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는 목검과 한손 방패를 들었다. “-미리 말하자면 난 제대로 된 검술이나 가르침을 받은 적은 없어. 즉, 근본이 없다는 거지.” 흐느적거리듯 몸을 푸는 그에게선 아무런 기세도 느껴지지 않았다. 낡은 목검과 나무 방패 등이 워낙 볼품없는 것도 있으나, 그가 인위적으로 기세를 억누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니 나에겐 유파가 없고, 그저 실전에서 어느 정도 완성한 수단밖에 없지. 해서….” 후우우웅!! “내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검술은 ‘이런 것’밖에 없다.” 흐느적거리는 목검이 일순 말벌의 독침마냥 순식간에 허수아비에게 쏘아졌다. 일순간 일어난 과정이었고, 눈으로도 쫓지 못할 찌르기였다. 콰득! 목검은 정확히 허수아비의 눈을 꿰뚫었다. 깔끔하기 그지없는 한 수. 잔혹하고도 과감한, 그리고 정확함이 돋보이는 솜씨였다. “그나마 내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건 이런 거야. 상대의 약점을 찌르는 법. 그리고 상대의 방심을 유도하고, 비겁하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방식이지. 솔직히 기사의 방식은 아니야.” 그는 자신이 익힌 기술을 폄하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분해 보이거나 자신이 하는 짓에 대한 부끄러움은 없어 보였다. “내가 이런 걸 익힐 때는 기사가 아니었고, 살려면 이런 거라도 잘 해야 했거든. 그래서 어쩔 수가 없었다.” 파앗! 이번엔 방패를 이용한 후려치기였다. 방패란 것이 저토록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거구나 싶은 움직임, 거기다 적절히 목검을 사용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목검을 활용하는 방식을 보여줬다. 손잡이 부분을 사용하는 방식과 칼등으로 두개골을 함몰시키는 법 같은…. 그야말로 살벌한 방식뿐이었다. “후우.” …어느 순간 허수아비는 누더기가 되어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처참하게 망가졌고, 만약 저것이 허수아비가 아니라 사람이었다면 정말 끔찍한 몰골이지 않을까 싶었다. 소름이 다 돋을 따름. “물론, 너희에게 이런 비겁한 방식을 익히라고 하는 게 아니야. 난 그저 이런 식으로 싸우는 놈들도 있다는 걸 알려주는 거고. 너희가 이런 비겁한 방식에도 대응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려는 거니까.” “…대응?” “결국 내가 보여준 건 편법이고, 상대방의 방심을 유도할 뿐이며, 약한 놈들한테 잘 통하는 수법이지. 하지만 이런 방식에 대응조차 못 하는 놈들이 제법 많아. 설사 투기법을 배운 놈이라고 해도 칼침 맞고 안 죽는 게 아니니까. 가능하면 이런 편법을 파훼하는 훈련을 미리미리 해두는 것도 좋다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투욱. “지금부터 너희는 허수아비가 된다. 그리고 본 교관이 펼치는 편법을 막으면 된다. 이것이 2학기에 너희가 몸에 익혀야 할 필수 과제가 될 거다. 물론 시험도 이걸로 대체할 거고.” “…….” “안다, 너무 쉽지? 걱정 마라. 쉬운 만큼 다른 특별 훈련도 예정되어 있으니. 실망할 필요 없다. 본 교관은 너희가 성장할 수 있는 무수한 계획을 이미 짜놨으니까, 하하!” “…차라리 맹수랑 같은 울타리에 가둘 것이지, 이게 뭔-.” “어? 어떻게 알았냐? 그것도 계획에 있긴 한데.” “…….” “역시 젊은 뇌. 본 교관의 시험을 미리 예측하는구나. 훌륭하다!” “…….” ……생도들은 그의 칭찬이 도저히 기쁘지 않았다. 예측하였다고 한들. ‘와아, 우리 다 죽이려고 이러시나?’ 생도들은 다시금 처참하게 분쇄된 허수아비를 보았고, 저 허수아비의 모습이 근시일 내 그들의 모습이 되리란 예지에 가까운 확신을 얻었다. 참으로…. “지, 진도가 너무 빠른데요?” 그들은 살고 싶었다. 그라고 하여 이 수련의 위험성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그가 힘을 억제한다고 한들, 잘못 맞으면 사망이거나 못해도 식물인간이 나올 텐데. 그리고 기사는 제자들을 식물인간으로 만들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걱정 마라, 대비책은 있으니.” 