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수 배우의 실력을 확인하기 위한 오디션. 말이 오디션이지, 사실상 단순한 대본 리딩에 불과한 상황이었다. 백민 감독이 다소 밋밋한 반응을 보인다고 해도, 투자자 쪽에서 절대 가만히 두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이상수가 나타난 시점에서 대부분의 스태프는 마음 편히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서연이 온 것도 단순히 합을 맞춰보기 위함. 딱 그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그래. 전부 거짓이었구나.」 나직한 발성. 숨을 토해내며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감정을 마치 토해내는 것 같았다. 「전부, 하나부터 열까지.」 이전에도 서연의 감정 전달력은 훌륭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이상으로 진일보한 느낌이었다. 왜? 모두가 그리 생각했지만, 백민 감독은 어렴풋이 그 이유를 알았다. '최근, 가면 싱어에 참여했다고 했었지.' 백민 감독은 예능을 보지 않는다. 그렇기에, 실제로 방송을 본 건 아니었고 단순히 이야기만 들었다. 그것을 본 이들은 서연의 노래에 흘러나오는 감정에 무심코 몰입하게 되었다고 한다. 배우는,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시청자의 감정을 끌어낸다. 하지만, 노래는 오로지 소리로서 타인의 감정을 끌어낸다. 흔히 호소력이 있는 목소리라는 말이 있다. 서연이 그런 경우였다. 몸을 자주 쓰면, 몸을 사용하는 법에 익숙해지듯. 목소리도 마찬가지다. 노래를 배우고, 라는 경연에서 이기기 위해. 서연은 자신의 무기를 최대한 훈련했다. 다른 이들보다 부족한 실력을 다른 것으로 채워 넣기 위해. 경연에 이기기 위한, 무대 위의 관객에게 공감을 불러올 힘. 그 호소력에. 순간, 이곳에 있는 이들은 단순한 오디션이라는 것도 잊고. 대본 리딩을 보는 가벼운 마음으로 보는 것도 잊고. 무심코 몰입해서 이 '장면'을 몰입하여 보기 시작했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 서연은. 아니, 서연이 맡은 배역. '카스가야마 유이나'가 말했다. 「네가 그 맹랑한 계집애와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걸.」 유이나의 시선이 고토 이사무에게 향했다. 그 눈에는 선명한 증오가 담겨 있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붉은 눈이, 주변의 공기를 오싹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믿었지. 멍청하게, 네가 전부 나를 위해서 그런다고 생각했으니까.」 그것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자신도 아마나비 미치코를 죽이고, 그녀의 재산을 강탈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리고, 겸사겸사…… 그 계집애도 가져가고. 「모두 거짓이었다는 거네.」 자신은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그것이 무엇보다 화가 났고. 또한 고토 이사무에 대한 증오가 가득 차올랐다. 「어렸을 적, 나를 돌봐주며 했던 말도.」 손을 곽 움켜쥐고,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타인을 짓밟아서라도, 반드시 행복해지라고 했던 것도.」 유이나는 자신의 왼손으로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마치 심장을 쥐어뜯듯이. 「그래서 전부 짓밟았지. 카스가야마의 재산을, 전부 내가 차지할 때까지.」 가문의 모두를 발 아래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당대 가주로서. 「그래, 기다렸던 거구나. 내가 전부 차지하는 순간까지.」 최후의 최후. 이 순간 자신을 죽이고 모든 것을 손에 넣기 위해. 