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으으응….” 금발 머리의 소녀가 머리를 꾸벅거리며 몸이 기울어졌다. 졸음이 쏟아지는지 눈이 반쯤 감기고 있었고, 금방이라도 잠에 들 것만 같은 얼굴. 푸짐한 식사 탓에 식곤증이 찾아온 건지, 그도 아니면 원래 낮잠을 잘 자는 체질인가 싶기도 했지만, 소녀의 몽롱한 눈을 보고 있자면 딱히 언급한 두 가지 모두가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였다. 털썩. 기어이 소녀가 옆으로 쓰러지기 직전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이 그녀를 조심스러운 손길로 받들며 옮겨갔다. “음냐….” [아린아, 나 네가 너무 창피해….] 침을 흘리며 꿀잠을 때리는 소녀였고, 유령 소녀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경이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렇게 소녀는 퇴장했고, 이한은 침마저 흘리며 잠자는 안쓰러운 미소녀를 향해 눈을 끔뻑거렸다. 쟤가 갑자기 왜 기면증이 있는 것처럼 구나 싶어서. 그리고 곧. “…뭘 했습니까?” 자신이 먹은 것을 의심했다. 그러자 공작은 숨길 필요도 없다는 듯이. “약간의 약을 먹였을 뿐이다. 아무렴 걱정은 필요 없다. 먹고 수면을 푹 취하면 오히려 몸에 활력이 감도는 약초와 같은 것이니.” “…으음, 약을 먹였다는 대목에서 좀 잘못된 것 같지 않습니까?” “어쩔 수 없다. 저 애는 대화를 듣지 않았으면 좋겠으니 말이다.” “참고로 물어보건대, 저 약초 저도 먹은 겁니까?” “자네는 오히려 과하게 섭취했지. 케이크를 한 판이나 먹을 줄은 몰랐네, 한데도 멀쩡하더군.” “…어쩐지 입에도 안 대던 이유가 있으셨네.” 참고로 이한은 디저트도 10인분가량을 먹어치웠다. 당뇨가 오지 않을까 싶지만, 비약을 먹은 이후로 이한의 심장과 간을 비롯한 장기들은 비정상적으로 튼튼해진 상태였다. 설탕을 아무리 먹어도 당뇨가 올 일은 없을 터였고, 이만한 해독능력이 있는 이상 약초든 독초든 그에겐 이제 나물과 다를 바 없었다. …비만은 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오해하진 마라. 딱히 그대를 해할 의도는 없었으니까. 오히려 생명력이 강맹한 기사에겐 도움이 되면 되었지.” “비싼 겁니까?” “별거 아니다. 술탄이 즐겨 먹는다는 불로장생의 열 가지 약초 중 하나에 불과할 뿐.” “…돈이 있어도 못 산다는 말을 길게 돌려서 말하십니다.” “그렇게 들렸나.” 안 그래도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는 자각이 있었는데, 더 부담스럽다. 다만 지금은 부담을 내려놓는다. 왜냐하면. ‘내가 갑이니까!’ 이한은 당당하게 굴기로 했다. 상대는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있고, 그걸 얻기 위해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것이다. 하니 기죽을 필요는 없다. ……없는 게 맞을 텐데. “내 수양딸 아이에겐 차마 하지 못할 얘기를 할 예정이네. 일부러 재운 이유도 그 때문이고, 하니 비밀은 꼭 지켜주길 바라지.” “…그럴 거면 듣고 싶지 않은데요.” “아니, 자네는 들어야 하네. 그래야지 자네가 그 심문관 계집아이를 넘길 터이니.” “…….” 음…. ‘이게 을?’ 아무리 봐도 자신이 갑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며 이한은 땀방울을 삐질거렸다. * * * “-내 아내가 ‘고인’이 된 것은 이미 알고 있을 테지.” “…….” “알고 있다면 대화는 쉽겠군.” “크흠….” 초반부터 대화의 수위가 상당히 셌다. 뭐지? 아까 먹은 걸 더 체하게 하려고 이러나? 소화력이 좋아서 망정이지, 그런 게 아니었으면 속이 쓰렸을 주제가 나왔고, 더는 듣고 싶지 않은 이한이었으나 블레이크 공작은. “그럼 이 또한 알고 있나? 내 아내의 죽음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는 것을.” “…그것까진 잘….” “그럼 지금 알아두면 되겠군, 내 아내는 요정이었다. 그것도 흔한 요정이 아닌, 자연계의 요정이 인간화한 요정이었지.” “대, 대단한 겁니까?” “흔치 않은 경우지.” 이한이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자연계의 요정은 정령과도 비슷하며, 토지신과도 맞먹는 존재였다. 