아무렴, 그가 진짜로 무식하게 이런 훈련 계획을 짰을까? “인턴들 앞으로.” “…….” “몸만 움직이지 말고 대답도 같이 하도록. 안 하면 그 입이 쓸모없다고 생각하고 혀를 뽑아버리는 수가 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할 짓을 왜 하지?” “…….” “어휴, 됐다. 말하는 내 입만 아프지. 자, 전날 말했던 거 얼른 펼쳐.” “그, 그게….” “안 해? 그래 하지 마. 대신 분근착골 일주일 코스로….” “당장 하겠습니다!!” “…진작 그럴 것이지.” 아무리 고문에 대한 훈련을 받은 이단 심문관들이지만, 분근착골의 고통은 익숙해질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기사가 강도를 낮춰서 한 거긴 했지만, 그들에겐 충분히 트라우마로 남을 일이었으니까. 고분고분 기사의 말을 따르는 이단 심문관, 아니 인턴들이었고 그들은. [대성법-희생의 결계]. 성법을 발동했다. 썩어도 이단 심문관, 엘리트 중의 엘리트답게 사제 백 명은 모여야 가능한 성법을 소규모로 펼쳐내는 위업을 보이는 인턴들이었고, 성법은 검술학부 훈련장을 감쌌다. 점차. “어? 갑자기 왜 이렇게 시원해졌지?” “방금 전만 해도 그렇게 후덥지근했는데….” “어머? 나 피부가 갑자기 고와졌는데요?” “세상에-!” 이한이 새롭게 데리고 온 인턴들이란 이들이 신성력을 내뿜은 것에도 경악하길 잠시. 신성력이 감싼 공간에서 아늑하고도 성스러운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며 생도들은 다른 의미로 경악했다. 자잘한 상처나 근육통, 혹은 자기도 모르는 새 쌓인 피로도가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서, 설마, 희, 희생의 결계?!” 아르노를 비롯한 몇몇 명문가의 자제들은 이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으며 입을 쩍 벌렸다. 설마 소문으로만 듣던 전설적인 성법을 보게 될 줄은 몰랐기에. “아르노? 이게 뭔가?” “……[희생의 결계]입니다. 결계 안에 있는 이들은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상처를 입지 않으며, 다치지도 않습니다. 또한 항상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할 수 있으며, 밥이나 물을 마시지 않더라도 딱히 문제가 없다고 하는 결계지요.” “쿤타, 다 알아들을 건 아니지만, 엄청 좋다는 건 알겠다!” “좋다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신전의 결계형 성법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결계 중 하나이니 말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 결계로 성기사들은 과거 악마와의 싸움에서 천일 동안 쉬지도 않고 싸웠다고 하니까요.” “와아! 그렇게 좋은 건데 왜 많이 안 쓰나?” “…결계를 펼친 사제들이 모든 리스크를 감당하기 때문입니다.” “…응?” “이 결계를 펼치는 사제들은 결계 안에 있는 자들의 모든 피로와 상처 등을 대신 감당해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희생]이란 이름이 붙은 겁니다. 말 그대로 희생을 전제하에 펼치는 성법이니 말입니다.” “…쿤타, 갑자기 이 결계 안 써도 될 것 같다….” 착한 바바리안 소년은 그렇게 결계가 좋다는 말을 취소했다. 남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쓰고 싶지 않아서. 다만. “걱정 마라, 덩치야. 쟤가 말한 건 좀 극단적인 예시인 거야. 애초에 하루 정도 펼치는 걸로 문제가 그다지 없을뿐더러, 짊어지는 통증도 사제의 역량에 따라 5%도 채 안 넘는다고 하더라.” 이한, 그가 다소 소란스러운 걱정을 불식시키듯 설명했다. “그럼…?” “우리 인턴들은 다행스럽게도 좀 우수하다. 그러니 통증이나 피로도도 얼마 안 받는다는 거지. 그리고 이 결계도 수업 때만 쓸 거니까 큰 문제는 안 일어날 거다.” “오오!” “어떠냐? 이제 좀 안심했냐?” “안심했다, 교관! 이 결계가 다시 좋아졌다!” “그래, 의욕이 나서 다행이다. 그만큼 열심히 훈련해라, 알겠지?” “응, 알겠다!” “…응은 반말이고, 자식아!” “아아악! 교, 교관 오지 마라! 