마치,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것처럼 감정을 긁어내는 음성이었다. 고토 이사무. 이상수는 그런 서연의 연기를 보며, 느낄 수 있었다. 아, 이게 박선웅 배우가 말했던 그것이구나 하고. 어린 배우다. 솔직히 말해, 자신이 배우로서 살아온 시간은 사십 년이 넘는다. 이상수는 아역부터 시작한 배우였고. 단 한 번도 연기와 떨어진 삶을 살지 않았다. 서연의 나이는 딱 그에 반절. '내가 이 나이에 어떤 연기를 했던가.' 문득 이상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시절에는, 조금 배우의 세계도 가혹한 면이 있어서 차별도 많이 받았다. 아역 시절에는 맞기도 했었고. 지금처럼, 아역을 보호하는 분위기도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정말 열심히 했다. 하지만, 서연의 연기를 보고 있자면 그때 당시의 자신이 참 보잘것없이 느껴졌다. 그에 대해 질투하느냐. 아니, 그런 건 아니다. 단지, 서연을 보며 느꼈을 뿐이다. 자신이 본래, 어떤 연기를 하고 싶었는지. "처음에는 저도 착각했었지요." 이상수 배우는 이번 의 오디션을 보기 직전. 어렸을 적 서연과 함께 드라마에 출연했던 배우를 찾아갔다. 어렸을 적부터 몇 번이고 자주 연기를 해온 사이. 그 인연은 정말 길어서, 어쩌면 그의 연기 인생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 "분명, 학대를 받았을 거라 짐작했었습니다." 정은선 배우. 그는 조금 민망한 얼굴로 그리 말했다. "아이가 보여줄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진심으로 한 연기도 아니었지요." 진심으로 연기를 하지 않았는데, 감정을 나타낸다? 이상수로선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동시에 정은선의 말도 이해가 되었다. 진심으로 한 연기가 아니다. 그런데 그 정도의 감정을 내보이는 연기를 했다면, 그건 여러모로 의문을 품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저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말 그대로 그 연기는 엄청나게 학습된 감정이었으니까요. 아이가 혼자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저는 그렇게 단정 지었던 겁니다. 노인의 멍청한 고집이었던 거죠." 당시 정은선은 그 부모를 추궁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때, 촬영장에는 서연의 어머니인 수아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막상 만나니 전혀 모르는 눈치였죠. 하지만 저는 본디 고집이 센 여자라, 그 아이가 감정 연기를 그만둬주길 바랐습니다. 분명 정서에 문제가 갈 테니까요." 그런 그녀의 지적에 서연은 정면으로 부딪쳐왔다. 어느 때보다 완벽히, 배역에 몰입하여 단순히 모사에 불과했던 감정이. 진짜가 되어 자신에게 다가온 것이다. 모사(模寫). 본디 그림을 그릴 때 쓰는 용어다. 무언가를 베끼어 그릴 때 쓰는 단어. 서연의 감정 연기는 그런 것이었다. 아주 섬세하게, 많은 물감을 사용하여. 완벽에 가깝게 자신이 본 감정을 그려낸, 모작에 불과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정은선이 보았던 건, 모작이 아닌 진짜였다. 진짜 주서연의 연기를 봄으로써,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스운 말이지만." 정은선은 그리 말하며, 조금 부끄러운 듯 웃었다. "많이 배웠습니다. 아마, 그때 그 아이와 함께 촬영하지 않았다면 저는 이미 배우 일을 접었을 테지요. 고집만 남은 시대에 뒤처진 배우에 불과했으니까요." 이상수는 그런 정은선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그녀는 지난 10년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활동한 배우였으니까. 당장 그녀를 은사로 모시는 조서희와도 몇 번이나 함께 드라마에 나왔을 정도였고. "선배님이, 많이 고민하시는 것도 알지요. 