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 입구 근처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는 걸 보니 벌써부터 다가가기 싫어졌다. 단순히 도박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아니라, 오늘 촬영이 있기 때문에 그거 구경한다고 모인 인파였다. “사람이 엄청 많네.” “…….” 일하다가 잠깐 시간 내서 유아린이랑 같이 서예린을 구경하러 왔는데 얘가 아까부터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왜. 또. 뭔데.” “왜? 또? 뭔데?” 오히려 내 질문에 본인이 기가 찬다면서 투덜거리는 유아린.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쿡쿡 찔러대면서 따지고 든다. “왜 이렇게 엉덩이에 집착하냐? 지난번부터 시작해서 어제도! 계속 남들 모르게 엉덩이 때리고!” “……재밌잖아.” 어제 술자리에서 몇 번인가 유아린 엉덩이를 두들겼더니 이제는 반응이 찰지다. “성희롱이야! 개색기야! 네가 무슨 성희롱하는 상사야?!” “상사 맞잖아! 그리고 니도 즐겼잖아!” “닥쳐! 아니야!” 분명 엉덩이 때릴 때마다 감미로운 신음이 터져 나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쓰읍, 아님 말고.” “진짜 하지 마라. 응? 알았어?” “알았다고.” 평소에 유아린한테 맞고 다녀서 이런 식으로라도 복수하는 거였는데. 이렇게 막혀버렸으면 다음부터는 어떤 식으로 반격해야 할까 고민은 좀 된다. “어제 너 때문에 엉덩이 빨개졌다고.” ‘……보고 싶네.’ 슬쩍 시선이 유아린의 엉덩이 쪽으로 내려가자, 녀석이 다급하게 양손으로 엉덩이를 감추면서 씩씩거린다. “하지 마.” “안 한다고. 얘가 왜 생사람 잡지?” 생사람 아니다. 방금까지만 해도 탐스러운 유아린의 엉덩이에 눈길이 간 건 사실이다. “너 손가락 꿈틀거리는 거 보였거든?” 슈발 걸렸다. “니 엉덩이 만지려고 손가락 꿈틀거린 거 아닌데?” 일단 얼굴에 철면피를 깔고 바로 대꾸하자 유아린이 성큼 다가오며 되묻는다. “그럼 손가락 왜 꿈틀거림? 딱 사이즈가 엉덩이 움켜쥐는 정도였는데?” “서예린 가슴 만지- 푸헑!” “미친 새끼가!” 바로 주먹이 꽂혀 들어왔다. 나름대로 피하려고 몸을 틀었는데 오히려 주먹에 몸을 가져다 댄 꼴이 되어버렸다. 몸을 웅크린 채로 고통을 호소했으나, 유아린은 씩씩거리면서 앞쪽으로 가버렸고. 나도 인파 사이를 헤집으며 뒤따랐고 그곳에는 배우들이랑 이것저것 얘기 중인 서예린이 있었다. “유명한 사람들이다.” 입을 '헤' 하고 벌린 채로 서예린 근처에 있는 사람들을 구경 중인 유아린. 확실히 TV나 영화관에서 몇 번 본 적 있는 사람들이었다. 저렇게 있으니까 서예린이 저쪽에 어울린다는 느낌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그중에는 어제 얘기가 나왔던 차승호도 있었는데. ‘……저런 사람이랑 나를 비교했다고?’ 찬우랑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의 미남. 서예린이 저 사람보다 나를 고른 게 일종의 기만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잘생겼다. 조금 기가 죽을 정도. 서예린을 불러서 인사라도 할까 싶었지만 촬영이 다시 진행되었기에 우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촬영장을 통제해서 촬영현장을 못 보게 할 때도 있다고 들었는데, 여기는 호텔이니 통제는 따로 없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서예린의 연기를 구경할 수 있었다. 이쪽에서 준 의상인지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무슨 느낌인지 딱 느껴졌다. 돈 많은 부잣집 아가씨. 실내임에도 선글라스를 낀 채로 우아한 몸짓이 인상적이다. “노출이 좀 심한 거 아냐?” “그 정도는 해야지. 배경이 카지노잖아.” “…….” “예린이 아빠세요?” 어이없다는 유아린의 되물음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확실히 배경 특징상 노출이 좀 있는 편이 이미지에 어울리긴 했다. “여주보다 저 사람이 더 예쁘지 않아?” “쟤가 여주 아니었어?” “와, 몸 봐라.” 주변 사람들의 웅성거림도 서예린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도대체 누구냐면서 검색해 보는 사람도 있었고, 대한당 빵집 미녀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 괜스레 불쾌감이 가슴 한쪽에 자리 잡았지만 일단 모른 척했다. 어쨌든 서예린은 연기를 시작했다. 도망치는 주인공에게 대사 한 줄 없이 길을 가리키는 부잣집 영애 역할. 어제 술자리에서 보여주던 휘적거리는 연기와는 사뭇 다른, 진지하면서도 우아함이 느껴지는 손짓. 딱 그거 하나였음에도. ‘아.’ 저 아이는 배우를 해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슬슬 가자.” 서예린을 멍하니 쳐다보던 나는 어색하니 웃으면서 몸을 틀었다. 쉬는 시간에 잠깐 짬을 내서 온 거였기에 오래 있긴 힘들었다. “……뭐야.” 인파 밖으로 나오자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유아린. “왜 그러는데. 