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연은 서연과 꽤 막역한 사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10년 가까이 함께 곁에서 지냈고, 여러모로 함께하는 것이 많았다. 당장 배우 일도 그렇고. 학업적으로나 여러 가지로 서로에게 의존하는 방향이 많았다. ……버튜버도 서연이 아니었다면, 절대 할 일이 없었겠지. 지금은 나름대로 환기 차원에서 즐기는 일 중 하나였다. 타인과의 소통이나, 콘텐츠를 기획하는 것에 대해 지연은 꽤 자신 있는 편이었으니까. 아무튼. ‘얘는 정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네.’ 동성애 영화. 소위 말하는 여성과의 사랑을 다루는 모양이다. ‘백민 감독의 영화.’ 물론 이지연도 알고 있는 감독이었다. 예술성이 강한 감독, 그리고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인정받는 감독이었다. 즉, 해외 진출을 염두 한다면 필히 거쳐 갈 감독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어떻게 저렇게 담담하지?’ 이지연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서연을 보았다. 그런 지연의 시선에 서연은 고개를 살며시 기울일 뿐이었다. 마치 자신이 뭘 잘 못했나 싶어 눈치를 보는 서연 특유의 제스처였다. 저 모습을 보면 정말 순수한 의도로 이야기한 것 같은데……. ‘아니아니, 불순한 의도로 받아들이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만.’ 하지만 그렇지 않은가? 확실히 성인 배우들이라면 쿨하게 받아들이며 냉정히 판단할지도 모르겠지만, 이지연은 아직 고등학생이다. 이런 반응이 정상 아니야? 오히려 저렇게 쿨한 서연이 신기했다. 가끔 생각하지만 일에 관해서는 정말 프로페셔널하다고 해야 하나. 일과 개인적인 감정은 별개라는 느낌. 어떻게 그게 딱 구분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심지어, 너 학교 친구들은 어쩌려고.’ 지연과 같이 출연해서 좋은 반응을 보인다 치자, 하지만 그걸 본 학교 친구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같은 학교에서, 늘 붙어 다니던 여학생이 그런 영화를 찍는다면……. “싫어?” “…….” 재차 묻는 서연의 물음. 마치 꼬리 내린 강아지와 같은, 시무룩한 기색. 보아하니 서연은 이 영화가 지연에게 굉장히 도움이 될거라 생각한 모양. ‘윽.’ 지연은 그런 서연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뭐 어때. 내가 뭐 찬밥 더운밥 거릴 처지인가. 이제 겨우 케이블 드라마에 출연한 게 전부인데. 백민 감독의 영화라면 엑스트라건 뭐건 출연하는 게 맞다. “싫은, 건 아니야.” “그래? 하지만 좀 당황한 것 같아서.” “야, 주서연. 당연히 당황이야 하지!” “왜?” “왜, 왜라니. 아니 이게……,” 그런 둘의 대화를 조서희는 흥미진진한 눈으로 보았다. ‘둘이 굉장히 친한가 봐?’ 보아하니 배우. 조서희는 이지연을 몰랐다. 하지만 방금 둘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슬쩍 검색해 보니. ‘케이블 드라마에 출연 중이구나.’ 흐응, 하고 조서희는 턱을 괴며 둘을 보았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배우 일을 하면, 이래저래 친구가 생기기 어렵다. 우선 함께 놀기도 어렵고, 사회생활에 익숙해지면 또래가 더 어리게 느껴지는 것이다. 소위 유치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좋지 않다는 걸 알지만, 어쩌겠는가 실제로 그런데. ‘같은 배우. 거기에 어렸을 때부터 막역한 사이.’ 조서희는 내심 부러웠다. 역시 서연은 인간관계가 좁은대신 깊게 사귀는 모양. 또래 여배우는 사실상 없는 만큼, 조서희는 더더욱 저 관계에 슬쩍 끼어들 방법이 없을까 고심했다. “서희 선배.” “응?” “근데 오디션은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서연은 오디션은 이미 몇 번이나 보았다. 조서희도 오디션이 준비되어 있다고 했으니, 일반적인 오디션이라 생각하며 물었지만. “넌 안 봐도 괜찮아.” “네?” “이미 와 로 어느 정도 인지도가 올라오기도 했고.” 조서희가 개인적으로 강하게 어필한 것도 있었다. 그러니, 백민 감독도 를 봤다. 그리고, 그 평가를 어제 들을 수 있었다. “서희 양, 정말 주서연 배우와 친분이 있는 거니?” 그런 백민 감독의 말에 조서희는 순간 움찔했다. 설마 자신과 주서연의 친분을 의심하는 건가? “네, 저, 절친이에요. 10년이나 아는 사이인걸요.” “아, 그랬지. 맞네, 에서 함께 오디션을 봤었구나.” “그래요, 그때는 제가 졌지만…… 질만 했죠.” 오만한 꼬마였다고 생각한다. 뭐, 지금도 오만하지만. 