그럼, 분명 알게 되실 겁니다." 열정은 불씨와 같다. 분명 쉽게 식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무언가를 계기로 순식간에 타오를 수도 있다. 정은선도 그러했다. "그 아이, 뭔가 다른 배우를 자극하는 게 있으니까요." 그러니, 분명 이상수도 그러할 것이다.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이상수는 분명 그런 미련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지껄여봐, 이사무.」 눈앞의 유이나가 말한다. 「더 지껄여봐, 이사무. 그래, 나를 죽이겠다고?」 한 발, 또 한 발. 자신을 향해 다가오며. 「나는 절대 안 죽어.」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짓고, 짙은 증오가 담긴 눈으로 자신을 보며. 「당신이 가르친 대로, 전부 짓밟고. 죽이고. 그건 당신이 아닌, 내가 할 일이야.」 이사무가 손에 쥔 열쇠. 그것은 부모님의 유품이었다. 이 카스가야마의 가주를 상징하는 물건이 들어 있는 금고를 열 수 있는 열쇠. 분명 그 계집애가 훔쳐서 전달한 거겠지. 나쁜 년. 그리 욕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를 이용하고 죽이려 한 건, 이쪽이 먼저였으니까. 그리고, 어쩐지 증오심이 생기지 않았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우습군.」 그런 유이나를 향해, 고토 이사무가 입을 연 건 그때였다. 「참으로 우스운 말이야, 유이나. 지금 네가 한 말이, 예전에 내가 한 말과 같으니.」 여유롭던 이사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증오를 내비치며 덤벼들려는, 유이나의 발이 순간 멈칫할 정도로. 「내가 그랬다. 절대 죽지 않겠다고 다짐했지. 우스운 계집애야. 결국 네가 하는 건 나의 흉내에 불과하다.」 이사무의 눈이 커진다. 그의 두 눈은 광기에 번들거리는 것 같았다. 그것은 과거에 살고 있는, 어떤 추악한 망령 같았다. 「카스가야마는 본래, 내 것이어야 했다. 네놈의 아비가 모든 걸 빼앗지만 않았어도, 전부 내 것이어야 했어!!」 공간을 가르는 소리에 유이나의 몸이 움찔 떨린다. 그것은 비단, 유이나 뿐이 아니었다. 이곳. 이 촬영장. 그를 바라보는 모두가 그랬다.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렇게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방금까지 보던 건, 늘 보던 이상수의 연기였다. 안정적이고, 늘 먹던. 이상수 배우에게 원하던 연기. 하지만, 지금은 무언가 달랐다. 그를 붙잡고 있던 끈이 뚝 끊어져 버린 것처럼, 고삐를 잃어버린 말처럼 확 튀어나왔다. 「나는 죽어야 했을 놈이고. 없어져야 할 인간이었다. 내 이름을 잃고. 얼굴도 잃고. 이런 추한 몰골이 된 채, 어떻게든 살아남았다.」 고성에 가까웠던 목소리가 줄어들며, 평탄한 중얼거림이 되었다. 하지만 그 말은 똑똑히 귀에 박혀 들었다. 방금 서연의 감정 전달에, 공감했던 이들의 시선이 이상수에게 향했다. 그에겐 천재의 번뜩임은 없었다. 하지만, 연륜이 있었다. 배우로서 살아온 세월이 있었다. 비록 헐리우드에서 실패했을지라도. 그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배우였다. 그래, 분명 그의 연기는, 한 때 대한민국을 대표했다. 어느 순간, 그 열정은 식었고. 헐리우드의 실패로 이제 열정을 불태울 시기는 지났다고 느꼈다. 「뭐라도 된 것 같으냐, 카스가야마 유이나.」 하지만, 그렇지 않은가. 이렇게나 불길은 쉽게 타오르는 법이다. 「너는 단순히 나를 닮은 꼭두각시다. 모방한 가짜일 뿐이야.」 유이나를 바라보는 고토 이사무가 손에 쥐고 있던 열쇠를 품에 넣은 채. 다른 무언가를 손에 쥐었다. 「그럼, 이제.」 칼이었다. 「할 일이 끝난 인형의 실을 끊을 때로구나.」 이사무는 웃었다. 입가를 비틀며, 눈을 크게 뜨고.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던 순간. "컷." 백민 감독이 손을 들었다. 시작은 단순한 시작이었지만, 끝날 때는 '컷'이었다. 