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연은 순간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잠깐 시뮬레이션을 돌려봤으나. "안녕하세요, 고미은 배우님." "너 눈을 왜 그렇게 떠?" "배우님, 저 마음에 안 들죠?" ……물론 그렇게 되지는 않겠지만, 좋은 미래는 그려지지 않았다. 만약, 해코지하면 가만히 당하고 있어야 하나? 서연이 홧김에 반격하면 고미은은 고인이 되어버릴 게 분명했다. 표지우처럼 소문난 칼잡이도 아니고 고미은은 평범한 배우일 뿐이니까. "안녕하세요, 고미은 배우님." 그래도, 머리에서 시뮬레이션한 그대로 먼저 인사를 건네자. 고미은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마치 얘가 왜 KMB 방송국에 있지? 라는 반응. 하지만 서연이 방송국에 있는 건 딱히 이상한 게 아니었다. 애초에 본인이 드라마를 찍고 있듯, 서연도 다른 드라마의 주연으로 출연하고 있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고미은은 망설이긴 했지만, 평범하게 인사를 받았다. 서연은 안심했다. 다행히 고미은은 상식적인 사람이구나 싶었으니까. 갑자기 나타나서 '낙하산?'하며 비웃지도 않고, 이 얼마나 선량한가. 그렇게 생각했는데. "좋으시겠어요." "네?" "드라마, 잘 되셨잖아요." 그런 말을 갑자기 꺼내왔다. 서연은 멀뚱멀뚱 그녀를 보았다. 지금 이 말을 꺼낸 의도를 짐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정말로 축하하려고 말을 꺼낸 말인가, 아니면 비꼬기 위함인가. '얼굴을 보면, 비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서연은 고미은의 얼굴을 살폈다. 고미은의 인상은 비교적 순한 편이다. 하지만 키가 워낙 장신이고, 아까 눈을 날카롭게 떴던 것을 보면 성격은 꽤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 후자인가? '근데 뭐라 답하지? 암요 잘됐죠.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겸손하게 에이 그 정도는 아니죠, 라기엔 너무 잘 됐고.' 서연은 타인의 말을 곡해해서 듣는 성격은 아니다. 우선 서연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서연은 화술에 대한 책을 읽고 있었다. '타인을 칭찬하는 말 기술.' 대략 이런 책이었던 것 같은데, 비교적 화법이 부족한 자신의 말솜씨를 보완하기 위해 읽은 책이었다. "그랜드 게임도 잘 되셨잖아요. 대단하세요." "……하지만, 하늘 정원만큼은 아니죠." 그런 서연의 대답에 고미은은 웃는 얼굴로 답했다. 어찌 됐든 연기자라, 고미은은 자신의 감정을 감추는 것에 탁월했다. "한치 앞의 전개를 알 수 없는 게 매력이라 생각해요. 개연성을 조금 포기하고 과감하게 전개하는 게 오히려 좋다는 걸 이번에 알게 되었네요." 서연의 말에 의도를 찾기 힘들었던 고미은은 최대한 돌려서 하늘 정원에 대해 평가했다. 말은 부드러웠지만, 요는 '막장 전개를 퍼부어 시청률을 끌어냈다.'라는 정도의 표현이었다. 실제로 의 후반부는 조금 과격한 면이 있기는 했다. 그런 고미은의 말에. "확실히 그랜드 게임도 한 치 앞의 전개를 알기 힘든 느낌이었죠. 참 대단하세요." "네?" 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답했다. 뭐지? 갑자기 로맨스가 튀어나온 것에 꼽을 주는 건가? 그렇게밖에 들리지 않는 말이었다. '과연, 보는 것처럼 보통 기가 센 게 아니구나.' 고미은은 서연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괜히 악역만 하는 게 아니다. 솔직히 고미은도, 이번 일만 아니었다면 이렇게 말을 걸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다 말끝마다 대단하다고 말하는 게 거슬렸다. 그렇다고 배우가 마음에 안 든다고 손찌검할 수도 없는 일. 하지만, 그렇게 하기엔…… 가 떠올랐다. 처음에는 조작이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생방으로 날아다니던 서연이 떠올랐다. 말이 생방이고, 사실 녹방이었을 지도 모를 일이긴 하지만. 고미은이 그렇게 말없이 가만히 있자. 서연은 잠시 그녀를 보다가. "매번 이번처럼만 잘 되시길 바랄게요." "예?" 그런 서연의 말에 고미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분명 덕담 같은데, 덕담 같지 않은 그런 말이었다. 매번 정도만 나와주면 분명 고미은에게 좋은 일이다. 근데, 이게 을 밟고 선 배우가 말하니 뭔가 말하기 힘든 기분이 되었다. 역시 한번 해보자는 건가? 그런 마음으로 서연을 바라보던 순간. "이거 참, KMB 드라마 화제의 주역이 다 이곳에 있었네." 남성의 목소리였다. 서연은 고개를 돌려 그곳을 보았다. 그곳에는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가 서 있었다. 