그런 만큼 자연계의 요정들은 한때 신으로 숭배받기도 했었고, 종교가 성행하는 현 시대에서도 몇몇 지방에선 여전히 신으로 모시는 중이기도 했다. 특히 팬드래건의 건국에는 요정이 깊이 관계되어 있는지라 남부 대륙에서 요정이 가진 권위는 상당한 것이었다. 하니 그런 요정과 혼인한 블레이크 공작은 틀림없이 대단한 것이었고, 그런 요정이 죽은 것 또한 크나큰 역사적 비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요정은 예로부터 노려지기 쉬운 대상이었다. 요정이 가진 신비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것투성이며, 요정의 신비를 밝히고 불로장생이나 그 신비를 얻고 싶어하는 왕과 권력자들도 여전히 넘쳐나지. 당장 어떤 마법사는 요정을 연구한다는 목적으로 내 아내를 노리기까지 했었으니까.” “…그 주문쟁이, 아니 마법사는 어떻게 됐습니까?” “공작가의 고문실에서 살고 있다. 생명력이 제법 끈질기더군.” “…….” “말을 잇자면, 그런 만큼 내 아내의 죽음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았다.” “…사고에 의해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요?” “그랬지, 하지만 말일세. 공작가의 안주인이 ‘사고’로 죽는다는 게 말이나 될 것 같은가?” “…….” “지키는 사람이 몇이며, 그녀를 호위하는 인력도 내가 직접 뽑은 정예 중의 정예였다. 한데도….” “…….” …이한은 이어질 그의 뒷말이 어쩐지 예측됐다. ‘한데도 죽었다는 건, 타살이 의심된다는 거지.’ 아무래도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른 뒷이야기가 있는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예상했을 테지만, 내 아내는 어느 수상한 이들에게 해를 입었다. 공작가의 호위들을 모두 무력화시키고 그녀를, …죽였지.” 콰앙! “…….” 일순 그가 내뿜는 분노가 폭발을 일으키는 듯했다. 쿠구구궁! 유형화된 기세. 일정 수준에 도달한 기사들만이 보일 수 있는 살기나 투기와 같은 기운을 실체화하는 고난도의 경지였다. 저 기운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검울림보다 활용성이 좋으며, 파괴력 또한 으뜸인 바. 허나 지금, 공작이 내뿜는 기세는…. ‘기세를 내뿜었을 뿐인데 대리석이 부숴진다고?’ 하…. 타 기사들이 도달한 것과 격이 다른 수준이었다. 다른 녀석들이 내뿜는 것이 기껏해야 화약이라면 저 양반이 내뿜는 것은 니트로글리세린이다. 기세가 닿기만 해도 따끔거리며 화상마저 입을 지경. 헛웃음이 나오는 수준이다. ‘안 그래도 짐작은 했는데….’ 이 사람은 말도 안 되게 강했다. 왕국 제일의 검객이 괜한 허명이 아니었고, 어쩌면 오러 유저와도 맞먹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그러한 강자는 여전히 기세를 풀지 않은 채. “그녀의 죽음에 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이 가담했는지는 모른다. 허나 그녀를 죽인 이들을 추려내는 것은 가능했지.” - 갈라하드의 힘을 총동원하여! 오싹한 뒷말이 아닐 수 없었다.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왕실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집단이 총동원됐다는 뜻이니. “그리고 마침내, 그녀를 죽인 자들을 좁혀낼 수 있었지.” 타악. “…….” “자칭 [천사]를 따른다는 집단이었다.” “…흐음.” 공작이 내놓은 것은 피가 잔뜩 묻은 십자가였다. 그냥 십자가도 아닌 불온하기 짝이 없는 역십자가였고, 이한은 이미 역십자가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 “땅굴을 무너트린 기사라면 이 광신도들에 대해 당연히 알 테지?”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겁니까?” “차라리 모르는 게 뭔지 묻는 게 더 빠를 걸세.” “…….” 혈십자군. 전날 귀왕을 소환한 것으로 추정되며, 땅굴을 점령하고 어린 시절 자신을 납치했던 암살 조직 검은 달과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집단. 