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같아선 죽이고 싶다. 이들은 여를 위협하진 못해도 아서를 위협할 새싹임은 부정할 수 없으니.” “그 정돕니까? 어차피 수양딸이랑 서자일 뿐이지 않습니까?” 이한은 왜 이토록 그녀가 저들을 신경 쓰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 비록 아카데미 수석이란 건 대단하나, 저들의 혈통은 저 애기님과 비견할 바가 아니다. 다른 놈들도 다이아수저지만, 저 애기님의 혈통에 비하면 동네 싸구려 수저에 불과해질 테니. “그래, 지금은 그렇겠지.” “…지금은?” “지금부터 여가 말할 내용은 오직 여를 비롯해 단 세 명만이 아는 극비다. 그러니 어디 가서 떠들지 말도록.” “그럼 안 들을래요.” “거절하도록 하마. 그냥 듣거라.” …독재자 같으니. “일단 아이린 윈들러. 이 아이를 숙부께서 입양한 이유는 아이린이 과거 죽은 아내와 똑 닮았기 때문이라고 하더구나.” “쯧, 역시 귀족답게 취미도 고상하시네. 대용품을 들이다니.” “빈정거리지 말거라, 그리움이란 건 평민이든 귀족이든 모두 동일하게 느끼는 거니. 숙모님이 많이 그리우신 것일 테지.” 그러니 충분히 아내와 닮은 여인을 수양딸로 받아들인 건 이해가 가나…. “이는 왕실의 분석이지만, 아이린 윈들러는 숙부의 ‘친자’일 확률이 높다.” “…네에?” “왕실 계승서열 2위인 숙부의 하나뿐인 외동딸이 아이린 윈들러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숙모의 사망 원인은 추락사. 당시 숙모는 만삭이었고, 아이를 낳고 돌아가셨을 확률이 높지.” “추, 추락했는데 살 수 있다고요?” “숙모께선 요정이셨다. 왕족 못지않은 신비를 품은 고귀한 분이셨으니 살아서 아이를 낳고 돌아가셨을 가능성이 없지 않지.” “…….” “그리도 놀랍더냐? 확실히, 여도 이를 알고 여러모로 경악하긴 했지.” “…으음.” 글쎄, 아마 자신이 놀란 것과 그녀가 놀란 것에는 다른 차이가 있지 않을까? ‘뭐지, 어딘가 익숙한데….’ 출생의 비밀, 비범한 핏줄, 가난한 신분으로 마법사가 되어 아카데미 수석 입학. 끝으로 공작부인과 닮은 외모 덕으로 친부일지 모르는 공작가의 입양됨. 이거 완전히……? ‘로맨스 판타지 여주인공 설정 아닌가?’ 부사관 시절, 야간 근무일 때마다 지루함을 참고자 읽었던 만화 중 그런 장르가 있었다. 로맨스 게임이나 소설에 빙의하여 인생역전을 하는 그런…. ‘아, 아니다. 너무 과대해석 하는 거겠지.’ 이한은 괜한 헛생각을 했다며 털어버리려 했다. 도리어 슬픈 과거를 가진 여인이니 따스하게 바라보는 게 정상적인 어른의 반응이란 것…. “-다만 아이린 윈들러는 특이한 점이 있더구나. 매일같이 ‘내겐 돌아갈 곳이 따로 있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며, 2년 이내에 그녀가 아닌 다른 수양딸을 숙부가 들일 즉시 입양을 취소해야 한다는 이상한 계약을 맺었다는 정보가….” “찐이네, 이거.” “응? 무어라고 했느냐?” “아, 아닙니다.” “?” 이한은 확신했다. 그 여자. 무조건이다. ‘…나 말고도 있었구나?’ 확실히 오만하게 자신만 이런 특이한 환경에 처했다고 여기진 않았건만. 이토록 갑자기 출몰할지 몰랐다. 그것도 이토록 뻔하디 뻔한 장르로 말이다. ‘그럼, 이 세상이 로판 세상이었어?’ 근데 왜 이렇게 꿈도 희망도 없이 거지같기만 하지? 