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뒤늦은 일이지만, 서연은 의 주연을 맡게 된 것에 부담을 느꼈다. 물론 싫다는 건 아니다. 단지, 사전에 캐스팅되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를 이전의 미팅에서 깨닫게 되었으니까. '생각해 보면 나는 대부분 오디션이었지.' 심지어 최근 찍고 있는 조차도 어디까지나 '오디션'이었다. 예능적인 성격이 강하기도 했고, 거기에 '연기력'이 끼어들 여지가 많다고 해도 분명 오디션. 매편 출연자들에겐 점수가 채점되며 탈락자가 나온다. 단지, 서연이 이번 오디션에 굉장히 유리할 뿐이지. 아마 GH 그룹도 그걸 예상하고, 일부러 이런 오디션을 준비 중인 게 분명했다. 평균 시청률은 6퍼센트 정도. 종편 예능인 것을 생각하면 아주 준수한 성적을 기록 중이다. 거기다 쇼츠로 엄청나게 돌아다니는 통에, 그 시청률 이상의 인지도를 얻기도 했고. 이대로 영화가 개봉한다면, 분명 큰 홍보 효과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건 형식상이라도 오디션을 한 거니까.' 서연의 능력을 믿었다고 해도, 백 퍼센트 확실한 건 아니다. 결국 오디션에선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는 일. 하지만 의 경우엔 순수하게 사전에 캐스팅된 경우였다. 오디션도 없이. 그러니 다른 배우들이 불만을 가지는 것도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다. 배우에겐 인지도 또한 중요한 능력이라 할 수 있으나, 젊은 배우들에겐 불합리함으로 다가갈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잘해야 한다. 사전에 캐스팅되었는데, 기대만큼 보여주지 못한다면 분명 말이 나온다. '그나마, 선배님들은 좋게 봐주시고 있지만.' 그 자리에 있던 중장년 배우들. 말하자면 '부모' 역을 맡게 될, 사실상 작중의 또 다른 주인공들. 그들은 서연을 좋게 보는 편이었다. 만날 때면 나 를 굉장히 인상 깊게 보았다고 말해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촬영장에서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면 결국 무너질 호감도였다. "으으음." 서연은 팔짱을 끼고 한숨을 쉬었다. 현재 그녀는, 노바 엔터에 마련된 연습실에서 혼자 대본을 보고 연기를 펼치고 있었다. 지연에게 도와 달라고 할까 했으나, 지연은 지연대로 오디션으로 바빴다. 거기에 라미엘 방송도 꾸준히 하는 편이고. '드라마 하늘정원의 주인공, 이유주는 상당히 염세적인 인물.' 그녀에겐 오빠가 남긴 완벽에 가까운 커리큘럼이 있었다. 집안은 평범한 중산층. 하지만 그녀의 오빠는 수능 만점에 서울 최고의 대학교라는 가상 대학교, 백연 대학의 수석. 그것이 가능했던 건, 그녀의 아버지가 한때 잘나갔던 입시 코디네이터였기 때문. 하지만, 연달아 맡은 학생들이 수능에 실패하며 그 입지를 잃어버린 상황이었다. 그러니, 아들의 수석 입학은 그의 자랑이었으며. 이번에 이유주 또한 아들과 같은 절차를 밟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 탓에, 이유주는 스스로가 한 명의 입시 코디네이터라 할 만큼 자기 관리의 끝판왕. 또한 완벽하게 입시 플랜을 암기한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참고로, 그럼 이유주의 아버지에게 접근하면 될 일이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그녀들이 과거에 그의 아버지를 거절한 전적이 있었기에, 이유주의 아버지가 거절했기 때문. 그러니, 부모들은 이유주와의 친분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입시 코디네이터?' 다만 서연의 입장에선 이런 설정들이 이입하기 어려운 요소였다. 애초에 공부와는 큰 연이 없기도 했고. 서연의 부모님들은 그녀가 공부를 학생답게 성실히 하는 정도로 만족하는 인물들. 여태 사교육도 한 번 해본 적 없는 서연이었다. 