그건 서희 나름대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정신방벽이나 마찬가지이니 굳이 개선할 생각은 없었다. “우선 서희 양이 추천한 것처럼 . 그리고, 를 봤어.” “어떠셨나요?” 괜찮죠? 라는 눈으로 묻는 서희의 모습에 백민 감독은 픽 웃었다. 조서희가 또래다운 얼굴을 보이는 경우는 드물었으니까. “는 인상적이었고, 는 아주 마음에 들었지.” “……네?” 보통은 반대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조서희는 굳이 티를 내지 않았다. “그야, 내가 찍으려는 건 로맨스니까.” “네, 그렇죠.” “그런 의미에서 의 연기는 내게 많은 영감을 줬어.” 바로 어제였다. 의 11화. “풋풋했지.” 백민 감독은 어제 본 조하린의 연기를 떠올렸다. 촬영 도중, 여러 일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 드라마작가의 개인적인 일탈로 비중이 잘렸다던가. 우스운 건, 그렇게 비중이 잘렸기에 조하린의 서사가 납득이 갔다는 점이다. 조하린은 박민율과 커플링이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아마, 드라마 속 다른 커플들에 비하면 진도가 지지부진했다. 그야 출연 자체를 얼마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본래 김시환을 짝사랑했던 조하린이기에 박민율과의 로맨스가 뒤로 밀린 게 납득됐다. “자신이 일방적으로 좋아했던 짝사랑과 달리, 박민율이 한 걸음씩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에 당황하는 연기.” 사랑을 모르는 풋풋한 소녀와 같은 모습이다. 그 달콤하고 애처로운 감정에 낯설어하며, 타인과 이루어지는 감정교류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 연기인가? 아니, 솔직히 연기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개인적으로는 에서 보았던 ‘차서아’의 이미지를 완전히 잊게 할 정도였다. 적어도 백민에게는 그랬다. 그러니 관객들도 비슷한 느낌이겠지. 며칠 전, 백민 감독은 GH 그룹과도 미팅을 가졌다. 그때, 문화사업부 이사로 나온 강태진은 이런 말을 했다. “아쉽군요, 백민 감독님. 나름 좋은 자리라 생각했습니다만.” “죄송합니다. 제가 찍고 싶은 영화가 있어서요.” “들었습니다. 여러 곳에서 투자를 받으셨다고.” 뱀과 같은 눈을 한 사내는 그리 말하며 싱긋 웃었다. “혹시 주서연이라는 배우를 아십니까?” “예?”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온 이름이라, 백민은 당황했다. 그야 조서희가 줄곧 이야기하던 배우였으니까. “백민 감독님의 영화에 잘 어울릴 것 같은 어린 배우였습니다.” “제…… 영화와요.” “네, 백민 감독님의 영화는, 굉장히 감성적이니까요.” 감성적이라. 거기에 주서연이 어울린다는 건 그만큼 감성적인 연기를 하는 배우라는 뜻일까. “저희는 ‘차서아’ 쪽이었습니다만.” 그는 그렇게 말하며 백민 감독을 향해 웃었다. “조하린 쪽도 바라는 이가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의 말에 백민 감독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날 꼬드겨서 배우 인지도를 올려볼 생각인가.’ 자신과의 협업이 일그러졌음에도, 어떻게든 써먹을 생각이 만만이다. 주서연이라는 배우를 선점했다는 간접적인 발언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주서연의 인지도가 올라가면, 그것을 선점한 쪽이 가장 큰 이득을 보게 되어있었으니까. 하지만, 관심이 생긴 건 맞았다. 주서연. 제대로 된 비중을 가져간 지, 이제 겨우 4편에 불과했음에도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사랑의 감정을 제대로 모르는 소녀가 점차 그것을 알아가는 연출은, 백민이 딱 바라던 연기였다. 그녀가 찍으려던 에서 보여주고 싶은 것. 그것과 한없이 닮아있었다. 백민 감독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의 감상을 뒤로하고, 자신의 앞에 조용히 앉아 있는 조서희를 보았다. “서희 양과 서연 양이 내 영화에 나와준다면 정말 기쁠 것 같아.” “그건, 정말 감사한 말씀이네요.” 그리 답하며 조서희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전에는 오디션을 봐야 한다고 하지 않았었나? 아무튼 편하긴 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계집애가 하나 더 물어달라고 했었지. “혹시, 한 명 더 추천하고 싶은 배우가 있다면…….” “음, 괜찮아. 오디션의 문이야 얼마든지 열려있으니까.” 오디션을 통과하라는 뜻이다. 어떤 배역이 될지도 모르는 오디션을. 