한데 이 집단은 무려 공작의 아내마저 해하였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며 이한은 눈을 질끈 감았다. ‘…로판은 로판이란 건가.’ 로맨스 판타지의 약속과 같은 내용 중 하나가 이런 것이다. 공작이나 대공, 혹은 황제가 사랑하는 부인을 직접적으로 노려 암살하는 조직이 있는 것. 그리고 그 조직 대부분은. ‘교회 세력이나 황실의 어른들이 흑막인 경우가 많긴 하지.’ 정해진 클리셰와 같았고, 이한은 하필 그 클리셰가 이 세상에도 작용했나 싶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만약. ‘그 클리셰 수순대로라면, 혹시….’ 로맨스 판타지의 답답한 클리셰 중 하나이자, 일명 [고구마]라고도 불리는 내용이 공작의 입에서 나오지 않을까 예상하기 무섭게. “내 수양녀 아이린 윈들러와 신전의 이단 심문관인 주디아 피에르의 공통점이 뭔지를 아나.” “…뭡니까.” “다름 아닌 ‘요정의 흔적’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 …친딸에 대한 의심암귀. 최악의 로맨스 클리세 중 하나가 튀어나왔고, 이한은 음식물은 소화가 진작 다 됐음에도 어쩐지 속이 답답했다. 허나 이한이 사이다를 원하건 말건 공작은 여전히 제 주장을 펼쳤다. “아이린 윈들러는 ‘자연의 친화력’이 엿보이며, 주디아 피에르에겐 ‘신의 사랑’이 느껴지지. 모두 다 요정이 가지는 체질이기도 하다.” “…마법과 신성력을 말하는 겁니까?” “눈치가 좋군.” “그게…. 말이 됩니까?” 자연의 친화력은 2중 속성을 가진 것을 뜻할 것이며, 신의 사랑은 신성력을 말하는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과대망상이나 과한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아이린 윈들러의 재능이 특별하긴 하지만, 가끔씩 등장하는 재능이고. 신성력의 경우는 아예 신만 믿으면 누구라도 가질 수 있는 힘이니까. 하여 이한으로선 망상이 심하다 싶을 따름이지만, 공작은. “하지만 한 시대의 이만한 재능을 가진 ‘동년배’가, 그것도 ‘여인’이 등장하는 경우는 드물지.” “…….” 끝없는 의구심을 내뱉었다. “그뿐인가? 아이린 윈들러는 고아원에 있을 십대 무렵 갑자기 성격이 달라졌다고 한다. 원래는 오만방자한 성격이 갑자기 유순해졌을뿐더러, 고아원의 아이들을 잘 챙겨주는 아이로 바뀌었다고 하지.” “…늦게 철이 들었겠죠.”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면 이건 어떤가? 주디아 피에르는 그저 평범한 부랑아였으나, 그녀를 불쌍하게 여긴 라파엘 추기경에게 구원 받아 신전에 들어오고, 이후 엄청난 두각을 드러내며 곧장 이단 심문관마저 됐다고 하지. 한데 이런 업적을 쌓았는데도 자신의 나이와 성별마저 속이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게 과연 우연으로 보이나?” “흠….” “마치 무언가를 숨기려고 급급해하는 것 같지.” “…….” …공작의 의심은 언뜻 타당한 것 같았다. 아내가 죽은 후 갑자기 나타난 동년배의 여자들. 나이는 아내가 죽은 햇수와 똑같은 19세. 추가적으로 요정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비범한 재능과 출중한 미모까지…! 도리의 의심하지 않으면 멍청한 것이리라. “하여 그녀를 원하는 것이다. 주디아 피에르. 그 여자는 수상하기 이를 데 없었고, 조사해본 결과 그녀가 이 광신도 집단과의 관계성이 있음을 알아낸 바. 남은 건 직접 물어보는 것뿐이다. 아무렴, 답변만 잘해준다면 험하게 다룰 생각은 없다. 하니 그녀를 넘기길 원한다.” “…….” “나쁜 제안은 아닐 것이다. 사례는 충분히 하겠다, 원한다면….” “-이제 보니 눈만 돌아간 게 아니었네.” “……?” …일순 주변 전체가 다 경직됐다. 공기가 멈춘 것만 같은 착각이 일어난 것 같다고 해야 하나? [[……….]] 백이 넘는 인원의 강렬한 눈동자가 본인에게 집중되는 경험이 있는가? 없다면 다행이다. …트라우마로 남을 수준이니까. 허나 이한은. “아, 생각만 한다는 게 입으로 나와버렸구나….” 멋쩍게, 또는 뻔뻔스레 나갈 따름이었다. 그리고 기왕 상황이 주옥 된 김에. “이봐요, 아저씨. 찬물 마시고 정신이나 차려요. 그 나이 드시고 괜한 이상한 짓 하지 마시고.” “…….” “난 또 무슨 소리를 하나 싶었네.” “……허?” 더욱 막 나가기로 결심했다. 이 답답한 아저씨에게 팩트 폭력이란 게 뭔지 알려주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