뭐, 그건 서연이 배우로서의 길이 있었기에 그런 것도 있었겠지만……. '아니었어도, 딱히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아, 진짜 있네?' 서연은 스마트폰으로 입시 코디네이터라는 항목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진짜 이 대본처럼 학생의 사생활을 철두철미하게 관리해 주는 사람인 걸까. 학생의 스트레스는 물론, 학생으로서 이점. 그리고 생활기록부에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전부 관리해 준다. '부자들은 이런 걸까?' 민세희 작가에게 슬쩍 물어보면. "물론 조금 과장된 부분이 있어요." "조금, 이요?" "소, 솔직히 진짜 부자들은 돈으로 어떻게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음, 확실히 그야 그럴 수 있지만. "하지만 명예를 사는 이들도 분명히 있으니까요. 이 드라마는 그곳에 보다 초점을 맞췄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과장되긴 했지만, 아예 없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그녀는 나름대로 조사하여 각본을 완성했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서연은 이 의 대본에 이입이 어려웠다. 실제로 그런가? 마치, 상상 속의 이야기를 찍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사극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느낌은 상상으로 떠올려야 한다는 부분에서. 하지만, 그와 다른 점은 사극은 그래도 역사와 어느 정도 다른 사극을 통해 이입할 수 있었으나. '사교육, 그리고 상류층의 삶.' 심지어 그녀는 중산층인 '이유주'. 염세적이며, 오직 공부밖에 모르는 인물. '왜 우등생이냐고 물었는지 알겠어.' 참조할 만한 사람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서연의 학급 반장인 길다현. '거기에 좀 더 치열한 감정이 필요하겠지만.' 이유주로서 나타낼 감정은 여태 서연이 나타낸 감정 중에서도, 유독 어려운 편이었다. 염세적인 성향. 타인의 시선이나 칭찬을 좋아하는 서연과 달리, 이유주는 그런 관심과 칭찬을 싫어한다. 결국 전부 자신과 친해지려는 부류. 그리고 바라지도 않는 기대를 품는 이들에 대한 혐오. 그래, 혐오. 그 염세적인 성향의 근본이 되는 감정. 서연은 타인을 진심으로 싫어해 본 적이 없었다. 차나희를 괴롭혔던, '여름 소녀'에게도 화가 났을 뿐 혐오하지는 않았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 좀 더 안다면…….' 다만 그다지 알고 싶지 않은 감정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영 꺼림직한 감정이 아닌가? 하지만 그와 별개로. 에서 묘사된 상류층들에 대한 것이 궁금했다. 정말 그런 식인 걸까? 아니면 조금 과장된 걸까. 그런 궁금증. 그걸 알면 연기에도 좀 더 참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거기까지 생각한 서연은, 마침 그걸 알 수 있는 사람에게 연락했다. 최근, 자신에게 약점이 잡힌 사람에게. "상류층이 어떠냐고?" 조서희는 서연의 부름에 헐레벌떡 달려왔다. 평소에 타고 다니던 리무진도 보이지 않았다. 자전거. 얼마나 열심히 자전거를 타고 왔는지, 땀 범벅이었다. "……." 전혀 상류층 같지 않은 모습에, 서연은 빤히 조서희를 보았다. 그 시선은 '뭔가, 깬다.' 대략 그런 느낌이 담겨 있었고. 그런 시선에 조서희는 흥, 하고 팔짱을 꼈다. "이거 삼천만 원이야." "?" "이 자전거." 서연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아니, 무슨 자전거가 그렇게 비싸? '동네 삼천리 자전거랑 뭐가 다르지?' 