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의 OST 작업은 굉장히 순조로웠다. '마법사'의 보컬 트레이닝 실력은 무척 뛰어난 편이어서, 서연도 이미 어느 정도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가수와 비교할 때 어떠냐 하면, 아직 미흡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서연의 생각과 달리. "하지만 감정이 굉장히 깊어요. 이게 발라드에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의외로 음악 작업을 맡은 한표열 프로듀서에게는 호평. 음악이 입혀진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면, 이게 또 굉장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 노래 꽤 할지도?' 슬슬 그런 마음이 들기 시작한 게 최근 서연이다. 그래서 반 아이들이. "오늘 코노 갈 사람?" "나나나!!" 그렇게 활기차게 말하고 있으면, 슬그머니 다가가 기웃기웃 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기왕이면 OST를 작업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에, 노래방에 가고 싶었으니까. 그렇다고 자신이 먼저 제안하자니. 시원스레 함께 가자고 이야기할 학생도 없었을뿐더러, 뭔가 좀 그랬다. '마치 노래 자랑하려고 가자고 한 것 같잖아.' 본인이 직접 이끌고 노래방에 갔을 때보다. 무리에 슬쩍 끼어 갔을 때, 뛰어난 노래 실력을 보이는 게 더 눈에 띄지 않겠는가. 서연은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끼어 코인 노래방에 갔을 때의 상황을. '와, 목소리 뭐야~.' '서연이 노래도 잘했구나.' '연기만 잘하는 게 아니네.' 대충 그런 망상을 하면서 바라보고 있으면. 신나서 떠들던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서서히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그, 역시 학생은 공부를 해야겠지?" "오늘 스터디 카페나 갈까?" 그리곤, 서연의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는 학생들. 당연히 서연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뭘 했다고 자리를 피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서연이 배우로서 가진 이미지와는 별개로, 같은 반 학생으로서 느끼는 이미지도 있는 법. 말하자면. 기본적으로 단정한 흑발. 거기다 묘하게 지적인 표정. 아름다운 외모가 합쳐져, 공부를 잘할 것 같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그러니, 방금 서연의 시선에 학생들이 움찔한 것도 당연했다. 서연의 시선은 마치, 공부는 안 하고 놀러 가냐고 질책하는 것 같았으니까. '으으음.' 서연은 덩그러니 남아, 주섬주섬 자신의 가방을 챙겼다. '코인 노래방 가고 싶은데…….' 이건 이지연도 충족시켜 줄 수 없는 욕망이었다. 지연은 적극적으로 박수를 쳐주는 타입은 아니었기에, 재미는 있어도 서연의 욕망을 완벽히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뭣보다 연예인 친구들이랑 가는 건 좀.' 그쪽은 이미 진짜 가수들의 노래도 많이 들어서 큰 감흥이 없을 게 분명했으니까. '조서희?' 문득 그런 이름이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서연의 입이 퉁명스럽게 비쭉 나왔다. '배신자.' 물론 서연은 조서희의 행동을 좋게 생각했다. 그것도 아주 좋게. 물론 그와 별개로 조금 삐진 것도 맞다. 설마 거기서 배신할 줄은 상상도 못했으니까. 그때 느낀 충격은, 솔직히 지금도 선명히 남아있었다. '흥이다.' 어차피 조서희랑은 다음 주에 있을 의 촬영에서 다시 만나게 될 테니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화한다면 그때 하면 되지. 그리고 이쪽도 지연이랑 같은 이유로 코인 노래방을 가는 건 좀 그랬다. 거기다 실력을 모르는 것도 문제. '나보다 잘하면 어떡해.' 아무튼 조서희는 이것저것 다 잘하는 완벽 초인. 그러니 갑자기 노래를 잘 불러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서연은 오늘 코인 노래방을 가는 건 포기하고 KMB로 향했다. 마침, 오늘은 드라마 관련으로 이야기할 것들이 있다고 했으니까. *** KMB 방송국. 최근 방송 3사 중에는 MDC가 줄곧 독주를 이어가고 있었다. 몇 해 전부터 KMB에서 히트작이라고 할 만한 작품이 딱히 나오지 않았고, 그 탓에 드라마국장이 도중에 교체되는 사건도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드라마국장이 오자마자 가 히트. 요즘 시대에 시청률이 20퍼센트가 넘었다는 건 심히 고무적이었다. 뭣보다 는 의외로 일본 방송국에서 직접 리메이크 제안이 왔을 정도. 