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수는 배우다. 원로 배우. 한때, 헐리우드에서 큰 실패를 경험했다. 하지만 그가 한 때 대한민국을 이끈 대배우이며, 손에 꼽히는 경력을 지닌 원로 배우라는 건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늙었다는 것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선생님 정말 괜찮으세요?" 현재 이상수가 속한 소속사에선, 그렇게 말했다. "오래 쉬셨는데, 갑자기 무리하시는 거 아니세요? 심지어 악역인데." 오랫동안 보아온 매니저도, 그리고 소속사의 배우들도. 하나 같이 좀 더 쉬는 게 어떠냐고. 마음을 추스르는 게 어떠냐고 그렇게 말했다. "젊은 친구 말에 너무 신경 쓸 것 없습니다." 그와 친분이 있는, 함께 를 촬영하는 송광민 배우조차 이상수에게 그리 말했다. 물론 송광민은 이상수가 하고 싶다면, 그걸로 좋다는 뉘앙스이긴 했다. 하지만, 누구도 이상수의 영화 촬영에 대해 믿음을 보내진 않았다. 헐리우드의 실패 때문인지. 혹은 단순한 배려 때문인지. 솔직히 이상수는 구분할 수 없었다. 그것을 구분해서 보기엔 이상수는 늙었고, 고민할 성정도 아니었다. '우스운 일이지.' 그리고, 정작 본인도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다. 한때 힘껏 불타올랐던 연기의 불길도 이제는 사그라져 불씨만이 남았다. 그래서, 더 눈이 갔던 건지도 모른다. "저, 이상수 배우님과 함께 이번 영화에 출연하고 싶어요." 모두가 꺼리던 주제를 거리낌 없이 말하던 어린 여배우가 떠올랐다. 주서연. 모두가 천재 배우라고 찬사를 보내는 소녀. 이제 어른으로 발돋움하는 그녀는 담담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백민 감독 영화의 배역이에요. 악역이고, 아주 강렬한 인상을 지닌 인물이죠. 아무나 맡을 수 없는, 그런 배역이라고 해요." 그 시선에는 마치, 자신이 거절할 거라는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백민 감독의 영화에 한 자리가 비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 이상수 배우가 꼭 나와주길 바란다고 서연은 그리 말했다. 우스운 건, 그런 억지를 부리는 여배우가 그 누구보다 자신을 믿는 눈으로 본다는 것이다. 자신조차 우물쭈물하며 드라마나 영화에 복귀하는 걸 망설이고 있는데. "네. 알고 있어요." "거절하지 않으실 거라는 것도요." 서연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이상수라는 배우를 너무나 잘 아는 것처럼. 그 말은 마치 마법 같아서,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꺼져 가던 불씨에 한 번 숨을 불어넣는 그런 감각. 그래서 자신은 제안했던 것이다. 자신이 출연하겠다고 해도, 백민 감독은 무조건 연기를 보겠다고 할 것이다. 대부분은 단순히 형식상의 일이라고 생각하겠지. 백민 감독의 성격상 철저히 보려고 해도, 상황이 그렇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나 중요한 배역. 하지만 이미 기존의 배우가 하차한 자리에 누가 들어가고 싶을까. 기존의 배우와 비교될 것이 뻔한데. 심지어 백민 감독의 영화라면 흥행은 기대할 수도 없었다. 여태 잘 된 작품도 300만 정도가 한계였으니. 심지어 동성애 요소가 들어간 영화라면 이번에는 무조건 그보다 못하겠지. 그것이 배우들의 인식이었다. 하지만, 이상수는 수락했다. 그건, 백민 감독이 아닌 서연의 말 때문이었다. 그녀가 보낸 자신의 믿음 때문이었다. "한 친구가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 "예?" 촬영장에 도착하여, 밴에 내리기 직전, 이 상수는 자신의 매니저에게 그렇게 말했다. "스타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더군. 