은 시종일관 무표정. 딱히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서늘한 인상을 학생들에게 주는 편이었다. 만약 지연이 들었다면 ‘편의점 갈 때처럼 웃고 다니면 좀 좋아.’라고 하겠지만, 이 자리에 지연은 없었다. 그로부터 오후 5교시 체육. 옆 반과의 합동 체육 시간에 서연은 겨우 지연을 볼 수 있었다. “적당히 피구나 해라. 다치지 말게 조심조심.” 늘 그렇듯 체육 시간은 피구. 사실 말이 피구지 자습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실제로 피구하는 학생이 얼마나 되겠냐만, 의외로 체육대회에 피구가 들어가다 보니 꽤 열심히 하는 이들도 있긴 있었다. 어쨌거나 학교가 예체능을 주력으로 밀다 보니, 운동에 자신 있는 학생이 많았던 탓이다. ‘대화하고 싶은데.’ 괜히 근처에서 기웃 거리다 옆 반과의 피구 시합에 끼어버린 서연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피곤한 얼굴로 서있는 지연이 보였다. 아침 촬영을 끝내고 온 탓인지 영 피곤해 보이는 안색이 눈에 띄었다. 그런 서연의 맞은 편, 말하자면 지연의 반의 여학생은 서연을 날카로운 눈으로 보았다. ‘주서연.’ 다른 여학생들의 틈에 끼어 있어도 빛나는 외모. 과연 배우라고 해야 할지. ‘하지만.’ 여학생은 손에 쥔, 피구공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연화 고등학교의 피구부는 전국 체전에서 늘 4강 안에 드는 강호. 그녀는 비록 후보이나, 엄연히 피구부의 선수였다. ‘제대로 한방 먹여주마.’ 절대 사소한 질투심이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아니 진짜로. 그냥 조금 너무 눈에 띈다거나, 남학생들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서연이 싫다거나. 좋아하는 피구부의 선배가 서연에게 호감을 가진 것 같다거나. 등등 그런 이유 때문은 절대 아니다! '이때다.' 서연이 지연을 보고 있는 이때. 여학생의 팔이 움직였다. “하아압!!” 전력을 다해 던지는 투구. 다른 곳을 바라보는 서연의 빈틈을 노려 매섭게 날아간 공은. 탁 “?” 너무 간단하게 서연의 한 손에 잡혔다. 튕긴 것도 아니라 한 손으로 잡은 거다. 손가락 모양대로 공이 움푹 찌그러진 게 보였다. ‘손도 그리 크지 않을 텐데?’ 저게 왜 잡히지? 악력이 얼마나 강한 거야? 아니, 그 전에 이쪽은 보지도 않았잖아.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팡!! “악!!” 순식간에 되돌아온 피구공에 여학생은 허리를 얻어맞고 나자빠졌다. 제대로 볼 수도 없는 구속에 잡는 건 고사하고 피하는 것도 무리였다. 그것을 본 지연은 어땠냐면. ‘……저 계집애 또 시작이네.’ 한 번에 세 명을 맞추고 우쭐한 서연의 얼굴이 보였다. 다른 이들이 보기엔 담담한 얼굴이었으나, 지연은 알 수 있었다. “흥.” 지금 서연은 자신의 화려한 피구 플레이에 스스로 도취된 상태라는 걸. 분명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눈치였는데, 공을 던진 순간부터 바뀌었다. 정확히는 주변 여학생들이 와! 하면서 박수를 친 순간부터. “기권.” “엑.” 그러니 지연은 담담하게 기권했다. 서연이 던지는 공에 맞으면 아주 아팠으니까. *** “아무튼 영화는 찍기로 한 거야?” “응.” 서연의 조가 피구를 마치고 잠시 쉬는 동안, 둘은 나란히 앉아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 ‘너무 악역만 하는 거 아니야?’ 그런 생각을 하며 말이 없는 지연을 보며, 서연은 입술을 몇 번이고 달싹이고 있었다. 유튜브 채널에 대해 말을 꺼내자니, 이게 쉽지 않았다. 그냥 대놓고 물어보면 그만이겠지만. ‘빨간약!’ 서연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여기서 그걸 물어보면 스스로 빨간약을 들추는 일. 아니, 지연이면 파란약이 맞겠지만, 그걸 떠나 정말 버튜버를 위해 채널을 만든 건지도 확실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갈피를 잃을 서연의 시선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을 때. “그리고 예능 말인데.” 서연이 입을 여는 것 보다 빠르게, 지연이 먼저 말했다. “케이블 예능은 어때?” “케이블?” “공중파 예능은 당장 마땅한 것도 없고, 좀 부담스러운 거잖아?” 는 엄연히 공중파 예능이긴 했다. 시청률이 지나치게 저조하여 케이블 예능과 비슷한 수준이었을 뿐. 서연의 현재 인지도는 10년 만에 복귀한 아역. 최근 예능에서 큰 화제를 모은, 나름 뜨거운 감자. 원한다면 분명 공중파도 출연할 수 있겠지만…… 솔직히 제대로 된 예능을 한 번도 출연해본 적이 없다 보니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었다. 는 예능보단 연극에 가까운 느낌이었으니까. ‘케이블 예능.’ 서연도 몇 가지 생각나는 게 있기는 했다. 하지만 케이블 예능은 또 고수위나 조금 날 것의 성향이 강했다. 거기다 악역 이미지를 중화시키는 것에 도움을 주냐면 글쎄……. “아.” 거기까지 생각하던 서연은 하나 떠오른 게 있었다. ‘아직 종영하진 않았겠지?’ 생각해보면 이쯤에 종영한 케이블 예능이 하나 있었다. 