표정이 별로 안 좋은데?” “사람이 많은 곳을 내가 별로 안 좋아해.” “그거 때문이 아닌 거 같은데?” 하여간 눈치는 빠르다. “얼른 가자. 대리님들이 화내시겠다.” “…….” 억지로 말을 돌리면서 발걸음을 빠르게 하자 유아린이 다급하게 나를 쫓아와서는 팔짱을 꼈다. 좀 아플 정도로 힘을 주고 있었는데, 마치 놓을 수 없다고 시위라도 하는 느낌. 나만 감정이 일렁이는 게 아니라 유아린 역시 묘한 초조함을 느끼고 있어 보였기에. 나는 입을 꾹 다문 채로 걸음을 늦춰, 그녀와 발을 맞췄다. * * * “예린 씨, 진짜 잘하던데요?” “맞아요. 와, 나 벽 느꼈잖아. 이게 천재인가?” “히, 감사해요.” 배우들의 칭찬에 입꼬리가 늘어지는 걸 참지 못한 서예린. 그들의 칭찬이 좋은 것보다는 가서 자랑할 생각에 설레는 중이었다. 프로인 배우들에게 칭찬을 받은 거였으니까. “근데 혹시 오늘…….” “야야, 부담드리지 마.” 앞에서 배우들이 뭐라 뭐라 떠들고 있었지만, 서예린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핸드폰을 한 번 힐끔 내려다본 후, 주변을 둘러본다. ‘애들이 온다고 했는데.’ 분명 쉬는 시간에 구경 오겠다고 했었다. 슬슬 시작한다고 톡도 보냈으니까 왔을 텐데. “아…….” 그때 서예린의 눈에 들어온 남녀. 김우진과 유아린은 등을 돌린 채로 다시 일터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익숙하게 팔짱을 끼고 있는 유아린과 그런 그녀에게 발을 맞추며 걸어주고 있는 김우진. “…….” 묘한 감정이 차올랐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았는데. 칭찬도 듣고, 그걸 김우진이랑 다른 친구들에게 가서 자랑할 생각에 설레기도 했다. “예린 씨, 방금 장면 너무 좋아서 감독님이 예고편에 꼭 넣는대요.” 주연인 차승호가 말해준 희소식에도 서예린은 마음 편히 좋아할 수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최이서도 그렇고, 유아린도 그렇고. 최근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서로 두루뭉술하긴 해도 사이가 틀어지진 않겠구나 다행히 여기고 있었으나. 꾸욱.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멍하니 두 사람이 떠나가는 걸 쳐다보던 서예린은, 결국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들었고. - 익명69: 섹X 하고 싶다아아아! 늘 하고 있으나, 오늘은 좀 더 짙은 감정을 담아 한마디 툭 올려봤으나. “하.” 쓰라린 숨이 흘러나왔다. 전혀, 정말 조금도. 무엇 하나 후련해지지 않았다. * * * “네?! 그게 정말입니까!” 조감독은 골드원 호텔 측에서 온 연락을 받고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너무 감사합니다! 네! 네! 정말 감사합니다!” 심지어는 전화를 받으면서 고개도 몇 번이나 숙일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고 할 수 있었다. 뚝. 전화가 끊기고, 조감독은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주먹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나이스! 나이스! 나이스!” 카지노 내부 촬영을 엄금하던 골드원 측에서 무려 이틀이나 시간을 주면서 내부에서 촬영이 가능하게 해준다는 것. 그 정도면 충분했다. 카지노가 문을 닫는 늦은 심야에만 촬영이 가능하지만 저쪽에서 조명이나 내부 복장 등도 따로 빌려줄 수 있다는 호의까지 보여주었다. 보수적이던 골드원에서 갑자기 왜 이렇게 호의적으로 변한 건지 모르겠으나. “제작비가 도대체 얼마가 세이브 되는 거야.” 훨씬 실감 나는 배경과 더불어 따로 세트장이나 CG를 넣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제작비가 감축된다. 바로 촬영팀이랑 배우 쪽에 연락을 넣으면서 카지노 내부 촬영 가능 소식을 알렸고 다들 기뻐해 주었다. “진짜 잘됐네요, 감독님.” “그치? 크흠, 근데 차배우…….” 그리고 주연인 차승호에게 연락하는 와중 조감독은 은근슬쩍 한 가지 제안을 해왔다. “그, 오늘 촬영했던 예린 씨 있잖아?” “아, 네. 이름도 외우셨어요?” 외울 수밖에.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하지 않던가. 서예린은 분명 대배우가 될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예린 씨를 좀 더 활용해 보는 건 어떨까? 대사 몇 개 더 주고 간략하게나마 조력자 역할로.” “예린 씨 저희 쪽에서 먼저 침 발라 놓은 거 아시죠?” 혹시 서예린을 빼돌릴까 걱정되는 마음에 차승호가 한마디 했고, 조감독도 허탈하게 웃었다. “당연히 알지. 애초에 나는 그냥 감독인데 뭘. 너무 짧게 나오기엔 아쉬워서 그래. 오늘 보니까 연기도 좀 날 것이긴 해도 잘하더구만.” “…….” “예고편에 예린 씨 장면 넣을 건데 딱 그것만 나오면 좀 아쉽잖아. YS 측에서도 예린 씨 더 나오면 좋은 거 아냐?” “그건, 그렇죠?” 차세대 스타가 미리 관객들에게 얼굴도장 찍고 들어가는 거였으니까. “……제가 예린 씨한테 한 번 말해볼게요.” “그래, 부탁할게.” 그리 통화를 끝내고, 조감독은 바로 각본가에게 전화를 걸었다.