불씨를 품은 자와, 별빛을 품은 자." "……그거, 박선웅 배우님이 자주 하는 말 아닙니까?" "아, 자네도 아나? 어지간히 그 어감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구만." 이상수는 큭큭큭 웃었다. 박선웅, 그 양반은 뭔가 시적인 걸 좋아하는 부분이 있어서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었다. 누군가는 오글거리는 소리하지 말라고 해도, 이상수는 공감되기도 했다. 누구나 이상수가 대배우. 별 중의 별이라고 이야기할 때도, 후배인 박선웅은 이렇게 말했으니까. 그것도 헐리우드에 진출할 당시. "선배님은 불길이죠." 무엇보다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길, 가까이서 본다면 별보다도 뜨겁게 빛나는 불길. "하지만, 한 번 사그라지면 다시 타오르기까지 매우 힘들 겁니다." "이봐, 박배우. 악담하고 싶으면 그냥 그렇게 해." "후배로서 걱정되는 마음에 하는 말일 뿐입니다." 헐리우드에 도전하기 직전, 둘은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말대로 되었다. 자신의 불길은 사실상 꺼졌고, 다시 불이 필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또 우스워서, 이상수는 픽 웃으며 매니저에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런 말이 있지 않나." "어떤 말입니까?" "꺼진 불도 다시 보자, 뭐 그런 거." "예?" "아니, 그런 거지. 다 꺼져서 누구도 그 불길이 다시 타오르리라 생각도 하지 않지만." 정말 우연한 계기로, 말도 안 되는 확률로 불씨가 살아나기도 한다. 박선웅이 했던 말처럼. 예를 들어, 별빛을 품은 이를 마주한다면. 자신의 불씨도 다시 타오를지 모른다. 어쩐지, 그런 막연한 느낌이 들었다. *** 오늘 '고토 이사무' 역을 새롭게 맡게 될 배우가 올 예정이라고 들었다. 그 배우의 연기를 확인하고, 괜찮으면 그대로 진행한다고 하던가. 그럼, 지금 빈 여러 자리 중, 가장 중요한 공백은 채워지는 셈. 거기까지가, 오늘 이 촬영장에 온 제작진의 마음이었는데. '왜 주서연 배우가?' '오늘 오디션에서 상대역을 맡는 게 서연 씨인가?' '당연히 서희 씨일 줄 알았는데.' 아니, 애초에 연기를 보는데 꼭 상대역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연기란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거고, 오늘 오디션도 사실상 형식상의 것이었으니까. 이대로 차일피일 촬영을 미룰 바에야, 적당히 배역을 구하는 게 손해가 적게 나는 것이다. "그래서, 고토 이사무 역 배우는 언제 온답니까?" "지금 예정 시간 직전인데 안 오는데요?" "또 그냥 뺀 건 아니겠죠?" 백민 감독에게 물어도 그저 웃을 뿐이었다. 말하면 놀랄 만한 사람, 그렇게 설명했지만 감이 잘 오지 않았다. 대체 누구이기에. 어지간히 이름 있는 배우면 오지 않으려 할 텐데.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촬영장의 문이 열렸다. "……!!"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대본을 살피던 서연이었다. 그녀의 예민한 감각이, 문 뒤에서 잠시 머뭇거리는 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다들 안녕하십니까." 사람 좋은 얼굴로 들어오는 노년의 배우가 있었다. 희끗한 머리칼에 주름이 깃든 얼굴. 하지만 강인한 눈매와, 굳은 입매가 그가 고집이 있는 성격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상수. 수많은 인기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했던 대배우가 촬영장에 나타났다. 