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정녕 미친 거냐." 만신창이가 된 박정우는 카페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박정우를 납치한 서연은 그대로 정우를 밴에 태우고, 조금 먼 곳에 있는 카페까지 온 상태였다. 이게 또 준비는 철저히 해서, 박정우의 얼굴을 가릴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구비. 물론 카페에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것을 따로 사용할 일은 없었다. '사람이 이렇게 납치당하는 거구나.' 박정우는 가끔 순식간에 밴으로 끌려가 사라지는, 흔히 말하는 납치 영상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쉽게 되는 건가 싶었는데, 당해보고 나니 될 것 같았다. "먼저 연락 안 받은 건 선배세요." 서연은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머리를 포니테일로 높이 묶고, 선글라스를 쓴 서연은 평소와 인상이 달랐다. 좀 더 활달한 인상이라 해야 하나. 아무래도 눈이 안 보이니 특히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연락? 설마 그거?" 애초에 정우와 서연은 그다지 연락하지 않았다. 아, 물론 아예 안 하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제대로 된 연락'을 그다지 않는 것에 가까웠다. 서연이 박정우에게 하는 연락이라 해봐야. 며칠 전. - 10시 칼바람 ㄱ? 삼일 전 - 10시 어제 - 칼바람 ㄱ 그리고 오늘. - ㄱㄱ 처음에는 무슨 암호인가 싶었다. 물론 지금이야 잘 알고 있긴 했다. 저 칼바람 ㄱ? 소리를 너무 많이 봐서 모르려 해도 모를 수가 없었으니까. 애초에 박정우는 그런 부류의 PC 게임은 잘 하지도 않았다. 어쩌다 보니 서연 때문에 하게 되었을 뿐. '저거 분명 나랑 계속하자는 거.' 박정우는 알고 있다. 서연이 자신을 저렇게 부르는 건, 주변에 있는 사람 중 자신보다 게임을 못하는 게 박정우 뿐이기 때문이다. 이지연은 애초에 서연보다 훨씬 잘했고, 조서희의 경우엔 살짝 간을 보았던 것 같지만. 「오호호홋!! 이번에 플래티넘을 찍었답니다. 대단하죠? 엄청나지 않나요~?」 나름 방송에 재미를 붙였는지, 쉬는 날이면 키는 횟수가 늘어난 조서희의 버츄얼 유튜버 방송. 박정우는 조서희가 하도 보라고 해서 보기 시작한 경우였다. 사실 박정우가 보는 건 딱히 중요한 건 아니고, 자신이 제대로 하는지 봐 달라는 것에 가까웠다 '고양이 귀는 왜 붙인 거야.' 버츄얼 유튜버 앨리스. 아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따온 거겠지. 고양이 귀야, 채셔 고양이에서 따온 걸 테고. 고양이 귀에 악영 영애 컨셉……, 웃긴 건 이게 또 어울린다는 건데. 아무튼, 조서희의 방송을 보면, 게임을 시작한 지는 얼마 안 됐는데 실력이 무섭게 늘고 있었다. 박정우도 게임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대충 시청자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는 부분 뭣보다. - 말도 안 돼 조서희에게 그런 슈퍼챗을 쏜 당사자가 바로 지금 박정우의 앞에 있는 주서연이었다. 이지연에게 주서연의 닉네임? 아이디? 를 전달받은 덕에 대충 알고 있는 편. 아무튼 서연은 순식간에 자신을 앞질러 버린 조서희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고로, 게임을 할 때면 대체로 박정우가 불려 나가게 되는 것이다. 본인보다 강한 자는 납득하지 못하는 걸까.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매일 게임을 하자고 하는데, 당연히 무시하지." 그런 말에 서연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그 매서운 시선에 박정우는 움찔하며, 눈앞의 녹차를 마셨다. '거 눈빛 한번 살벌하네.' 왜 악역만 하는지 알 것 같다니까. 