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종족. 그들은 한때 고대의 신들이 땅을 걷던 시절 특별한 힘을 부여받은 영웅의 후예들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요정의 축복에서 태어난 종족이란 설도 많다. 신과 요정, 용. 거룩하고도 신비한 존재들에게서 비롯된 그들이기에 신비종족은 강하면서도 특별했다. 당장 드워프가 신비한 손재주를 타고난 장인이거나, 바다의 신비종족인 머메이드는 바다 속에서도 살 수 있는 체질이듯. 이렇듯 신비종족이란 이름 그대로 신비하면서도 만나기 어려운 이들임이 맞았으나, 이들을 만나기 어려운 데에는 신비종족이 소수 종족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문명사회를 꺼림칙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도 있지 않을까 추측되었다. 자칫 문명사회로 나왔다가 노예로 팔려갈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신비종족들은 문명사회를 거부하기 일쑤였고, 그나마 [신비]가 친숙한 남부 대륙에 유학하는 형식으로 가끔 나타날 뿐, 다른 대륙에선 그 존재조차 동화 속 존재 취급받으며 실존여부조차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남부 대륙에도 가끔 나타날 뿐이지, 보기 쉽다는 뜻은 아니었다. 설사 신비종족을 만난다고 한들 신비종족을 알아볼 확률도 낮다. 바바리안만 해도 덩치와 완력이 좋을 뿐, 보통 사람과 똑같이 생겼듯이 다른 신비종족 또한 사람들과 비슷하게 생긴 이들이 많으니, 어쩔 수 없다면 어쩔 수 없는 현상이리라. 그러나…. “…지, 진짜다! 지, 진짜 신비종족이 나타났다…!” 데미안 폴렛은 경악했다. 허공을 유영하며, 등에는 박쥐의 날개 같은 것이 있다. 눈은 붉고 머리칼 또한 의지를 가진 듯이 움직인다. 거기다. ‘저토록 매혹적인 분위기라니…!’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몽롱해지는 아찔한 향기가 맴돌아 당장에라도 굴복하고 싶다. 사내라면 저항 못할 ‘마성(魔性)’이 아닐 수 없었고, 누구라도 정신을 못 차리는 게 당연한 수순일 터인데…. “와, 이렇게 팼는데도 안 죽네? 신기하다, 너.” “사, 살려주세요, 아, 아니 그, 그만 때려주세요….” “목을 자르면 죽냐? 아니면 불로 태우면 되나? 그것도 아니면….” “히이이익!” “…겁먹긴, 안 죽여, 인마. 그냥 예시를 들어본 거야.” “…….” “흠, 그래도 태우면 죽긴 하는 거 맞지?” “사, 살려주세요……!” “그렇구나, 불로 태우면 죽는 거구나. 좋은 거 알았네.” “허어엉!!” 서럽게 우는 몽마였으나, 안타깝게도 그에겐 통하지 않았다. 장장 7시간을 팼으면서도 분이 안 풀리는 기색이 역력한 기사는 짜증 어린 기색을 보이며. “뚝 그쳐. 진짜 횃불이랑 기름 가지고 오기 전에.” “…….” ‘진심을 담아’ 협박했고, 몽마는 울음을 뚝 그쳤다. 여전히 몸은 부들부들 떨렸으나. ‘…살고 싶긴 한가 보네.’ 데미안 폴렛은 그 신기하면서도 잔혹한 광경에서 저도 모르게 눈을 돌렸다. 괜히 저기 끼어들었다간. ‘내 명줄만 줄어들지.’ 대체 몽마는 어디서 튀어나왔고, 왜 팼는지 심히 궁금하지만 데미안은 그 모든 궁금증을 가슴 속에 묻었다. 괴물의 밑에서 조교로 생활하기 반년. 눈치를 기르고 싶지 않아도 강제로 기르게 될 수밖에. 조교는 교관의 밭에 난 잡초나 뽑으러 가기 위해 곡괭이를 챙겼다. 파란만장한 어느 일요일 주말 아침의 일이었다. * * * ‘이 녀석 정체가 신비종족이었군.’ 그것도 몽마. 꿈을 조작하며, 남자의 정기를 먹고 산다는 종족. 흔히 서큐버스를 연상케 하는 종족이 아닐 수 없었고, 신비종족 중에서도 흡혈귀나 마녀처럼 배척받기 일쑤인 종족 중 하나였다. ‘라파엘 영감이 이래서 불쌍한 애라고 했었나?’ 