생긴 것만 봐선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자전거의 가격을 들으니, 안장 위에 앉은 조서희가 갑자기 부유해 보이고 상류층처럼 보였다. "으흠! 그래서 무슨 일이야?" 전화로 어느 정도 전해 듣기는 했지만, 조서희는 서연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아닌 척해도, 조서희는 현재 서연의 눈치를 상당히 보고 있었다. 괜히 흘깃흘깃. 기분이 좋은지 안 좋은지 얼굴을 열심히 살폈다. '도무지 얼굴만 봐서는 기분을 알 수가 없네.' 서연은 대체로 무표정. 어지간한 말에는 반응도 없고. 연락해도 대부분 이모티콘으로 답이 돌아오는 게 전부다. 특히 5화가 끝난 이후, 더 심해졌다. '배, 배신한 건 후회하지 않지만.' 뭔가 전에도 했던 생각 같지만 진심이었다. 2연 배신이 충격적이었는지, 어째 조서희 본인의 이미지에 배신자라는 이미지가 생기는 것 같기는 했으나. '예능에서의 이미지니까.' 그 부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서연은 다르다. 이지연이 말하길. "얘 지금 단단히 삐진 거야." "그, 그,래?" "이모티콘을 보면 알잖아." 그런가? 근데 계속 보다 보면 알 것 같았다. 대체로 시큰둥한 이모티콘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단단히 삐진 건 분명. 그 탓에 이지연과 함께 이것저것 준비하는 게 있었지만. "뭔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서연의 부름에 냉큼 달려온 것도 그런 이유였다. 떨어진 호감도를 복구하기 위해서! "상류층." "응?" "이번에 찍을 드라마에 관한 건데요." 서연은 그제야 자세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이번에 찍을 드라마가 상류층의 삶을 일부 다루는 모양. '……재밌잖아?' 단순히 이야기만 들으면 굉장히 재밌을 것 같았다. 이게 본래 종편 예능으로 갈 뻔했다고? '그러고 보면 정우 선배가 그랬지.' 민세희 작가가 소심해서 그렇지, 굉장히 재능 있는 작가라고. 과연 대배우의 아들인 것일까. 사람 보는 눈은 아주 확실했다. "……흐응." 조서희는 서연의 부탁에 고민했다. 솔직히 보여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보여줄지가 고민. 솔직히 말해, 조서희는 그쪽과 그다지 얽히지 않는 편이었다. 애초에 그들은 얼굴을 팔리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다 보니, 배우 일을 하는 조서희를 애초에 신기하다는 것처럼 보았고. 굳이 말하자면 셀럽처럼 띄워줬지만, 본인이 할 생각은 없는 부류. "좋아." 이내 조서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딱 괜찮은 게 하나 있었으니까. *** 그리하여 서연은 상류층이 주최한 파티에 가게 된 것이었다. 말하자면 생일 파티. 조서희가 말하기론, 어떤 기업 따님의 생일 파티라고 한다. 그때 조서희가 초대받았는데, 서연도 같이 가도 괜찮냐고 허락을 받아둔다나. "그래도 거절당하지는 않았네요?" "그걸 왜 거절해." 조서희는 픽 웃었다. 커다란 리무진의 안에서, 턱을 괸 그녀는 자신의 하얀 드레스의 옷자락을 만졌다. "이런 건 말이 생일 파티지, 보통 인맥을 보여주기 위한 전시장이야. 너 같이 최근 뜨는 배우가 온다면 오히려 어떻게든 초대하고 싶어서 안달복달할걸?" 그런가? 서연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자신이 입은 검은 드레스를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고등학생이 입기엔 조금 화려한 드레스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물론 서연은 치마를 입는 것에는 큰 거부감이 없었다. 치마는 스코틀랜드에서 전투용 의상으로도 쓰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발차기 같은 것을 할 때 편한 부분도 분명히 있었으니까. 정확히는, 바지를 입으면 발차기를 할 때 찢어지는 경우가 많아서…… 대충 그런 이유. "근데 드레스 코드가 귀찮네. 