생각해 보면, 서연과 함께 다니는 조서희나 이지연도 한 인상을 하는 편이었다. 한 번 셋이 함께 다니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주변의 학생들이 슬슬 피하는 게 눈에 보였다. 보통 배우라는 걸 알아보면 가까이 오지 않나? 분명 아는 눈치인데, 멀찍이 떨어져 핸드폰만 찰칵찰칵. 차마 말을 걸 용기를 지닌 자는 없었다. 물론 저런 서연의 시선은 그냥 뾰로통한 시선일 뿐이다. 이게 정말 얼마 전 쇼츠에 뜬 소녀와 동일 인물인 건지. 마법 소녀 쇼츠의 서연은 박정우도, 순간 눈을 비비며 서연이 맞나 확인했을 정도로 귀여웠다. 그에 대해 놀리고 싶지만, 놀리면 단순히 노려보는 걸로 끝나지 않겠지. 조서희가 매번 당하는 손가락 찌르기를 당할 게 분명했다. 심지어 자신은 남자라 좀 튼튼하다고 생각하는지, 팔꿈치로 치는 경우도 있었는데. 전에 별생각 없이 맞았을 때는 거의 실신할 뻔했다. "게임도 사교 활동이거든요." "협곡은 왜 안 해?" "질렸어요." 질리긴 무슨. 그냥 티어 못 올려서 칼바람이나 하는 거겠지. 박정우는 그 말에 굳이 반박하진 않았다. 오늘 서연의 손에는 포크가 쥐어져 있었으니까. "근데, 정말이거든요?" "뭐가?" "……영화 때문이었어요." 무슨 소리지. 칼바람과 대체 영화가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멀뚱멀뚱 서연을 보자, 서연이 포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설마 휘어지나? 궁금한 마음에 그걸 보고 있으니. "그냥 다짜고짜 연락해서 전에 출연하기로 한 영화 정말 출연하는 거 맞는지, 계속 물어볼 수는 없잖아요." "아, 그거." 분명 서연이 게임을 하자고 부르면 그런 걸 물었던 것 같기는 했다. 다만 게임에 집중하느라 그에 대한 질문에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 뿐. '아니 정말로 사교 활동이었네.' 얘가 그런 섬세함이 있었을 줄이야. 박정우는 감탄한 얼굴로 서연을 보았다. "조방우 감독님 영화 말하는 거지? 들은 바로는 재난 영화라고 들었어." "맞아요." 그런 서연의 대답에 박정우는 조금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야 조방우 감독의 아들, 조민태에게 들은 거지만 서연이 그걸 어찌 아나 싶었으니까. 예전이야 로 인연이 있었지만, 지금 서연은 지금 딱히 조민태와 연락하지 않고 있었다. "였죠." "제목은 아직 안 정해졌다는데." "……라고 제가 생각한 거예요. 그럴싸하지 않나요?" "그럴 싸 하긴 하네." 그런 박정우의 반응에 서연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주로 뭔가를 잘못 했을 때 나오는 서연의 행동이다. 그 점이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재해 영화라.' 박정우는 조방우 감독의 신작에 대해 생각했다. 물론 출연할 거냐, 출연하지 않을 거냐, 그렇게 묻는다면 당연히 출연할 거다. 그야, 서연과 약속했으니까. 계속 게임에서 그에 대해 떠보는 서연의 말에 깊이 생각하지 않은 건, 애초에 출연할 생각이라 별생각이 없었던 것도 있었다. "그거 오디션이 올해 말이거든요. 정말 나오는 거 맞죠?" "나간다니까. 애초에 나한테 대본도 안 왔어." "아마, 갈 거로 생각해요." 묘하게 확신에 찬 말이었다. 하지만, 서연은 그런 박정우의 시선에 말을 줄였다. 방금 같은 실수를 또 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본래 정우 선배는 서울 이스케이프의 출연을 거절했었지.' 물론 지금의 이야기는 아니다. 서연이 기억하는 '전생'. 그곳에서 박정우는, 분명 의 출연을 고사한다. 연달아 실패한 조방우 감독 영화의 주연으로 출연하려는 인물도 없었기에, 인맥의 힘을 빌리고자 한 것이다. 심지어 자신도 아닌, 아들의 인맥을 통해서. 그때 조방우 감독이 얼마나 비참한 기분이었을지는 말할 것도 없다. '물론 투자를 받은 만큼, 후에 배우들이 들어오긴 했지만.' 흔히 '진짜'라고 부를만한 부류는 없었다. 조방우 감독은 그중에서 고르고 골라, 한 명을 주연으로 삼았고. 그게 패착이 되고 말았다. '강대환이었던가, 그 배우.' 전생에 의 주연을 맡았던 인물. 