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이거 심청석 배우님 아니야?” 서울에 대학로의 한 술집. 동료 배우와 느긋이 술을 한 잔하던 심청석을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이번에 한창 불난 연극 불 끄러 가셨다면서? 어디 보자, ‘눈을 감고’ 맞지?” 고개를 돌리자, 번듯한 인상의 사내가 있었다. ‘아, 이놈.’ 심청석은 고개를 저었다. 서울에서 이름난 대학 영연과에 나와, 배우로 활동중인 녀석. 최근 그럭저럭 이름을 날리고, 드라마를 찍는다느니 마느니 말이 나오는 배우였다. ‘이름이 아마, 강세현이었던가.’ 참고로 심청석과는 연극을 딱 한 번 같이했던 인물. 딱 그 정도의 인연이었다. “대~단하신 심청석 배우님이면, 잘하실 수 있겠지. '눈을 감고'의 재연이잖아? 각본도 썩 좋고…….” “용건이 있다면, 용건만 말하지?” 툭, 하고 내뱉는 심청석의 말에 상대는 눈을 찌푸렸다. “거, 그놈의 시건방진 성격은 어딜 가지 않았네.” “후, 먼저 비꼰 게 누구인지 묻고 싶군.” 피식 웃는 심청석의 말에 강세현의 입가가 씰룩였다. “그렇게 원하시니, 용건만 말해주지.” “그러던가.” “‘눈을 감고’가 공연할 때, 마침 우리 연극 공연 날짜가 딱 겹치거든.” 그게 뭐 어쨌다는 건지 싶어, 심청석이 그를 바라보자. “뭐야, 혹시 몰랐나? ‘언더 스니치’ 못 들어봤어?” “뭐.” 들어봤다. 언더 스니치. 외국에서 인기였던 연극을 리메이크하며, 좌석만 800석이 넘는 대극장에서 공연한다던가. 그쯤되면 확실히 ‘밀어주는 연극’에 속했다. “참여한 배우도 들어봤을걸? 홍태백 배우님이 주연으로 참여하는 걸로 모자라, 성시하 배우님이 주역을 맡으셨어.” 둘 다 연극 배우로서 지명도가 무척 높은 편이다. 특히 성시하는 본래 아이돌 활동하다 넘어온 케이스인데, 최근 연극에 재미를 봤는지 자주 참여하고 있었다. 아마 나중엔 뮤지컬이라도 출연하실 생각이겠지. 어쨌든 둘 다 연극판에선 드물게 관객 동원력이 대단한 배우들이었다. “근데.” “어.” “그걸 왜 나한테 말하나? 기껏 술자리까지 찾아와서.” 그런 심청석의 말에, 강세현은 앉은 그의 어깨 위에 팔을 기대며 말했다. “글쎄. 그냥 위로라도 할 겸. 기껏 너답지 않게 도와주러 나섰는데, 쪽박을 차게 생겼으니까.” 말은 그렇게 하지만 굉장히 기분이 좋아보이는 얼굴이다. 이전 연극부터 강세현은 심청석에게 사사건건 태클을 걸었다. 경력은 더 김에도 불구하고, 연기력을 압도당한 것에 앙심을 품은 것이다. “힘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고.” 툭툭, 어깨를 두드리며 가는 놈의 뒷모습에, 심청석은 헛웃음을 지었다. 도움은 무슨. 연락해봤자 받지도 않을 거면서. “아니, 무슨 저런 사람이 있담.” “청석 씨 너무 괘념치 마요. 연극이 배우빨로 흥한답니까?” 함께 술을 마시던 배우들이 나름 위로해줬지만, 심청석은 솔직히 아무래도 좋았다. ‘관객 동원력이라.’ 심청석의 머리에 한 소녀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학교에서 무슨 촬영이 있다고 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던 심청석은 이내 술잔에 술을 따랐다. “청석 씨, 괜찮아요?” “아, 예. 괜찮습니다. 그야…….” 배우가 가진 관객 동원력. 이번에 그것을 아주 제대로 보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으니까. *** “박정우다!!” “여기 한 번만 봐주세요.” “미쳤어, 얼굴 봐! 내 주먹만 해, 내 주먹!!!” 연화 고등학교에서 비명과도 같은 함성이 울려퍼졌다. 박정우는 그런 학생들의 환호에,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어주었지만. ‘……벌써 피곤하네.’ 귀찮은 걸 싫어하는 박정우지만, 그는 팬서비스가 무척 좋은 배우였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교육이 있었기에, 팬이 없다면 배우도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군중의 환호에는 늘 감사해야 한다.’ 