그 이름값만 보자면, 기존에 '고토 이사무' 역을 맡을 예정이었던 강서혁보다도 훨씬 높은 배우. 심지어 고지식한 배우라, 백민 감독의 영화 같은 것에는 절대 출연하지 않을 배우였다. 여러 말이 오가던 촬영장이 단번에 조용해졌다. 예상치 못한 사태에, 모두가 굳어버린 것이다. 비록 헐리우드 진출에 실패했다지만, 이상수 배우라는 이름값은 감히 무시할 게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그런 적막을 깬 것은 서연이었다. 그녀는 이상수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서연 씨는 이미 알고 있었나 본데?' '어떻게? 감독님이 미리 말해줬나?' '그럼 우리에게도 살짝 언질이라도 해주지!'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하며 저마다 이상수를 반갑게 맞이했다. 마지막으로, 백민 감독이 그에게 다가오며. "오늘 연기 기대하고 있습니다." "허허, 그거참, 부담스러운 말씀이시군요." "조금 쉬셨다고 해도, 녹슬 실력은 아니시지 않습니까." 빙그레 웃으며 이야기하는 백민 감독의 말에, 이상수는 마주 웃었다. '젊은 감독 중에선 보기 어려운 유형이야.' 웃는 얼굴이었지만, 이상수는 알고 있었다. 백민 감독은 고집이 굉장히 강한 유형이다. '고토 이사무'가 자신이 생각한 색깔이 아니면, 과감하게 거절하겠지. 설령 자신이라고 해도. 모두가 반대한다고 해도. 기존에 강서혁이 '고토 이사무'의 역을 맡았던 건, 그의 연기 색이 백민 감독이 원하는 '고토 이사무'와 가장 흡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은 어떨까. 솔직히, 백민 감독이 바라는 고토 이사무와는 다를 확률이 높다. "서연 씨." 그리고 백민 감독은 서연을 불렀다. 그것은 연기할 준비가 되었냐고 묻는 것 같았다. "대본은 전부 암기해두었어요. 어떤 장면이어도 괜찮아요." "그럼, 씬 147번으로 하겠습니다." S# 147번. 그 장면은 서연이 맡은 배역. 또 다른 '아가씨'. '카스가야마 유이나'와 그의 하인인 '고토 이사무'가 언쟁을 벌이는 화였다. 정확히는 유이나가, 자신이 믿었던 고토 이사무에게 배신당하는 부분. 굉장히 격렬한 감정이 오가는 씬이었지만, 오디션에서 펼치기엔 쉽지 않은 부분이 많았다. 우선 씬을 보자면, 물건을 던지는 장면도 있으며 여러 소품을 활용한 장면이 섞여 있었으니까. 감정적으로 갑자기 이 정도까지 고조시킬 수 있을까? 그런 마음이 드는 장면이었다. "오디션이면, 우선 보다 일상적인 연기로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S# 147번이면 이게 너무 과한 것 같은 느낌이." 다른 이들도 그런 이야기가 튀어나올 정도. 하지만, 백민 감독은 이미 S# 147번으로 마음을 정했는지 변동은 없었다. "이상수 배우님은 괜찮으십니까?" "저야 괜찮지요. 대본이야 진작 받았었고." 그는 굳이 대본을 챙겨오지 않았다. 애초에 전부 외우기도 했으니까.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백민 감독의 말에, 이 자리에 위치한 스태프들이 저마다 자리에 앉았다. 저마다 자리에 서며, 마치 실제로 촬영하는 것 같은, 본격적인 모습이었다. 복장만 제대로 입으면, 이대로 촬영해도 괜찮을 모양새. "시작해 주세요." 액션, 이 아닌 담담한 백민 감독의 말. 그것이 이것이 실제 촬영이 아닌, 오디션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자, 그럼.' 이상수는 눈앞에 선 어린 여배우를 보았다. '카스가야마 유이나'라고 했던가.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아가씨 역. 그에 아주 부합하는 인상이었다. 악역으로서, 전면에 내세우기에 부족함이 없는 모습이다. 물론, 진짜 악역은 그런 유이나를 조종한 고토 이사무. 오늘 촬영할 S# 147이 그에 대한 반전이 드러나는 내용이었다. 주인공인 '언선예'와 얽히게 되며, 차차 유이나의 마음에도 변화가 생긴다. 본래 주인공인 언선예가 하녀의 일을 하게 된 것도. 