나이는 대략 서연의 아버지인 영빈과 비슷한 수준일까? 그렇게 많은 연배는 아니었다. "주서연 배우님과는 이번에 초면이죠? 반갑습니다, 백태수 PD라고 합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주서연입니다." "듣기는 했지만, 인사성이 참 좋네요." 백태수라는 이름에 서연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 사람이 드라마 2국의 국장이 될 사람.' 전생에도 드라마 1국과 2국의 싸움은 꽤 치열했다. 하지만 드라마 1국은 전생은 결국 2국에 패하고 말았다. KMB 사장이 2국 국장의 뒷배로 있는 탓에, 능력 있는 PD가 다수 2국으로 몰려갔기 때문이다. 1국 국장도 나름 분전했던 것 같지만, 개인의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참고로 이름은 이번 생에 전부 알게 된 것이다. 사실 전생에 이것저것 보기는 했지만, 방송국 국장 이름까지 알지는 못했으니까.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우리랑도 한번 함께 작업합시다." "PD님?" 갑작스런 백태수의 말에 고미은이 당황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설마 적이나 마찬가지인 서연에게 이렇게 말할 줄은 몰랐으니까. 그런 그녀의 반응에 백태수 PD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미은 씨도, 서연 씨 같은 배우랑 하면 좋잖아요. 원래 연기라는 게 합이 맞아야 해. 뛰어난 배우가 함께하면 이게 시너지가 보통이 아니라니까." "그건, 그렇지만." "다들 이번 드라마로 잘 됐으니, 계속 이렇게 잘 지내야죠." 그런 백태수의 말에 고미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연도 그런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다지 느낌이 좋은 사람은 아니야.' 나쁜 사람이라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여러모로 쉽지 않은 인물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요." 그러니 서연은 그렇게 답했다. 비록 같은 KMB의 드라마라고 해도, 이번 드라마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 들었다. 집안싸움. 본디, 집안싸움이 보통 더 치열하고, 치졸한 법이다. 적어도 서연은 이번 싸움에서 한 자루의 칼로 쓰였다. 그러니, 백태수 PD에겐 곱게 보이지 않을 테지. 그런데도 웃으면서 함께 하자고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응당 그래야 한다고 머리로는 생각해도, 감정은 그렇지 않은 법이다. 적어도, 여태 서연이 관찰해 온 사람들은 그러했다. "그래, 그걸로 좋아요." 서연의 답에 백태수 PD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것은 연기가 아닌 진심이 담긴 미소였다. 백태수 PD는 굳이 서연을 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꼭 끌어들여야 하는 인재였다. '고미은처럼.' 고미은도 본래는 MDC의 드라마에 주로 출연하던 배우였다. 그것을, 백태수가 데려온 것이다. '배우는 감독과 PD가 휘두르는 칼이니까.' 그러니, 얼마든지 그 주인이 바뀔 수 있었다. 그는 한낱 칼 한 자루에 분노할 만큼 치졸한 인물이 아니었다. *** "조금 늦었네요?" 미리 들어두었던 회의실로 들어가자, 의 이민화 PD가 서연을 반갑게 맞이했다. "오는 중, 백태수 PD님과 고미은 배우를 만났거든요." "네? 별일 당하진…… 않았을 것 같네요." "?" 이민화는 서연의 소문에 대해선 익히 들었다. 그 소문은 대체로 날아오는 총알을 보고 피한다거나, 심심풀이로 동전을 접는다거나.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것들도 있었지만, 서연이 뛰어난 운동 신경을 가지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애초에 에서 우승할 수도 없었을 테고. 거기다 한창 잘 나가는 배우를 해코지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겠지. "그보다, 이쪽에 인사해 주세요. 일본 YHJ 에서 나온 PD님인 난조 카츠오 PD님이세요." "네?" 회의실에는 상당한 숫자의 사람이 몰려있었다. 그중에는 확실히 복장이 다른 이들이 있었는데, 그중 한 남자가 이민화 PD의 말에 일어나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난조 카츠오라고 합니다." 꽤 유창한 한국어였다. 물론 발음 자체는 상당히 어눌했지만, 크게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말이 좀 어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넘어갈 수준. "한국어를 굉장히 잘하시죠?" "그, 그러시네요." 