그것이 아버지의 가르침이었고. 박정우는 그것을 충실히 따랐다. 말마따나 이런 팬서비스로 영화관에 한 명이라도 많은 관객이 온다면, 그야말로 남는 장사가 아닌가. “스태프들은요?” “저쪽에서 준비하고 있네. 저기요!” 매니저가 그리 외치자, 벤에서 내린 박정우를 돕기 위해 달려오는 스태프들이 있었다. 학생들이 혹여나 덤벼들지 않도록 학생 주임부터 시작해서 온 선생님들이 나와 줄을 통제하고 있었다. 경호원도 존재했지만, 학생의 숫자에 버거워하는 게 역력했다. 그렇게 박정우가 촬영장에 들어섰을 무렵. “연극부, 분명 연극부 선생님이 계시다고 했는데…… 아! 이쪽입니다!” 정민재 PD는 헐레벌떡 달려오는 연극부의 고문, 송다연 선생님을 보고 활짝 웃었다. “연극부 송다연 선생님이시죠? 이번에 방송에 출연할 학생들은 다 준비가 되셨나요?” “물론이죠. 아, 혹시 이지연이라고 아세요? 최근 케이블 드라마에 출연중인 애인데…….” 이지연. 그 말에 정민재 PD는 살짝 놀랐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 중인 케이블 드라마에서 ‘이민채’역으로 나오는 소녀가 아닌가. 연기력도 썩 괜찮고 얼굴도 예뻐서 기억에 남은 아이다. 나중에 공중파나 영화에서 보게 될 재능을 지닌 아이. “아, 그럼 그 아이가 연화공주를?” “네, 지금 준비 중이에요. 대본은요?” “여기 있습니다. 재연 드라마는 4시간 후에 진행하지만, 촬영은 이제부터 바로 시작할 건데 괜찮으시죠?” “네? 대본도 외우지 않았는데요?” “4시간이면 충분하죠.” 거기다, 정확히 말하면 대본도 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건 ‘드라마 촬영’이 아닌, 어디까지나 예능. 학생들이 머리를 싸매며 연습하는 모습도 하나의 컨텐츠였다. ‘진짜다.’ 그런 송다연 선생님과, 정민재 PD의 대화를 들으며 한 남학생이 스마트폰으로 찍고 있었다. 참고로 그냥 사진을 찍거나 기념으로 영상을 남기려는 게 아니다. - 오 진짜 촬영하네 - 감 없네 카메라 높이 안 듬? - 높이들면 걸리는거 아닌가? 이거 걸리면 뺏김? 소위 인터넷 방송. 남학생 송용호는 취미로 간간이 게임 스트리머로 활동하며 용돈을 버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이야기가 달랐다. 학교에서 예능을 찍는데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 그냥 게임이나 하지. 그런 채팅이 올라오긴 했지만, 그래도 평소보다 시청자 수가 배는 많았다. 그 수는, 무려 200명! 조촐하다면 조촐하지만, 고등학생 스트리머인 그에겐 굉장히 고무적인 수치였다. “찍어도 괜찮다고 했으니 조금 걸려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오늘 촬영에는 박정우 씨가 게스트로 참가하고, 아마 연화공주 역에는 이지연…… 씨가 참여한다고 하네요.” - 이지연? 걔가 누구임 - 가끔은 TV도 보고 좀 그래라……. - 찐특 : 아는 거 나오면 급발진함 - 케이블 드라마에 출연하는 하꼬 배우 있음 얼굴예쁨 - 예쁘면 됐지 그런 채팅이 오가는 가운데. 본격적으로 예능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인터넷으로 실시간으로 상황을 송출하는 건 송용호만이 아니었고. 그 외에 다른 이들도 열심히 상황을 찍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우선 연기지도는 제가 4시간 동안 돕도록 하겠습니다.” 여러 대의 카메라가 주변에 놓인 가운데, 연극부의 부실에서 박정우가 말했다. 남학생들은 입을 떡 벌리고 있었으며, 여학생들은 거의 경련이라도 하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누군가 말했다. 잘생긴 게 최고라고. “그그, 그그 박, 박정우 배우님은 따로 연습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저는 다 외웠으니까요.” “아! 역시!” 여학생이 감탄하며 얼굴을 붉히자, 박정우는 가만히 미소지었다. 물론 연기다. 자신보다 3살이나 어린 여자아이들 아닌가.