그녀가 '아마나비 미치코'의 집안의 하녀로 들어갈 마음을 품은 것도 전부 카스가야마 유이나의 명령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유이나만이 아닌 고토 이사무가 그녀에게 개인적으로 말한 것도 있음을 깨닫는다. 미치코를 배신하고, 유이나를 배신하게 고토 이사무가 그렇게 유도한 것이다. 그리하여, 아마나비 집안만이 아닌, 카스가야마의 재산까지 전부 고토 이사무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는 걸 깨닫는다. 어린 시절부터 집사로 일해왔던 그가, 사실 고토 이사무가 아닌 '아마나비 이사무'였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 그래, 지금 고토 이사무는 자신을 다그치러 온, 어린 아가씨에게 모든 진실을 밝히는 것이다. 이미 원하는 건 전부 손에 넣었으니까. 「아가씨.」 이상수는, 아니 고토 이사무는 히죽 웃었다. 그 늙은 얼굴이 비열하게 일그러졌다. 비열하지만, 치졸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오랫동안 한 사람을 제 뜻대로 조종해 온, 악마가 지을 듯한 미소였다. 그 미소에, 촬영장에 있던 이들의 놀란 얼굴이 되었다. 이상수 배우의 연기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 이제 와서 알아봤자, 무엇이 달라집니까?」 고토 이사무는 품을 뒤적거리며 무언가를 꺼냈다. 손아귀에 잡힐 크기의 무언가였다. 형태를 보자면 열쇠로 보였다. 물론 소품이 준비되지 않았기에 그리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이 연기를 보는 모든 이들은, 이상수가 아닌 '고토 이사무'의 행동에 주목했다. 자연스러웠다. 모두가 감탄하며 그의 연기를 지켜보았다. 하지만, 백민 감독은 담담히 무언가를 적으며 그런 그의 연기를 볼 뿐이었다. '헐리우드의 실패가 상흔처럼 남았나.' 이상수는 본래 그 강한 인상으로 '고토 이사무'와 같은 인상 깊은 배역을 맡은 적이 많았다. 하지만, 이상수에게는 언제나 특유의 캐릭터가 있었다. 이상수 배우가 출연하면, 그 배우가 가지는 이미지. 인식. 그 틀이 정해져 있었다. 이번 '고토 이사무'도 결국 그 틀에 머무른다는 느낌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런 장점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헐리우드에서 받은 상처가, 흉터가 되어 그에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전보다 못하다. 그게 백민 감독의 평가였다. '과연 서연 씨라면.' 하지만, 어린 여배우가 상대하기엔 쉽지 않을 압박감일 것이다. 뭣보다 이상수는 서연이 직접 소개해 준 배우가 아닌가. 그러니 서연도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만약 잘되지 않는다면, 이상수에게 밉보일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그런 모두의 시선이 주목하는 가운데. 서연은 조용히, 이상수의 대사가 끝나길 기다렸다. 「그래도 이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어르신을 보고 싶어 하셨는데, 이제 만나실 수 있겠군요.」 큭큭, 웃는 고토 이사무의 말에, 서연은. 그리고 카스가야마 유이나의 표정이 변했다. 무표정하던 얼굴이 변하고, 분노가 깃든 눈매로 변한다. 그 일련의 감정 변화는 놀라울 정도로 극적이어서. 대사를 내뱉으려던 이상수가 순간적으로 입을 멈출 정도였다. 대사를 씹었다. 그런 표현이 나올 정도의 실수. 하지만, 그것이 또 자연스럽게만 느껴졌다. 「이사무. 당장 그 입을 닥치는 게 좋을 거야.」 나직한 유이나의 목소리가. 증오가 깃든 유이나의 목소리가 촬영장을 갈랐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