연기력은 꽤 좋다는 평이 있었지만, 에선 영 미묘했다. 그뿐인가? 하필 스캔들까지 터져서, 에 온갖 안 좋은 인식을 씌워줬고. 그 결과는 대폭망. 마지막으로 투자까지 받은 영화였던 만큼, 조방우 감독의 커리어에 마침표를 찍은 영화가 되었다. '그러고 보면, 정우 선배도 전생에는 이런저런 말이 많았는데.' 막 나쁜 이야기는 없었다. 예능에서 나온 배우들이 박정우에게 잘난 척한다고 매번 말하는 게 나왔기 때문. 실제로 가끔 기사나 뉴스에도 '오만한 박정우'에 대해 다루는 기사가 자주 나왔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지금은 그런 게 없었다. 뭔가 차이가 있는 걸까? '나 때문?'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솔직히 이상한 기분이다. 자신이 뭘 했다고 박정우가 바뀐단 말인가. 뭐, 지금이야 칼바람 친구로 충분하긴 하지만. "솔직히 문제는 내가 아니지." 그때 박정우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오늘 서연은 이번 영화에 박정우가 출연하는 게 맞는지 확답을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물론 박정우는 무조건 나갈 생각이었다. 가끔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이는 녀석이지만, 그와 별개로 배우로서 꼭 함께 연기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니까. 어렸을 때 찍었던, 처럼. 에서 과거의 향수를 느낄 수 있나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박정우와 서연이 얽히는 장면은 그다지 없었다. 그러니, 이번 는 박정우에게 좋은 기회였다. 과거와는 다른, 발전된 자신을 서연에게 제대로 보여줄 기회. 하지만. "너, 지금 출연이 예정된 것만 내가 알기로 2개잖아?" 과, . 어느 쪽도 쉽게 볼 수 없는 것들이다. 거기다 서연의 성격상 영화를 촬영하며, 드라마나 예능을 쉴 것 같지도 않았다. 아무리 서연이 튼튼해도 조금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열정적으로 일을 하다가 금방 번아웃이 오는 이들을, 박정우는 수없이 보았으니까. "심지어 악역이 두 개지?" "하나는 주인공인데요." "어? 경성 아가씨 주인공이었어?" "마인이 주인공이에요." "그게?" 박정우는 를 떠올렸다. 기억으론 일본 배우를 두들겨 패던 것만 기억난다. 그리고 슈퍼카처럼 울부짖던 애랑. 아무튼 그때 도끼 들고 설치는 장면만 보자면 누가 봐도 빌런이었는데. "애초에 주인공을 정하는 오디션이었거든요?" 그렇게 말한 서연은 박정우를 새치름하게 바라보며, 포크를 쥔 손으로 접시를 꾹 눌렀다. 자연스레 박정우의 시선은 포크로 향했다. 혹시, 접시를 포크로 꿰뚫나? 내심 흥미진진한 마음으로 그걸 보고 있자, 서연이 포크를 접시에서 뗐다. "선배." "응?" "가끔 저를 굉장히 신기한 동물 보듯이 보거든요?" "……크흠." 박정우는 말을 줄였다. 하지만 서연이 기행을 하면 할수록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궁금해지는 부분도 있었다. 이전에 코코넛도 손가락으로 뚫었는데, 진심으로 하면 어디까지 뚫을 수 있을까……하는 게 최근 박정우가 서연에게 가진 궁금증이었다. 물론 그걸 물으면 정말로 자신의 몸에 구멍이 날까 봐 묻지 못할 뿐. "으흠, 아무튼 악역이 둘인 줄 알았는데, 그래도 이미지가 겹치지는 않겠네." "이미지 소비 때문이죠?" "그렇지. 너무 많이 출연하면…… 그만큼 소비도 빨라지니까." 그래서 한 해에 찍는 작품을 조절하는 배우들도 많다. 물론, 인기 있을 때 전부 찍겠다는 각오로 몇 개나 찍는 배우도 있고. '그건 주연일수록 더욱 빨라지지만.' 서연은 조금 애매모호하긴 했다. 가장 많이 한 게 악역이니까. 물론 악역도 은근 이미지 소비가 심한 면이 있다. 그걸 저렇게 상쇄한 게 솔직히, 박정우는 대단할 따름. 솔직히 차서아 정도면 앞으로의 몇 년간, 서연의 이미지를 결정할 만한 영화였으니까. '그게 마법 소녀로…….' 솔직히 놀라울 따름. 오히려 어린 사람들에겐 서연은 차서아보다 마법 소녀의 그 배우로 이미지가 강하게 잡히고 있었다. 