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호들갑을 받아주고 있었다. ‘연기 수준은 나쁘지 않은 것 같지만.’ 그래봐야 고등학교 연극부다. 진짜 배우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 연화공주 역을 맡기로 한 배우는 어디에 있죠?” “아, 지연이요?” 이번에 연화공주 역을 맡기로 했다는 배우 이지연. 단순한 연극부가 아니라, 케이블 드라마에 출연 중인 제대로 된 배우라는 모양이다. ‘잠깐 영상을 훑어보니 실력은 확실히 괜찮았어.’ 근데 그와 별개로. “왜 여기에 없는 겁니까?” “아, 그, 그게…… 지연이가 자기는 따로 준비한다고 해서요.” 참고로 이 대화는 모두 카메라에 찍히고 있었기에, 송다연은 말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잘못 말했다가 제자가 욕을 먹으면 안 됐으니까. “알겠습니다. 간혹 배우 중엔 자주 있는 편이죠. 감정을 잡을 때는 혼자 시간을 가지는 배우들이요.” “그렇죠? 아, 지연이가 이번에 박정우 배우님이 오셔서 단단히 준비하고 싶은 모양이네요.” “그렇군요.” 역시 싱긋. 웃으며 답했지만, 솔직히 박정우는 그 이지연이라는 애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단순한 드라마 촬영이 아니라 예능. 그런 것도 구별하지 못하나?’ 그리고 따로 준비한다고 해서 뭘 얼마나 준비하겠다는 건지. 오디션도 아니고, 차라리 이곳에서 자신과 연습을 하며 방송 분량을 뽑는 게 이득이었다. 아니면, 이런 연극부 애들과는 같이 연기하고 싶지 않다는 뜻인가? ‘어느 쪽이나 마음에 안 드네.’ 박정우는 쯧, 하고 혀를 차며 다른 학생들의 연기를 지도했다. 주연인 연화공주는 이지연이 가져갔지만, 다른 학생들도 저마다 배역이 있었으니까. “송다연 선생님, 이거 좋지 않은데요. 어서 이지연 학생을 데리고 오는 게 좋겠어요.” 정민재 PD는 송다연을 불러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정우가 학생들의 연기를 가르치는 장면은 확실히 맛이 있었다. 제대로 된 배우가 연기를 가르치니, 학생들끼리 하는 것보다 보는 맛은 확실했지만. “결국 중요한 건 이지연 학생과, 박정우 배우의 호흡을 맞추는 거니까요.” 태양을 숨긴 달, 8화의 재연. 결국 가장 중요한 장면은 윤서일과 이혜월의 재회장면이다. 그런데 한번도 합을 맞추지 않고 시작했다가 잘못된다면……? NG 장면이야 뽑겠지만, 영 그림은 살지 않을 것이다. 박정우가 출연했다면 ‘오!’하고 감탄할 장면은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송다연은 급히 지연이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 이대로 있다간 무슨 일이라도 날 것 같았으니까. “응응, 지연아. 응?” 그리고, 전화 통화를 하던 송다연이 기묘한 반응을 보였다. “왜 그러세요?” “아, 아뇨. 그, 정민재 PD님.” “네?” “지연이가 아주 잠시만 따로 뵐 수있겠냐고 하는데요?” 따로 볼 수 있냐고? 그야 어렵지는 않은 일이지만, 그걸 PD에게 할 말인가 싶었다. 요즘 젊은 배우들은 MG인지 MZ인지 뭔지 한다더니, 이게 그런 건가? “그게…… 혹시나 따로 이동하다가 들키면 안 좋을 것 같다고 해서요.” “허참.” 대체 뭐길래 저렇게 말하는 건지. “알겠습니다. 지금 가죠.” 정민재 PD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별 게 아니라면 단단히 주의 줘야겠다고 마음먹으며. *** 오랜만에 입는 의상이다. 박정우는 몸에 입은 한복을 내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극이라. 사실 박정우가 출연한 사극은 태양을 숨긴 달이 마지막이다. 이후엔 마땅히 끌리는 게 없어 출연하지 않았으니까. ‘성장한 윤서일인가.’ 거울에 비쳐 보면 어린 윤서일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머릿속에 있는 대사를 잠시 읊은 뒤 천천히 밖으로 나오자. “와, 진짜 상상만하던 윤서일 딱 그대로네요.” 