케이블 예능 중에선 드물게 배우의 이미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예능이었다. 커뮤니티에서 자주 언급되던 예능이었으니까. “그럼, 나 하나 생각나는 게 있는데…….” 혹시 괜찮나 싶어 지연에게 말하자. “……뭐?” 진심이냐는 시선이 되돌아왔다. 그야 그럴 만했다. 서연이 출연하고 싶다고 말한 케이블 예능은, 케이블 게임 방송국에서 장장 10년 동안 방영된 장수 예능이었으니까. *** 의 출연을 확정 지으며, 본격적으로 소속사와도 계획을 끝냈다. 노바 엔터테이먼트. 앞으로 내가 몸을 담게 될 소속사. 오랜만에 엄마와 함께 나온 외출에 긴장 섞인 한숨을 내뱉자. “그런데, 서연이 어머님도 혹시 어떠세요? 저는 진짜 가능성이 있다고 보거든요.” “어머.” 마찬가지로 내 계약을 직접 보러온 강찬율 대표의 말에 엄마가 난감하다는 듯 웃었다. ……농담이겠지? 그런 마음으로 그를 보았지만, 의외로 강찬율 대표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엄마가 좀, 동안이긴 하지만.’ 서연은 슬쩍 수아의 얼굴을 보고 쭉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여전히 큰 존재감을 발휘하는 그것이 거기에 있었다. 서연은 시선을 다시 아래로 내렸다. 이번엔 주로 자신 쪽에 시선을 두고. 딱히 별 의미는 없었다. 정말 별 의미는 없었지만. ‘……여기서 더 커지나?’ 엄마의 핏줄이니 그런가? 지금도 충분한 거 같은데, 엄마 정도면 조금 그…… 너무 커서. 솔직히 연기할 때 불편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죄, 죄송해요, 저는 집안일로 바빠서.” “정말 아쉽습니다.” 강찬율은 정말 아쉽다는 얼굴이었다. 엄마, 수아의 외모는 불가사의할 정도이니까 그럴 만했다. 저게 마흔에 가까운 여성의 외모와 몸매인지. 오죽하면 지나가던 여배우가 화장품을 뭐 쓰냐고 물어보겠는가. 아무튼 엄마에게 연예인은 무리다. 외모를 떠나 성격적으로 타인과 잘 얽히지 못하는 타입이니까. 나와 달리. “그래, 학교에서 친구는 많이 사귀었니? 아, 물론 지연이는 빼고.” “…….” “음? 왜 학교생활에 뭔가 문제가 있어?” 갑자기 날아온 날카로운 비수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마치 내 생각을 읽은 것 같은 말이었다. “양손으로 다 셀 수 없을 정도예요.” “과연.” 이지연을 뺀다면 한 줌의 거짓 없는 사실이었다. 내 학교 생활도 문제없다 생각했는지 강찬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주 빠지게 되지만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게 중요해. 알지?” “네.” “나중에 친구들이 오고 싶다고 하면 미리 말해주고. 학생들이니 연예인도 보고 싶을 거 아니야?” “그, 그렇죠. 다, 다음에 데려올게요. 꼭.” 어쩌지. 나는 마른 웃음을 지으며 고민했다. 그나마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게 다행인가. “그럼. 계약은 끝이고 이쪽이 앞으로 서연 씨를 담당하게 될 박은하 매니저란다.” 대충 이야기를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곁에 있던 여성을 소개해주었다. 나이는 대략 스물 후반 정도로 보이는 선량한 인상의 여성이었는데, 상당히 굳어있는 게 보였다. “본래 황민화 배우님을 담당했던 터라, 업계에도 잘 아니 궁금한 부분이 있으면 물어보고.” “네.” 나는 그렇게 답하며 박은하의 얼굴을 살폈다. 황민화 배우의 담당 매니저였다면 나를 굉장히 신경 써준 게 분명했다. 거기다 동시에 의아한 부분이 있었다. ‘벌써 나갈 준비를 하는 건가?’ 일반적으로 담당 매니저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잘 바뀌지 않는다. 아무래도 평소 일과를 같이하다 보니 한번 호흡을 맞추면 여러모로 바꿨을 때 리스크가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나름 대배우급인 황민화 배우의 담당 매니저라기엔 지나치게 긴장한 기색이었다. ‘……나중에 차차 알아봐야겠네.’ 어쩌면 황민화 배우의 이적에 여러 가지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노바 엔터의 입장에서도 천만배우인 황민화를 놓아준 것도 이례적인 케이스다. 그야, 간판 연예인을 다른 기획사에 넘겨주는 경우는 보통 없으니까. ‘흠.’ 나는 이 이적에 무언가가 있음을 느꼈다. 물론 내가 알 수 있는 건 딱히 없었기에 우선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만약 문제가 있다면, 어차피 곧 수면 위로 드러날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틀 후. “자, 모두 다들 오셨죠?” 배진환 감독이 모인 배우들을 쭉 훑어보며 웃었다. 아주 만족스런 얼굴. 특히, 나를 보는 눈은 강한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자, 그럼 시작해봅시다.” 영화 . 총 관객수 250만으로 마무리 지어졌던 비운의 영화. 그것의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