아직 해외에 제대로 공개하지 않았음에도 이 정도면, 특히 일본에선 높은 성적을 기대해 볼만했다. "서연 양 스타일이 딱 그쪽이 좋아하는 스타일이긴 해요." "그래요? 일본은 좀 귀여운 상을 좋아하지 않나? 모델 같은 여자 말고." "의외로 서연 양이 키가 그리 크지는 않습니다. 비율이 좋아서 그렇지. " 외견만 보면 신장이 170cm가 넘어 보이는 서연이지만, 그 신장은 대략 165cm 언저리. 여자치곤 절대 작은 편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엄청 크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거기다 헤어 스타일이 딱 그렇잖아요. 일본 친구들이 긴 흑발에 껌벅 죽거든요." "……그래요?" 그런 대화를 나누는 이는 의 감독인 김필석. 그리고 의 감독을 맡게 될 김일수였다. 둘은 대학부터 동기로, 꽤 오랫동안 친분을 쌓아온 사이였다. 오늘 이 자리에 온 것도 김일수를 돕기 위해서 였을 정도. 어쨌든 최근 찍은 청춘 드라마라면 뿐이었고. 거기에 오랜만에 나온 KMB의 히트작이라 이래저래 의견을 참조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나이가 어릴 때 성공하면, 그…… 좀 어려운 구석이 있잖아요?" "아, 그렇죠, 그렇죠. 근데 김일수 감독님은 이미 서연 양을 만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네, 만났죠. 하지만 그것만으로 전부 알 수 있는 건 또 아니니까요." 김일수는 이미 서연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본 서연의 인상은 '깔끔한 우등생'이라는 느낌. 연기는 이미 몇 번이나 보았기에 의심하지 않았고, 오히려 사생활 쪽이 조금 걱정되었다. 인상만 보면 학교에서 별일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또 모르지 않은가. 순진한 얼굴로 사고를 친 연예인들이 좀 많아야지. '거기에 단 한 번도 실패를 해본 적이 없다는 것도.' 자신들에게는 잘해도, 타인에게는 어떨지 모른다. 두 얼굴을 가진 연예인은 굉장히 많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고를 치는 경우도 흔했다. 특히 서연처럼 실패를 모르는 연예인이라면, 사람인 이상 그런 요소가 없다 가도 생길 확률이 높았으니까. "아, 서연 양. 왔어요?" 그때, 회의실로 들어온 서연이 꾸벅 허리를 숙이며 들어오는 게 보였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왔는지 교복. 그 모습이 앞으로 찍을 의 이미지와 썩 잘 어울렸다. '교복은 연화 고등학교 교복을 참조하는 게 좋겠군.' 김일수 감독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리 생각했다. 연화 고등학교는 예체능계 고등학교인 만큼 교복이 매우 예쁜 편이었다. '그러고 보면 최근 에서도 교복을 입고 오지 않았던가?' 오히려 서연이 교복 말고 다른 복장을 한 걸 그다지 본 기억이 없었다. 촬영장 외에선 대체 무슨 옷을 입고 다니는 걸까. "학교 공부도 힘들 텐데, 불러서 미안합니다." 먼저 입을 연 건, 김일수 감독이었다. 오늘 미팅은 딱히 정해져 있던 건 아니었다. 단지, 앞으로 컨셉을 구상하기 전에, 감독과 작가가 모여 배우에게 의견을 전하는 자리였으니까. "아, 민세희 작가님도 오셨네요." 이어 민세희도 회의실로 들어왔다. 그렇게 시작된 의 컨셉에 대한 회의. "이전에 한 번 전달해 드렸던 것처럼 은 어느 정도 사회풍자가 드러나는 드라마입니다." 민세희는 서연을 보며 말했다. 이 컨셉에 대해선 이미 다른 이들에게 말했고, 몇 번이나 의견을 교환했으니까. 사전에 캐스팅된 유일한 배우이자, 주인공인 서연. 그녀에게 의견을 묻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다. 앞으로 쓸 각본에 참조하기 위해서. "우선 배경이 되는 태양 고등학교는 대한민국에서 알아주는 명문 진학고죠." 그리고, 명가라 부를 만한 집안의 자제들이 다니는 부유한 학교다. 은 그런 고등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사교육, 그리고 자식을 초일류 대학에 진학시키려고 하는 부모들." 민세희 작가는 그렇게 말한 후, 서연을 보았다. "그리고, 서연 양이 맡을 역할은 그런 명문의 틈에 낀, 평범한 중산층…… 아니 좀 더 못한 집안의 여학생입니다." 명문에 우연히 흘러 들어온 이레귤러. 당연히 아무런 이유 없이, 태양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은 아니다.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진학고라는 이야기를 듣고, 지원하여 제대로 들어오게 된 우등생. 그것이 서연이 맡은 '연소하'라는 인물이었으니까. "태양 초등학교부터 에스컬레이터식으로 올라온 이들에겐 여러모로 눈에 띄는 인물입니다만, 마이페이스인 연소하는 그런 걸 하등 신경 쓰지 않아요. 대신 학교에서는 친구가 없는 혼자죠." 이건 서연의 이미지에도 꼭 맞는 것이었다. 