나오자마 엄지를 치켜드는 스태프의 모습에 박정우는 피식 웃었다. “10년이나 지났는데 그게 기억이 나세요?” “그럼요. 제 인생 드라마인데.” 인생 드라마라. 어찌보면 박정우에게도 비슷한지 모르겠다. 여러 작품을 했지만, 이렇게까지 마음에 남은 작품은 없으니. “정 PD님은?” “아, 연화공주 역의 아이와 함께 있다고 합니다. 우선 진행하고 있으라고 하시네요.” 아무래도 진행을 막내 PD에게 떠넘기고 사라진 모양이다. 새삼 이 예능이 왜 이 꼴이 됐는지 대충 예상이 갈 지경이었다. “와! 한복도 진짜 잘 어울린다.” 강당에 적당히 종이판을 세워서 만든 간이 세트장. 그곳에 도착한 박정우를 보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번잡한 말소리가 들렸다. 강당에 가득찬 학생들. 스태프들의 목소리. ‘피곤하네.’ 오늘 대체 몇 번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그렇게 촬영이 시작되었다. “나으리, 이쪽에 와보세요!” “오늘도 궁에 가세요?” 학생들의 연기는 나름 구색은 갖추었으나 역시 ‘배우’의 것과는 달랐다. 적당히 봐줄만한 연기. 그래도 여태까지 중에선 가장 나았다. 스태프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슬슬 연화공주가 등장할 때인데…….” “아직도 안 왔어요? 대체 PD님은 뭐하신담.” 그런 말이 들리며, 연극부의 학생들이 우르르 튀어나와 인파를 연출했다. 딱히 연기라고 할 건 없고, ‘시장 거리’를 연출한 것에 가까웠다. 윤서일은 그곳을 가만히 걸으며, 과거를 회상한다. ‘10년 전, 연화공주와 함께 거닐었던 서민들의 시장.’ 작은 먹거리에도 놀라는 연화공주. 작은 주서연. 그 모습이 박정우의 머릿속에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이제 여기서, 분명 연화공주가 있어야 할 텐데.’ 설마 없나? 그럼 NG인 게 분명했다. 재촬영을 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피곤해졌다. 이지연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이 재차 머리에 박히려던 순간. 시장의 인파 속에 섞인 고운 자태가 보였다. 머리부터 쓰는 긴 장옷으로 그 모습을 감췄으나, 누가 보아도 연화공주의 모습. ‘저기 있…….’ 다행이네, 그렇게 마음먹으며 박정우는 ‘연화공주’의 뒤를 쫓았다. 저마다 맡은 역할대로 시끄럽게 떠드는 학생들. 그리고 그 틈에 서있는 연화공주. 장옷을 머리에 썼음에도 무언가 달랐다. 서 있는 자세가, 분위기가. 평범한 학생과 달랐다. 박정우가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점차 그의 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아마. 이건 연기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박정우는, 그리고 윤서일은 반사적으로 발을 움직였다. 인파를 헤치고. 도망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음에도,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작은 어깨를 쥐자 옅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익숙하고. 너무나 맑은 목소리였다. 「서일」 여성의 손이 움직이며, 머리에 쓴 장옷을 천천히 끌어 내렸다. 그 광경이 느리게. 마치 슬로우모션처럼 눈에 들어왔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곱게 묶은 긴 흑발. 하얀 피부. 「조금, 늦었네요.」 어린 시절 보았던, 그 귀여운 외모가 변하며 아름답게 성장한. 연화공주, 이혜월. 「……늦었지만.」 마치 별과 같은 그녀의 모습이, 박정우. 아니 윤서일의 눈동자에 박히듯 새겨졌다. 「저, 돌아왔어요.」 붉은 빛이 도는 눈동자. 입가에 서린 장난기 어린 미소에. 박정우의 머릿속은 하얗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