왠지 노신부가 다른 사제들에겐 ‘형제’라고 부르는데, 주디아 피에르에겐 ‘아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비공식적이지만, 신전은 아직 신비종족에 대한 거부감이 남아 있으니까. 한데 다른 종족도 아니고 몽마? 이건 받아들이는 게 더 이상한 노릇이며 정체가 발각되는 순간…. ‘농담이 아니라, 이놈이 심문 당하겠지.’ 이단 심문을 당할 대상은 이놈이 되리라. 또한. “…그래서, 너 누구냐?” “…네에?” “내가 아는 빨강이는 네가 아닌 것 같아서 묻는 거다.” “…….” “그럴 줄 알았다.” …심문 당한다 할지라도 억울할 게 없다는 것이 문제일 테지. 특성 초감각. 상태창에 의하면 신비에 가까운 감각을 갖게 해주는 이한의 특성이며, 이러한 초감각은 많은 정보를 실시간으로 이한에게 전해주었다. 전날 공작과 수양녀를 보고 부녀관계임을 알게 됐듯, 이한의 감각은 주디아 피에르의 정보를 접하며 많은 것을 알게 해주었다. “외형이나 말투, 성격도 물론이지만. 사소한 습관이나 떨림, 목소리의 어조와 손을 쓰는 법까지. 거의 대부분 달라. 마치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그, 그걸 다 알 수 있다고요?” “딱 봐도 보이니까.” “…혹시, 평소 저한테 호감이라도 있으셨나요?” “끔찍한 소리 하는군. 더 처맞고 싶나 보지.” “아, 아니요! 저, 절대로 아니에요…!” 비명처럼 부정하는 그녀는 곧. “너, 너무 놀라서 그런 거예요. 서, 설마 ‘피에르’와 ‘저’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도 못했거든요.” “…흠.” “다, 다시금 소개할게요. 저, 저는 ‘주디아’에요. …피에르와 영혼과 몸을 공유한 또다른 ‘인격’이기도 하고요.” “…거 복잡하게도 말하네.” 이중인격이란 간편한 설명을 놔두고. * * * 주디아 피에르. 아니 ‘주디아’란 이름을 가진 ‘인격’은 입을 열었다. “몽마란 종족은 신비종족 중에서도 악마와 동일하게 여겨지는 종족 중 하나예요. 저로선 억울한 노릇이지만, 몽마는 어쩔 수 없이 타인의 정기를 뽑아 먹는 것으로 삶을 연명하는 종족이죠. 그러니 배척 받는 것도 어쩔 수가 없는 거죠.” “맞는 말이군.” “이, 이럴 때는 불쌍하다면서 위로해줘야 하는 게 정석이 아닐까요?” “정기 빨아 먹힐 뻔한 당사자한테 위로가 나올 것 같냐?” “…해, 해를 끼치진 않아요. 먹는다고 해도 약간 피로를 느끼는 게 다인데….” “네 말은 부자한테 돈이 많으니까 조금 가져가도 손해는 아니라고 말하는 도둑이랑 같은 원리인 거다, 이 망나니 계집아.” “어, 어쨌든요!” “…뻔뻔한 계집일세.” 주디아는 뻔뻔하게 제 설명을 이었다. “모, 몽마는 말이죠, 마녀처럼 우연스럽게 인간의 배를 빌어 태어나는 종족이에요. 마녀랑 다른 점이 있다면 태어날 때부터 선대 마녀들의 지식을 갖고 태어나는 마녀들과 달리 몽마는 그냥 평범한 인간으로 태어났다가 어느 날을 시점으로 자기가 몽마인 것을 깨닫게 된다는 거죠. 그래서 저는 원래….” “인간 사회에 섞여 있다가 사고라도 쳤나 보지?” “아니요, 납치당했어요.” “…….” “신비 종족만을 납치하는 세력이 있었거든요. 그 세력에게 납치당해 세뇌도 당하고 피도 뽑혔죠. 그러다 너무 아파서 저라는 인격체마저 부정하고 있으니 태어난 게…. ‘피에르’였어요.” - 아마 제가 몽마였기 때문에 가능했겠지요…. “…….” 나지막한 그녀의 뒷말에 이한의 눈은 깊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사연에 동정심을 품어 이러는 게 아니었다. 그저. ‘갈라하드 그 양반이 말한 게 영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니겠는데?’ ‘신비종족을 납치하는 세력’이란 것이 심기를 강하게 건드려서 그러는 것이지. 이한의 직감은 그 세력이란 놈들이 혈교 짝퉁과 무조건 관련이 있으리라 확신했다. * * *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네가 너무 아파서 대리로 아파해 줄 사람이 필요해서 인격을 만들었다 이거군.” “…그럼 제가 너무 쓰레기 같지 않을까요?” “……맞지 않나?” “…….” …부정하고 싶은 얼굴이지만, 차마 부정할 수 없는 표정. 누군가는 저 요염하면서도 신비한 분위기에 홀딱 넘어가 주디아를 위로해주려 할 테지만, 이한에겐 통하지 않을 신비함에 불과했다. 도리어 그의 관심사는. ‘피에르라고 했나, 그래서였군.’ 이한은 자신과 싸우고, 질 것 같으니 바로 총구를 미간에 겨눈 미친놈을 떠올렸다. 마치 자신의 인생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인 그를 말이다. ‘만들어진 인격이라….’ 확실히 삶의 허무함이 깃들 법도 했다. 하지만 불쌍하긴 해도 주디아의 비겁함을 욕하진 않으리라. 그도 그럴게. ‘…나라도 할 수만 있었다면 만들었을 테니까.’ - 아파, 너무 아파…. - 엄마…. - 사, 살려주세요! 살려줘요!! 이한은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세 살 밖에 되지 않았을 시절, 부모가 그를 노예로 팔아 마법사에게 팔린 시절의 일을. 또래의 아이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칭얼거리고 죽는 이들이 즐비했다. 옆에서 대화한 아이가 하루아침에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을 때, 그가 느낀 감정은 참으로 어두웠었다. 얼마나 더 이런 고통 속에서 발버둥 쳐야 하냐며 이한은 분노마저 했었다. -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해…? 하루에도 몇 번이고 이런 말을 되풀이했었지. - 이럴 거면, 이렇게 태어나고 싶지 않았어! 세상 모든 게 다 원망스럽고 싫었다. 그러며. ‘차라리 나 대신 고통을 받아줄 분신 같은 게 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상상은 해봤었지.’ 막상 쓰레기라 욕했지만, 이해 못 할 의견은 아니었고, 이한은 남몰래 쓴웃음을 감추었다. 타인의 앞에서 들키고 싶지 않은 감정이었기에. “…저도 정말 생길 줄은 몰랐어요. 갑자기 새로운 인격이 생겨서, 그 인격이 제 몸을 차지할 줄은 몰랐다고요….” “인격을 만드는 것도 몽마의 힘인가?” “그, 그렇지 않을까요?” “…네가 모르면 어떻게?” “…저 말고 다른 몽마를 본 적이 없어서요.” “…….” “그, 그렇게 보지 마세요!” 주디아 피에르…. 아니 주디아의 인격은 솔직히 경박했고, 자신보다 약자에겐 한없이 오만하지만 강자에겐 한없이 겸손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여 이한은 확신했다. ‘저거군, 저게 그 녀석이 말한 [악녀]인 거야.’ 3대 악녀 주디아 피에르. 원작이니 게임이니 하는 것에 나오는 인물이자, 검둥이 녀석을 그토록 분노케 한 본체가 다름 아닌 저것임을 이한은 내심 확신했다. 어찌 확신할 수 있느냐고? “야, 이제 와서 좀 뒷북이긴 한데, 너 왜 나 덮치려고 했냐?” “네에? 그, 그게….” “화 안 낼 테니까 말해.” “…그냥, 정기가 필요한데, 기왕이면 정기가 왕성한 남자의 정기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 “……개년일세.” “너, 너무해요….” 봐라, 양심 따윈 뒈진 계집이 아닌가. 이한은 이 어둠의 빨강이가 이단 심문당해도 할 말이 없을 거라 장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