이한이 문득 그런 생각을 할 때. “허나, 아직 의심의 정황이 있을 뿐. 그녀가 숙부의 딸이란 건 확인되지 않았다. 만약 훗날 친딸임을 입증할 방법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아이린 윈들러는 잠재된 적에 불과하다. 허나 라이오넬의 공자는 다르다.” “걔는 왜요?” 걔가 혹시 로판 속에 자주 등장하는 훗날의 북부 대공 같은 건가? “그 공자는 어쩌면 ‘미래시(未來施)’를 가진 게 아닐까 하는 의혹을 사고 있으니까.” “…….” “로엔이란 애송이는 7년 전을 기점으로 갑자기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하더구나. 13살 나이에 대공가의 수련 기사를 꺾고, 그를 종자로 삼았으며. 모두가 안 될 것이라 하는 사업을 손대는 족족 성공시켰다고 하더군. 거기다 훨씬 발전된 새로운 투기법을 선보이며 천재임을 입증했다고 한다.” “…허.” “이후로 그 애송이는 현재 라이오넬 가에서 유력한 후계자 후보 중 하나가 되었다. 서자라 한들 그 정도로 성과와 재능을 보였으니, 대공도 이를 높이 평가하여 기회를 준 것이겠지. 그렇다면-.” 이어지는 그녀의 설명은 귓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듣지 않아도 대략적으로 알 것 같다. 왜냐면 이건 아이린 윈들러 못지않은 뻔하디 뻔한 클리셰였으니까. ‘이번엔 뭐야? 회귀물인가?’ 한창 인기 많았던 장르 중 하나. 제목으로 치자면 ‘멸망한 세상에서 회귀한 내가 세상을 구원한다’ 정도로 지으면 되지 않을까? ‘이게 실환가?’ 이한은 갈수록 감정이 복잡해질 쯤, 그녀의 설명은 막바지로 향했다. “-이렇듯, 그가 하는 행동은 미래를 알고 있는 게 아니라면 성공하기 힘든 것밖에 없다. 어쩌면 전설적인 마법사가 가졌다고 전해지는 미래시의 신비를 각성한 게 아닐까 하고 우린 추정하는 중이다. 그리고 그만한 인물이 대공이 된다면 왕가 입장에선 더할 나위 없는 위협으로 다가오는 법이지.” “…아닐 텐데.” “응? 뭐가 예상가는 것이라도 있더냐?” “아, 아니요. 그냥요. 관상이 봤을 때 딱히 그런 놈은 아닌 것 같아서.” “호오, 그것도 그대의 ‘본능’과 관련된 것이겠지? 염두 하여 두도록 하마.” “……크흠.” 속인 건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찜찜하다. ‘이거 아무래도 누님이 헛짚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이걸 어떻게 말할 방법이 없네.’ 전생부터 시작해, 빙의와 회귀란 걸 설명하자면 입만 아프고, 미친놈이라 오해만 받을 터이니. ‘됐다.’ 그냥 말을 아끼지. 가만히 있으면 반이라도 가는 것. 이는 중세 판타지 월드에서도 통용되는 법칙이었음이다. 이 세상이 로판이건, 회귀 장르 속 세상이건 무슨 상관이랴.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지.’ …귀찮게 하는 놈이 있다면 부수면 그만이고. 이한은 세상을 복잡하게 살기보다 간단하게 살기를 표명한 바였다. “-어쨌든 여의 설명을 들었다면 알 것이다. 여가 왜 그들을 죽이고 싶은지.” “네에, 네에 위험한 상대네요.” “…그대의 표정은 전혀 공감하는 자세가 아니다만?” “하고 있어요. 이제 대충 설명도 다 들었으니까 좀 말해 봐요. 저한테 하고 싶은 부탁이 뭔지.” “……역시 막돼먹었구나.” 