이 장면 자체가, 하나의 극으로서 끝을 맺었다는 백민 감독의 사인이었다. 그런 그의 말에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아니, 토를 달 정신도 없었다. 일련의 극. 하나의 씬에, 모두가 뭐라 표현해야 할지 말을 찾지 못했으니까. "이상수 배우님." 고요한 적막 속에서, 백민 감독이 빙그레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대단하십니다." 단 여섯 글자에 불과한 말. 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 극찬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런 그의 말에 이상수는 쓰게 웃으며. "……어린 후배에게 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이도 잊을 만큼, 말이지요." 이상수는 서연을 보았다. 서연은 그런 그를 놀란 눈으로 보고 있었다. "백민 감독님." 이상수는 그런 그녀를 보며 말했다. "이 늙은 배우의 부탁입니다만, 이번에 제가 꼭 주서연 배우님과 연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백민 감독은 이상수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아마 거부했을 것이다. 후에, 투자자 쪽에서 밀어붙이면 결과가 달라지겠지만, 결국 감독의 마음에 들지 않은 배우는 썩 좋은 취급을 받기 어려울 것이다. 아니, 애초에 이상수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서연의 연기를 본 순간 마음이 달라졌다. 꼭 함께하고 싶다. 이전에 정은선이 조서희와 꼭 연기를 같이하고 싶다고 말했었는데, 이상수는 솔직히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그 마음에 백분 공감했다. 그런 이상수의 태도에, 주변의 스태프들은 놀란 눈으로 서연을 보았다. '이상수 배우님이 저렇게까지…….' '확실히 서연 씨 연기도 엄청났지.' 마지막에 이상수의 연기가 끝을 장식했지만, 처음 그들을 몰입하게 만든 건 서연의 연기였다. 하지만, 그 이상수가. 국가대표 배우라고 불리웠던 이상수가 본인의 자존심도 꺾고 저렇게 말할 정도다. 그 말에, 경악하지 않은 이는 이곳에 없었다. "이상수 배우님도 너무하시군요." 그런 그의 말에 백민 감독은 웃는 얼굴로 그리 말했다. 묘한 뉘앙스의 말에 모두가 긴장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백민 감독의 성격이라면 저렇게 말하며, 웃는 얼굴로 거절을 표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런 연기를 보고……, 제가 배우님 같은 분을 고사한다면. 감독직에서 내려와야 할지도 모릅니다." 탁, 하고 백민 감독은 연기를 보며 적던 수첩을 접었다. 더 볼 필요도 없었으니까. 분명, 이상수의 연기는 백민 감독이 연출하고자 한, 고토 이사무와는 달랐다. 백민 감독이 생각한 고토 이사무는 보다 치졸하고 비열한 인물이었다. 지금도 이렇게, 정면에서 도발하는 것이 아닌. 보다 유이나를 살살 긁어내는 쪽이었다. 하지만, 뭐 어떤가. 이게 더 좋게 느껴졌으면 된 게 아닐까. "그리고 서연 씨." "네?" 동그래진 눈으로 자신을 보는 서연에게 백민 감독은 푸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도 그녀 나름, 이상수의 연기에 놀란 것 같았다. "본 촬영 때도 그렇게 부탁드립니다. 너무 좋았습니다." "네? 아, 네!" 꾸벅 허리를 숙이며 답하는 서연. 하지만 서연은 몰랐다. 백민 감독은 지독히 칭찬에 인색한 감독이라는 걸. "그리고 이상수 배우님에 관한 건, 되도록 숨기도록 하죠. 적어도 예고편까지는 말이죠." "아, 그거 좋을 것 같네요. 꼭 비밀 병기 같은 느낌이고요." "비밀 병기?" 한 스태프의 말에 백민 감독은 곰곰히 생각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좋네요, 비밀 병기." 대한민국을 대표했던 대배우 이상수. 분명, 그는 이번 의 비밀 병기가 될 것이다. 백민 감독은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