보통은 그냥 적당히 지정해 주는데." 툴툴거리는 조서희의 말에 서연은 내심 놀랐다. 정말 그런 게 있었구나, 하고. 이런 드레스를 입은 거야, 그냥 파티니까 했지만 조서희의 말을 들어보면 이런 파티에선 보통 주최자가 드레스코드를 지정해 준다고 한다. 말하자면 가장 파티인 경우도 있고. 간단히 흰옷, 검은 옷, 이런 식으로 색상을 지정해 주는 경우도 있었다. 오늘은 정장과 드레스. "겉멋이 잔뜩 들었어. 나도 걔 알거든. 이제 고등학생인데, 아주 발랑 까졌다니까?" 서희는 손에 든 하얀 부채를 손바닥에 탁탁 두드렸다. '들고 왔구나, 부채.' 저러니 진짜 악역 영애 같았다. 머리도 틀어 올려서 어지간한 이들은 얼굴만으로 제압이 가능한 외모. 아마 그건 서연 본인도 크게 다를 게 없기는 했지만. "가자." 그렇게 서연은 조서희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서울에서도 이름 있는 화려한 호텔이었다. 음식이 특히 맛있기로 유명한 곳. '호텔 하나를 통째로.' 그 홀을 통째로 빌려서 파티한다. 솔직히 서연으로선 잘 상상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 홀의 안으로 들어가면, 확실히 화려한 면면들이 보였다. 당연히 서연은 대부분 모르는 이들이었다. 마치 연예인처럼 화려하게 꾸민 이들. 그중에는, 진짜 연예인도 섞여 있었다. 그들은 갑자기 나타난 조서희와 서연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조서희?" "옆에, 저거 주서연 아니야?" "민영이가 조서희와 아는 사이라는 거 거짓말 아니었어?" 그런 작은 말들이 서연의 귓가에 들려왔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듣지 못했을 말이었지만, 서연의 귀는 그런 것도 민감하게 잡아냈다. 다만, 그들의 행동은 멀리서 보고 싶어 하는 게 아닌, 저마다 손에 스마트폰을 쥐고 다가오려는 모습. 조서희는 이곳에 오기 전 미리 서연에게 말했다. "조심해. 함부로 사진 찍어주지 말고." "네?" "너 보면 다들 사진 찍으려고 할 거야. 인스타나 이런 곳에 올리는 거지. 자신이 이런 사람과 알고 있습니다~ 하고 보여주려고." 뭐, 이건 딱히 상류층의 특징은 아니다. 단지 스스로 자신감이 있는 이들. 내세우고 싶어 하는 자들의 특성이라고 서연에게 말해주었다. "스스로를 걸어 다니는 보석이라고 생각해." 조서희는 그리 말하며, 서연의 드레스의 옷을 정돈해 주었다. "저들 한 명 한 명은 보석 상자를 들고 있는 거야. 그 상자에, 너를 담고 싶어 하는 거지." 방법은 저마다 다르다. 하지만, 결국 보석이 가지는 의미는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함. 그러니 그들은 어떻게든 서연에게 접근하려고 할 것이다. "어머, 무슨 일이세요?" 물론 그런 이들은 대체로, 조서희가 부채를 쫙 펼치며 말하자. 대부분 슬금슬금 돌아갔다. 본인도 부자에, 배우인 조서희는 이곳에서 최상위 포식자. 그걸 서연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다들 조서희에게 다가오고 싶지만, 차마 다가오지 못한다는 걸. "내 곁에 있어." 조서희는 부채로 입을 가린 채, 서연에게 작게 말했다. 서연은 그런 조서희의 말에 고개를 얌전히 끄덕였다. '그나저나.' 아무튼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서연은 크게 긴장한 건 아니었다. 단지 상류층의 파티는 이렇구나. 하는 감상? 그보다. '연예인들도 많아.' 서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의 시선은 어느 한 곳에 모여있는 남자들을 보았다. 저마다 웃고 떠드는 이들. 그중에 한 명, 서연이 아는 자가 있었다. '로우, 였었나.' 저스트 엑스의 리더이자 큰 형. 그리고 일명 약 먹는 아이돌. "이번에 제가 클럽을 하나 열거든요. 많이들 와주세요. 아시죠? 다들." 그런 그의 모습에 서연은 눈을 찡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