자신은 심각한데 상대가 저토록 저조한 반응을 보이니 흥이 안 오르는 법. 아이시스는 퉁명스러운 자세로 얘기했다. “여는 이들이 아서의 권력에 위협이 되지 않는 이들임을 알 필요가 있다.” “그럼 그냥 데리고 와서 물어보면 되지 않나?” “사람의 속내를 어찌 믿고. 여는 사람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신뢰하는데요?” “그자의 상황과 현재를 신뢰하지.” “…….” 제법 좋은 명대사였다. 마음 깊이 공감이 되는. 역시 말발이 이 정도는 돼야 왕이 되나 보다. “여는 그렇기에 그대가 그들을 알아봐줬으면 한다. 그대의 눈이라면, 아니 감각이라면 무엇이라도 알아낼 수 있을 테니.” “…설명이 더럽게 길어서 얼마나 대단한 부탁인가 싶었는데, 겨우 그거였어요?” 어안이 벙벙해지려다 만다. 뭐냐, 결국 제 감각으로 그들의 위험요소인지 명확히 판별하고 오라는 뜻 아닌가? 이리 거창하게 설명하고 나오는 결론에 이한으로선 싱거울 뿐이었다. “아니. 단 한 번으로 결정을 내려선 안 된다.” “…??” “아직 그들은 어리다. 지금이야 당장은 권력욕이 없을지도 모르나, 훗날 시간이 흐른다면 본성이 바뀔지도 모르지. 그러니 그들을 항시 감독하며 관찰해야할 필요성이 있다.” “……참고로 묻는 건데. 그 기간이 얼마나 되는데요?” “적어도 아카데미에 다니는 3년 동안 지켜봐야 하지 않을까 싶구나. 그쯤 되면 계산이 설 테지.” “…….” “그러니 부탁하도록 하마, 그-.” “안 사요. 안 사.” “……말을 끊는 것은 몹시도 안 좋은 버릇이니라.” “지금 상황에선 무척 좋은 버릇이 아닐까 싶고요.” “……으음.” “우우?” 제 엄마가 상황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아 불만 어린 모습을 보인 것이 익숙하지 않은지 고개를 귀엽게 갸웃거리는 아서였고, 이한은 그러던 말던 요지부동하게 제 자세를 관찰할 따름이었다. “얘기 끝났죠? 그럼….” 이제 뒤도 안 돌아보고 갈 셈이었다. 잔혹한 소꿉장난에 어울려주는 것도 한계란 것이 있는-. 투욱. “……으응?” “마셔보아라.” 주저 없이 뜨려는 그에게 뜬금없이 던져지는 작은 유리병. 안에는 보랏빛 액체가 넘실거렸는데, 이한은 눈을 끔뻑거렸다. “내가 이게 뭔지 알고 마셔요?” “후회하진 않을 것이다. 또한 팬드래건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마. 그 약에는 아무런 수작이 없다고.” “…….” 왕족이 성씨를 건다. 이는 영혼에 걸고 하는 맹세인 거다. 예시로 들자면 당선 공약을 남발하는 놈이 저 맹세란 걸 한 뒤, 나중에 공약을 안 지키면 영혼이 찢어지는 고통이 하루에도 수만 번씩 찾아온다고 했던가? 기어이 평생 고통과 저주만 받다가 인생 하직하는 게 맹세란 놈이다. 그렇기에 이한은. “참 나.” 그러면 마셔야지. 뽕. 이한은 거침없이 뚜껑을 따고 액체를 마셨다. 손해는 아니라고 했다. 그럼 자신을 혹하게 할 만한 물건이란 건데, 과연……. “……으음?!!” “후.” 이한은 경악했고, 아이시스는 승자의 미소를 머금었다. 이번 게임의 승자가 결정되었다는 듯. 그리고 이를 부정할 수 없게도. ‘…이건 무조건 받아야 한다.’ 그도 그럴 게. ‘불능(不能)’이 된 제 물건에서 신호가 왔으니까. ‘15년’ 만에 느껴지는 감각에 그는 눈물이 자칫 나올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