조서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앞에 있는 두 소녀. 주서연, 그리고 이지연. 특히 서연은 조금 당혹스런 눈치였다. 아마 자신도 함께 오디션을 볼 거라 생각한 거겠지. 하지만 예상보다 백민 감독은 서연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러니, 오디션은 너 혼자야.” “삿대질하지 마.” “…….” 무심코 지연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던 조서희는 조심스레 손을 움츠렸다. 너무해. 하지만 그래도 묘하게 조서희 입장에선 또래 친구에게 처음 받아본 지적이 또 썩 마음에 들었다. 약간 벽이 없는 느낌이 아닌가? 서희 주변에는 다들 그녀를 어려워하는 이들밖에 없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으흠, 그러니 오디션은 봐야 할 거야. 백민 감독님께는 내가 말해뒀어.” 그런 조서희의 말에 지연은 잠시 고민했다. 딱히 서연과 달리 오디션을 봐야 한다는 말에는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애초에 천만배우, 거기에 공중파 드라마까지 히트시킨 서연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건 우스운 짓이다. 다시 조금 뒤처졌지만. ‘이건, 해야겠지.’ 서연과 같은 선상에서 설 수 있을 만한 그런 기회다. 그런 의미에서. “고마워.” “응?” “내 말도 해줬다면서.” 그런 지연의 말에 서희는 당황했다. 자신을 싫어하는 눈치였는데 그건 또 아닌가? “으흠! 뭐, 뭐어. 이 정도야 내겐 어렵지도 않은 일이지.” 그리 말하며 힐끗 서연을 보자. 이번엔 서연이 또 마음에 안 든다는 눈으로 조서희를 보고 있었다. ‘아니, 또 왜?’ 억울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조서희의 시선에 서연은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야, 자신은 지연에게 고맙다는 말을 딱히 들어본 적이 없었다. 매번 서연의 일을 수습하는 게 지연이기에 서연이 고맙다고 한 적은 많아도 그 반대는 거의 없었다. ‘……아무튼.’ 서연은 힐끗, 지연을 보았다. 오디션. 지연의 실력은 알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백민 감독의 영화이니 만큼 심사의 기준이 어떨지는 알기 어려웠다. 함께라면 으쌰으쌰 해서 잘해볼 생각이었지만……. ‘괜찮겠지.’ 그래도 서연은 지연을 믿었다. 어찌 됐든 서연도 10년간 지연을 곁에서 지켜봤으니까. *** “대표님.” 박은하 매니저는 요즘 일이 워낙 많은 탓에 상당히 피로한 안색이었다. 그도 그럴 게, 요즘 그녀의 핸드폰으로 워낙 많은 연락이 온 탓이다. 당연히 그 연락들은 서연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제 뜨기 시작하는 라이징스타. 그녀가 가장 값이 싼 지금, 이 시기를 노리려는 자들이 많았다. 혹은, 갑자기 이름값이 오르며 뜬 서연을 ‘거품’이라 여기며 거품이 사라지길 기다리는 이들도 있었다. 지금 반등한 그녀의 몸값이 조금이라도 떨어지길 기다리는 것이다. “광고는 대략 이 정도입니다만, 예능도 요청이 굉장히 많이 들어왔습니다.” “예능? 어디 한번 봅시다.” 노바 엔터테인먼트의 대표, 강찬율은 최근 들어온 요청을 훑어보았다. 서연은 강찬율이 직접 관리하는 몇 안 되는 연예인이었다. 언젠가 서연에게 말했던 것처럼, 강찬율은 서연을 별과 같은 아이라 생각한다. 분명 갈고 닦으면 더 빛날 게 분명한 배우. 그러니, 강찬율이 서연의 일정을 확인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서연도 동의한 부분이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아직 업계가 돌아가는 방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어떤 게 좋을 것 같으세요?” “흠.” 보통 이런 건 배우의 성향을 따져야 했다. 신비주의로 예능에 절대 출연하지 않는 배우들도 있었다. 광고를 가려 받는 이들도 많았다. 아무 광고나 받았다가는 이미지를 망칠 수도 있으니까. ‘이전에 찍었던 예능을 생각하면…….’ . 그리고 . 양쪽 다 서연이 굉장히 즐거워했던 예능이다. 촬영에 따라다니던 이들은 굉장히 힘겨웠던 것 같지만. “조금 활동적인 예능이 좋을 것 같……. 오, 이거 괜찮네요.” 그렇게 중얼거리던 강찬율은, 한 예능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촬영도 바빴으니, 이번에는 서연에게 조금 힐링할 시간을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았으니까. ‘이게 힐링인가?’ 물론 그것을 본 박은하는 그런 의문이 들었다. 굳이 말하자면, 강찬율 본인이 힐링하는 방송이 아닌가 싶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