그만큼 쇼츠가 강렬했다는 거겠지. 연예인의 이미지란, 의외로 강렬한 한 장면에서 뒤바뀌기도 한다. 예전에 군부대를 다루는 예능에 출연한 한 여배우가 한 번의 애교로 크게 떴던 경우가 있었다. 한동안 애교의 대명사로 불렸을 정도로, 큰 임펙트를 주었던 장면. 서연의 마법소녀도, 어찌 보면 비슷했다. 만약 공중파에서 그랬다면 지금보다 배는 그 힘이 강했겠지. "아무튼, 나가는 거 맞죠?" "맞다니까." "진작 그렇게 답하지." "게임에 부르지 말고, 그런 건 그냥 평범하게 물어봐라."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쉰 박정우는, 안색을 진지하게 바꾸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말하지만, 문제는 내가 아니야. 너지." 박정우는 진지한 어조로 이야기하며 서연을 바라보았다. 그는 진심이었다. 당장, 서연이 찍는 에 생긴 악재에 대해서도 전부 알고 있었으니까. "주요 배우들이 빠졌다며? 그거, 스케줄 제대로 안 되면 크게 꼬일 수 있어." "괜찮아요." 서연은 그렇게 답하며 잠시 핸드폰을 보았다. 마침 온 연락이, 정우가 말한 것과 관련된 거였으니까. "그건, 오히려 잘 되어가고 있으니까요." "……?"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보는 박정우에게 서연은 싱긋 웃었다. 물론 그 미소에, 박정우가 기겁한 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 "고토 이사무의 배역을 구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음, 중요한 배역이라 아무 배우나 정하면 안 될 텐데." 의 제작진은 여러모로 표정이 어두웠다. 최근 여러 이슈로 출연을 약속했던 배우들이 빠져나간 탓이다. 계약서만 딱 썼다가, 위약금을 물고 파기한 상황이라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이런 경우는 꽤 흔한 일이었으니까. 단지, 그 수가 조금 많을 뿐. "듣기로는 이번에 신호철 감독님이 칼을 갈고 만드는 영화에 출연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 그거요? 설마 거기에 출연하려고?" "모르죠. 하지만 적어도 저희보다 돈은 훨씬 많을 테니까요." 이번 도 어찌어찌 투자자를 구하긴 했다. 백민 감독의 이름값을 이용해 받아낸 투자. 하지만 그리 큰 투자처는 아닌 터라, 사용할 수 있는 금액은 한정적. '어쩐지 위약금을 흔쾌히 내더니만.' '애초에 촬영 전이니 그리 높지도 않았으니.' 심지어 '고토 이사무'는 작중 메인 악역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연기력이 받쳐줘야지 그 맛을 제대로 살릴 수 있었다. 본래 그 역할을 맡았을 강서혁 배우는 그에 딱 적합하다고 생각했기에, 타격이 배는 컸다. "강서혁 배우를 대체할 배우가 있나요?" "솔직히 잘 모르겠네요. 있기야 하지만, 대본을 받아줄지도 모르고." "이게 또 백민 감독님 영화를 기피하는 원로 배우분들이 많으니까요." 백민 감독은 원로 배우들의 입장에선 그 색이 독특하고, 가치관이 맞지 않은 영화가 많았다. 당장 이번 도 동성애를 다루는 영화가 아닌가. "서연 씨." 그때, 백민 감독이 안으로 들어오며 서연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디션장에 나타난 서연의 모습에, 제작진들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왜 주서연 배우가?' '오늘은 고토 이사무 역의 배우를 보는 거 아니었어?' 솔직히 연기를 보고 자시고, 우선 뽑고 봐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주서연이 나타날 줄이야. 의아함이 담긴 시선이 서연에게 향했다. "이제 곧 오신다고 했어요." 서연은 그렇게 말하며, 이곳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웃었다. 드디어, 이번 영화의 비밀 병기가 나타날 때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