서연도 일본어는 할 줄 안다. 애니메이션의 영향으로, 주로 일본 여고생처럼 말한다는 게 문제지만. '아니지, 전생에야 문제가 됐겠지만, 지금은 괜찮지 않을까?' 애초에 서연은 지금 여고생이었으니까. "최근 개봉한 나 를 보고 이거다!! 해서 왔습니다. 이야~, 진짜네요. 진짜로 주…… 배우님? 에에, 그러니까 주 배우님은 현재 현역 여고생인 것이죠?" "네, 맞아요." 역시 텐션 자체가 한국과는 좀 달랐다. 조금 진중한 인상임에도, 굉장히 밝은 사람이라는 인상. 서연이 현역 여고생이라는 말에, 일본에서 온 다른 스태프들이 수군거리는 게 보였다. "한국의 천재 여배우. 10년 전에 사라졌던 아역. 이야, 타이틀 좋네요." 그런 그의 반응에 서연은 슬그머니 이민화 PD에게 물었다. "하늘 정원을 보고 온 게 아니었나요?" "애초에 그건 아직 일본에 전달이 되지 않았으니까요. 더 체이서는 저번에 관광을 오셨을 때 보셨고, 드림 퓨처는 현재 방영 중이죠." 본래 오늘은 을 처럼 어떤 식으로 YHJ에 송출할지에 대한 논의라고 한다. 더불어, 서연에게도 관심이 많다나. 실제로 오늘 온 인물 중에선, YHJ 예능 부서에서 일하는 PD도 왔다던가. "사실, 하늘 정원에 대해 논의하기에 앞서, 개인적으로 주서연 배우님께 제안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난조 카츠오 PD는 그리 말하며 서연을 바라보았다. "최근 다시 일본에서 한류 붐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OTT 드라마의 영향, 그리고 아이돌 산업의 확장이 그 이유겠죠. 그래서, 최근 한국에서 화제가 된 주 배우님을 예능에 초대하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그에 가장 큰 이유는 서연이 여고생, 그리고 천재 배우라는 타이틀 때문이었다. 이민화 PD가 후에 말하길, 일본에선 그 두 가지 타이틀이 굉장히 먹힌다고 한다. "심지어, 서연 씨는 흑발이잖아요. 단정한 흑발." "그, 그렇죠?" "그거에 껌벅 죽는 부류가 많아요." 물론, 그건 주로 구시대 시청층의 이야기였지만 기조는 달라지지 않았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아이돌이 머리를 염색했다는 것만으로 욕하는 부류가 꽤 있었다. 지금에야 조금 달라졌다지만, 그런 성향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쁜 제안은 아닌 것 같아요. 인지도를 올려서 나쁠 건 없잖아요?" 일본 여행도 갈 겸, 예능 하나 정도는 괜찮지 않냐는 말. 그런 이민화 PD의 제안에, 서연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나쁜 말은 아니었으니까. *** "난조 PD님." 과 관련된 미팅도 무사히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일본 방송진은 그들의 리더라고 할 수 있는 난조에게 말했다. 그는, YHJ에서 차기 예능 국장으로 예정된 인물. 그만큼 발언도 강했다. 다만 성향은 조금 갈리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는 본래 해외 스타. 특히 한국의 연예인들이 예능에 출연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딱히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좋아했다. 그러니 한국어도 익힌 것이고. 다만 그와 별개로, 한국 연예인들이 일본에 출연하는 걸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이번 그의 제안이 그들에겐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다. "왜 서연이라는 배우에 관심을 가지시는지……, 차라리 아이돌 쪽이 나을 것 같은데요." 그런 그의 말에 난조는 한심하다는 듯 그를 보았다. "좋은 상품이니까요. 심지어 아직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면 선점하는 게 맞죠." "그, 그 정도입니까?" "혹시 보셨습니까? 아, 아직 일본 개봉이 아직이니 못 봤겠네요." 에서 어린 배우에게 그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게 언제였을까. 거기에 서연의 외모는 정말 일본에 확 먹힐만한 모든 걸 갖추고 있었다. 조금 날카로운 인상…… 이지만. 그와 별개로, 여러 가지로 전부. "이번에 작은 연결 다리를 만들어 둬야, 후에 정말 중요한 순간에 손을 내밀 수 있을 테니까요." 분명 주서연이라는 배우는 여기서 더 커진다. 난조 카츠오는 그런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일본, 여행이요? 제가요??" 집에서 잠자다가 눈을 뜬 여성이 전화를 받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의 준 우승자. 나루미 소라는 뜬금없이 서연의 일본 여행에 초대를 받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