교관 딱밤은 쿤타 두개골도 깬다!” 도망치는 쿤타였으나, 유달리 더 빨라진 교관의 몸놀림은 기어이 딱밤을 때리는 데 성공했다. “아악! 아프…, 응? …아, 안 아프다?” 희생의 결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함을 알려주는 증명을 몸소 보여주는 쿤타였다. “헤에, 이런 효과구나.” “역시 교관님이야, 엄청난 걸 준비하셨군.” “…다행이다, 유서를 써두지 않아도 돼서.” 생도들 사이에서 안도감이 퍼져나갔으나, 아르노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아무리 5% 데미지라 해도, 80명이나 되는 인원의 데미지가 축적되면 죽을 만큼 아픈 건 똑같지 않나?’ 으음…. “뭐, 내가 알 바는 아니겠지.” 아르노는 애써 고민을 털어버렸다. 저 사제들이 어떠한 존재인지 신경이 쓰이긴 했으나. “당장은 이 기회를 잘 활용하는 것이 좋겠지.” 평소 다칠까 봐 시도도 하지 못한 기술을 수련해볼 수 있는 적절한 기회를 놓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이기에. 사제들의 후환이 걱정되긴 하지만…. “크윽!” “아파? 아프면 지금이라도 말해. 그만둬도 괜찮아. 다만 당장 아프다고 그만두면 교관님이 가만히 둘지 모르겠지만.” “으으윽!” “왜 그렇게 노려봐? 혹시 지금 나한테 불만 있는 거야?” “아, 아닙니다.” “아니긴, 크흐흐, 때려보든가? 때릴 수 있을까 싶지만.” “!!?!”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장의 현재만 살아가며 모든 원한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데미안 폴렛의 희생정신(?)이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교관님 말씀대로 저런 것도 재능일지 모르겠군.’ 앞날을 두려워하지 않고 현재를 즐기는 재능이. ‘현재를 즐기는 자가 가장 무섭다고 하더니…. 저 사람은 강해질 거야.’ “불만 있으면 때려 보라니까!” ……훗날 살아남는다는 가정 하의 얘기지만. 아르노는 하루살이의 정신력으로 살아가는 데미안 폴렛에게 처음으로 감탄과 존경 비스름한 것을 느꼈다. * * * “…자식들, 완전 신났네.” 성법이 확실히 이 세상 상류층조차 겪기 힘든 종류의 힘이기 때문일까? 귀족 생도 녀석들조차 흥분을 금치 못하며 성법에 매료된 상태였다. 보고 있노라면 왠지 뿌듯할 따름. “이런 게 플렉스지.” “…어딜 봐서요?” “원래는 죽일 놈들 갈아 넣어서 훈련시설을 미치도록 좋게 만들었잖아? 이거 왕실도 못 하는 거라면서? 그럼 플렉스 맞지.” “그, 그런가?” 묘하게 설득된다며 데릭은 주춤거리며 동의하고 말았다. 그러던 그때. “교관, 잠시 얘기할 것이 있는데 시간을 좀 내줄 수 있겠습니까.” “…….” 로엔, 데릭과는 다른 의미로 미래를 아는 회귀자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웬일이래? 학술원 내부에서 아는 척도 하고.” “지금은 나름 마음이 급해서 말입니다. 교관, 저는 지금 부탁을 하나 하고자 합니다.” “부탁?” “예에, 부탁입니다.” “흠, 저 빨강이랑 관련 있는 거냐?” “…역시 눈치채셨군요. 그럼 가감 없이 말하겠습니다. 교관, 부디 그녀를….” ─저에게 주십시오! “……….” …일순 감도는 정적의 시간. 이한조차 할 말을 잃은 표정을 지으며 5초 정도 멍해졌고, 그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곧장 되물었다. “…검둥아. 너 지금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지 않냐?” “무엇이 말입니까?” “네가 지금 내뱉은 대사를 되돌아보렴.” “……무엇이 이상했습니까.” “이것도 환장할 물건이네…?” 이제 보니 아주 눈이 돌아버렸다. 딱 사고 치기 직전의 눈깔이다. 이성을 놓아버렸기 때문일까? 로엔은 자신이 한 발언이 이상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죽이고 싶다는 걸 스윗하게 말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겠지….’ 다만 저 대사에 담긴 한 맺힌 감정을 읽은 이한으로선 난감하기 그지없다. 이대로 줬다간 칼부림 제대로 날판이었으니까. ‘스읍, 어른들이 부부싸움에 끼어드는 거 아니라고 했는데….’ 이한은 난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