그러니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에서 혼자인 건 잘할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중요한 건,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우등생'이라는 이미지인데." 민세희는 서연을 보았다. 단정한 자세와 외모. 언제나 교복을 입고 다니는 소녀. 민세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연 양은 공부 잘하죠?" "네?" 아니, 여기서 학교 성적을? "아, 미, 미안해요. 딱히 그런 건 아니고. 이미지가 딱 그런 느낌이라! 괜한 걸 물었네요." 민세희는 흔들리는 서연의 동공을 미처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다른 감독들도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서연 양이 그런 이미지가 있죠." "그래서 어때요, 서연양. 학교에선?" 약간 짓궂게 던지는 농담에 서연은 어색하게 웃었다. "네, 괜찮아요." "역시." "우등생 연기는 걱정할 것 없겠네요." 그런 그들의 반응에 서연의 이마에 한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공부를 잘하는 우등생. 아니, 뭐 우등생이긴 한데 꼭 공부를 잘해야 우등생인 건 아니지 않은가. 요즘은 공부가 전부가 아니라 예체능도 중요했다. 당장 서연이 바로 그 산 증인. 엄마인 수아는 그런 서연을 응원했고. 아버지인 영빈도 비슷했다. 뭔가 느낌이 좀 다르긴 했지만. '우등생 연기…….' 대충 지적인 연기를 보여 달라는 모양. 여태 별생각이 없었지만, 서연은 슬슬 그에 대해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서연의 연기는 기본적으로 배역에 공감하여 나타내는 감정 연기. 그런데 우등생이라. 그저 멀게 만 느껴지는 이미지였다. '…….' 서연은 고민에 빠졌다. 아무래도, 조금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았으니까. *** 서울에 있는 호연의 사옥. 호연이 3군 그 어딘가에 있는 기획사인 것을 생각하면, 지나치게 좋은 건물이었다. 회사의 대표가 돈이 많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딱 그 말이 어울리는 건물. 그나마 히트한 아이돌은 '여름 소녀' 하나. 그마저도 사실상 차나희가 혼자 이끄는 그룹이었다. 그렇다 보니 차나희는 무척 바빴다. 당장 의 OST 작업도 그랬다. 들어가는 삽입곡 중 무려 세 곡을 여름 소녀에서 맡기로 했으니까. '연습을 잘하고 있을까…….' 그룹의 멤버들이 걱정되었다. 연습도 제대로 안 하는 배짱이 같은 멤버들. 차나희가 도우려고 해도,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 통에 OST 연습은 지지부진. 그냥 차나희가 혼자 부르면 그만이겠지만, 하필 또 발랄한 걸 그룹 노래라 그럴 수도 없었다. "보컬 트레이너들도 다 도망쳤다고 들었는데 괜찮아?" "……괜찮지 않아." 차나희는 지인인 인기 아이돌, 예나에게 이야기를 하소연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있을 예능 촬영에 도무지 집중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내가 알려주는 걸 제대로 들을지도 의문이고……." 이번 곡은 또 상당히 어려워서 연습이 필수였다. 그런데 나희가 말하는 건 도통 들으려고 하지 않으니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 "서연이가 도와준다곤 했는데." 어제 갑자기 연락이 온, 최근 친분이 생긴 동생. 서연은 그런 나희의 말을 듣고, 흔쾌히 돕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배우인 그녀가 노래를 가르칠 수 있을 턱이 없으니 사실 무리인 이야기. 그리고 그 망나니들을 순진한 서연이가 제대로 다룰 수 있을 리도 없고. '이걸 어떡한다.' 차나희는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누가 나타나서, 대신 그 망나니들을 조련해 주면 좋겠다고. 그리고. 그 시각. '대체 이게 뭐야.' 라빈은 지금 커다란 화면을 보며 고뇌에 빠졌다. 솔직히 옆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검은 머리칼에 붉은 눈. 사이코패스가 아닌지 의심되는 계집애가 아니었다면 진작 내뺐을 것이다. 다들 의자에 정갈하게 앉아, 화면을 보았다. 그리고 화면에서 나오는 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저건 또 뭐고.' 화면에는 이상한 캐릭터가 비추고 있었다. 서연이 소개하길 에…… 뭐라고 하는 마법사라던가. 만화 캐릭터 같은데, 안에 사람이 있다고 한다. "오늘 특별히 초빙해온 제 보컬 트레이너 분이에요." 묘하게 창백한 그들의 얼굴을 보며 서연은 씩씩하게 말했다. 물론 그 씩씩한 말에 대답할 수 있는 이는 이곳에 없었다. 여름 소녀는 물론이고. 이 당혹스러운 상황을 마주한 '마법사 에르체베트'. 즉, 한다영도. '왜 이렇게 된 거지?' 그런 생각만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